Never touch Eldmia Ega RAW novel - Chapter (552)
마신교의 퇴로를 뚫기 위해 레비엥에 모인 이들의 만남은 여러모로 극적이었다.
레비엥의 기사들은 통칭 마도 갑옷이라 불리는 신병기를 차고 있는 수많은 제국 기사들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반대로 제국 기사들은 기병만큼이나 많은 비룡 부대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반 병사들은 레비엥이라는 도시 자체가 가져다 주는 상징성에 심취하여 잔뜩 고조되었고, 그런 감정 속에서 마주한 레비엥 변경백을 보고는 진심으로 환호했다.
아무리 평민이라고 해도 들리는 귀가 있고 생각하는 머리가 있는 법이다. 수도 뿐만 아니라 이티스엘 전역에서 이제는 흔하게 퍼진 레비엥 변경백의 극적인 인생사를 음유시인의 입을 통해 들으면서도, 절반 이상 거짓과 허풍이 섞여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가 홀로 목숨을 부지하여 때를 기다린 끝에 왕실의 도움을 받아 반역자 엔벨데의 음모를 처단하고, 힘을 키워 기어이 고향을 되찾았다는 내용은 흔히 들려오는 위대한 영웅담 중 하나라 여길 수준이긴 했으나… 시기가 너무 적절하다보니 살을 붙여 지어낸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는 합리적인 의심에 의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아티펙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견고하고 화려한 붉은 갑옷을 걸친 채 투구를 벗어 얼굴을 드러낸 변경백의 모습을 보자마자 모든 의심을 지울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미모의 여성이긴 하지만 그 눈빛과 행동거지는 동화 속에서 나오는 귀족 아가씨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렇게 빚어진 거대한 환호성 속에서 침착함을 연기하며 용사 지크프리트와 마주 서게 된 라그니스는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용사가 온다는 건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아실리에와 셰릴까지 따라 온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덕분에 철저하게 사무적인 태도만을 유지하며 수도에서부터 먼 길을 온 병력을 환영하고 끝내려 했던 라그니스는 간만에 마주한 반가운 얼굴들을 보며 들뜬 마음을 추스르느라 적잖이 고생해야 했다.
지크프리트를 비롯한 파티 일행들도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라그니스의 모습에 당혹에 가까운 놀라움을 느끼긴 했으나,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왕국 아카데미 학생들 앞에 서서 라그니스를 바라보고 있던 셰릴이었다.
처음엔 최측근인 레니사인 줄 알았다. 그녀가 투구를 벗고 주근깨가 박힌 익숙한 얼굴을 드러냈음에도 셰릴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레니사 경도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저렇게 앞에 나서는 거지?’ 정도였다.
“레비엥 변경백은 굉장한 여장부였군요.”
“과연, 왕국의 방패를 이어나가는 자의 기백이 느껴진다.”
어지간하면 뜨는 일이 없는 실눈을 살짝 뜬 채 감탄하는 그리윌스와 진짜 뭐가 느껴지는 게 맞긴 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떠드는 칼리츠의 감탄을 듣고 나서야 셰릴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살짝 자괴감에 빠졌다.
주변에서 아무리 천재라고 떠받들어도 자만하지 않았다. 검술에 한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정도로 급격한 성장을 보여줬다. ‘이대로만 간다면…’ 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그걸로는 부족했다는 걸 라그니스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오가토르프는 변경백과 연이 깊었지? 처음 수도로 귀환하셨을 때부터 저러셨나?”
“아니. 그땐 한없이 약하셨지.”
마법에 재능이 있을 뿐인 몰락한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 그게 라그니스 리엔 다 레비엥이 가진 입지였다.
“변경백께서 그간 많은 노력을 하신 모양이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번뜩이는 보랏빛 눈동자는 그 뒤로 짧은 환영식이 끝날 때까지 오직 라그니스만을 응시했다.
◈
환영식 때 여러 사람들의 만감이 교차했던 것과 달리 아실리에는 라그니스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엘드미아와 지내면서 여러모로 유하기 그지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거지, 한때 엘프 사냥꾼들을 상대하며 말 그대로 숲을 날아다녔던 그녀였다. 행사를 위해 갖춰 입은 신기한 갑옷을 벗고 드레스 위로 드러난 라그니스의 몸을 보자마자 얼마나 열심히 단련했는지 대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녀의 육체적인 성장이 아니라 화염 계열 특화로 배워 온 라그니스의 마법에서 정령의 기운마저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손님을 맞이하고 익숙하게 마법을 사용해 난로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바라본 아실리에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영창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만 해도 굉장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많이 공부했구나?”
“그럼요. 매번 엘드미아에게 도움만 받을 수는 없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라그니스였지만, 정령사도 아닌데 간단하게 사용한 원소 마법에서조차 정령이 느껴진다는 건 마법의 완성도가 남다르다는 뜻이었다. 불과 몇 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감탄하며 자리에 앉자 능숙한 동작으로 하녀들이 다가와 다기를 준비하고 차를 따라주었다.
사용인들을 제외하면 아실리에와 라그니스 그리고 태연하게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있는 라이카 밖에 없는 집무실이었지만 다기는 한 세트가 더 놓여져 있었다. 보는 눈이 있는 만큼 일단 상석에 앉은 라그니스는 빈 자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셰릴이 좀 늦네요.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 정리도 끝났을 거 같은데.”
“다른 학생들과는 절차가 좀 다르다고 하던걸? 아마 그래서 늦어지는 거 같아.”
“절차라…”
아무리 오가토르프 가문의 소가주라고는 해도 워낙 특혜나 특례와는 거리가 먼 집안이다보니 절차가 다르다는 이야기가 쉬이 와닿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당사자가 오면 알 수 있을 테니, 라그니스는 우선 아실리에와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행히 두 사람의 관심사에는 아주 완벽한 교집합이 존재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처음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땐 깜짝 놀랐어요. 대체 언제 마족령으로 들어간 거죠?”
무사히 돌아오고 있을 것을 의심하진 않지만 궁금한 게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다. 가는 길마다 사건 사고를 끌고 다니는 엘드미아는 훌륭한 이야기 거리가 되어주었고, 덕분에 두 사람은 셰릴이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할 때까지 쉴 틈 없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아실리에도, 라그니스도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하고 평범한 대화였다. 그 주제가 되는 엘드미아가 벌인 기행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탓에 마음 고생이 심했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좀 늦었어.”
그렇게 찻 잔을 한 번 비울 때쯤이 되어서야 셰릴이 도착했다.
“어서와. 안 그래도 엘드미아 욕하다가 이제 슬슬 네가 왜 늦는지 궁금해 하던 참이었어. 드레스 잘 어울리네.”
“아무래도 최근 입을 일이 없다보니 어색하네.”
그녀는 아실리에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라그니스에게 편하게 말을 놓으면서도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 때문에 많이 어색한 것인지, 꽤 힘들 게 걸음을 옮겼다.
순간 병사로서 참여한 원정이었기에 별도의 사복을 준비하지 않은 걸 후회한 셰릴이었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의자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렇게 모이는 건 엘드미아의 서임식 때 이후로 처음이네. 그래도 다들 건강해보여서 다행이야.”
“맞는 말씀입니다. 저야 수도에서 있을 뿐이지만 두 사람은 전선에 인접해 있으니 조금 걱정이었는데… 기우에 불과했군요.”
아직은 아실리에가 어색한 것인지 평소보다도 딱딱해지는 셰릴을 보며 짧게 웃은 라그니스는 능숙하게 셰릴이 지각한 이유를 물어보는 쪽으로 화재를 전환했고, 그녀가 따라주는 찻잔을 받아 마시며 목을 축인 셰릴은 짧은 숨을 내쉬며 덤덤하게 대답해주었다.
“편제를 아카데미에서 용사 파티의 보조로 바꾸는 과정이 생각보다 좀 오래 걸렸어. 이미 위에서 다 이야기가 진행된 거였는데, 동행한 교수들의 반발이 좀 있었거든.”
“용사 파티? 지크프리트랑 다니는 거야?”
“응. 저번 사룡 건으로 면식이 있다보니 저 쪽에서 따로 요청을 했던 모양이야.”
보조라는 표현을 썼다고는 하나 무려 용사 파티에 초빙된 것이거늘 정작 당사자는 한없이 별거 아니라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건 라그니스나 아실리에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저 ‘아, 그랬구나.’ 정도의 반응을 보여줄 뿐, 오히려 용사 파티가 눈 여겨볼 정도로 셰릴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검술만 좀 괜찮은 수준이지 아직 부족해.”
아카데미 학생들과 교수들이 들었다면 게거품을 물고 질투했을 발언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는 두 사람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간만에 모여 복잡한 이야기 없이 근황을 나누며 웃음 꽃을 피우길 한 시간 정도.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방해하지 말라고 미리 언질을 했기에 인기척조차 없던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들어와.”
누군지 물어보지 않는다. 라그니스가 접근을 허락한 이는 레니사 한 명뿐이었으니까. 예상할 것도 뭣도 없이, 열린 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건 당연하게도 레니사였다.
하지만 아주 많이 당혹스럽다는 표정이라는 게 걸려서 라그니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자신을 세로 리피티의 자식이자 여덟 발자국의 대족장이라 밝힌 수인이 뭔가 엄청나게 많은 물자를 이끌고 오더니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 중입니다.”
그녀의 당혹스러움은 빠르게 전염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