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touch Eldmia Ega RAW novel - Chapter (572)
이 세상에 선신들의 영향력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처럼 악신들의 영향력 역시 존재한다.
당장 가까이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는 마왕군이 보유한 악신의 잔재만 봐도 그렇다. 죽었다고 취급되는 악신의 잔재에마저 신성이 남아 사용이 가능한데, 어떻게 완전히 뿌리를 뽑겠는가.
그나마 이쪽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강대한 힘을 발휘했던 악신들을 막아 냈으니 잠잠한 것이지, 우리 동네가 아닌 저 바다 건너 어딘가에서는 악신의 사도 같은 것들과 싸우느라 고군분투하는 녀석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몬스터라는 것들은 그런 사악한 것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된다.
그래서 처단하고 뿌리 뽑아 박멸시켜야 하는 존재인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신처럼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없는 무언가인 것이다.
그런 새끼들이랑 손을 잡고 협력을 해? 무슨 야생 늑대같은 걸 길들여서 사냥개로 써먹는다든가 적의 포로를 붙잡아 총알받이로 쓰는 것과는 아예 수준이 다른 문제다.
그냥 마왕을 신으로 만들겠다고 지들끼리 으쌰으쌰 거리는 것까지는 상세한 내막을 모르니 이해까지는 해 줄 수 있다.
악신의 잔재는 말 그대로 죽었으니 OK 아니냐는 안일한 마인드로 접근했다고 치면, 그 역시 핵미사일이 처음 완성되었을 때 돈주고 유료 피폭을 당했던 이들처럼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다고 여기고 어찌저찌 가까스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물론 그걸 시도한 핵심 인력들은 싹 다 대가리를 깨버려야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몬스터와 손잡는 건 그럴 수 없다. 그것들은 애초부터 지성체를 습격하고 약탈하거나 잡아먹게끔 만들어진 괴물들이다. 만국공통, 종족불문 악마와 비슷한 취급을 받아야 정상이란 말이다.
“그런 기본적인 인식조차 안 잡혀 있는 거냐, 아니면 하도 주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 보니 둔감해진 거냐?”
“그, 둘 다일 거 같습니다.”
“솔직한 거 하나만큼은 장점이구나.”
곧이곧대로 대답은 또박또박 하는 놈을 향해 한숨을 내쉬며, 나와 칼 칸시는 자가용의 안장에 순찰대장을 단단히 묶었다.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아무리 그 리치 새끼의 존재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라이카가 자가용과 함께 오지 않았다면 쏘르에서부터 가져가고 있던 중요 정보를 넘기기 위해 왕국군과의 접선을 우선시 해야 했을 테니까.
대충 이틀에서 삼일이면 도착한다고 라이카가 말했으니, 그동안 이놈이 깨더라도 똥오줌을 지리는 것만 아니면 녀석과 우리가 가져온 정보는 무사히 왕국군에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만 덜렁 보내면 라이카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오해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짧게 편지를 동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라이카.”
[응!]힘찬 대답과 함께 우리와 거리를 벌린 자가용에게 라이카가 다가가자 녀석은 아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다리를 뻗어 라이카를 쥐더니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조차 녀석이 저렇게 힘이 좋았던가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기에 칼 칸시뿐만 아니라 에밋마저도 그 움직임에는 조금 놀란 듯했다.
“정말 별의별 경우를 다 보는군. 마검이었던 유사 신수神獸에, 그 말을 알아듣는 비룡이라니…”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자가용의 뒤를 바라보며 헛웃음과 함께 작은 중얼거림을 내뱉는 에밋이었다.
듣고 보니 어째 평범한 게 하나도 없긴 하다. 그래도 온갖 우여곡절 끝에 이젠 마검이 맞기나 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라이카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
“어쨌든 자네가 양심이 있어서 다행이군. 우리를 떼어놓고 저 친구만 데리고 간다고 했으면 나중에 성녀님한테 뭐라 말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말이지.”
“쟤 덩치가 조금만 더 컸어도 그랬을 텐데 아쉽네요.”
에밋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치며 짐을 꾸린 우리는 자진 납세자를 앞 세워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짚어 가기 시작했다.
포로에게 자신의 본진이었던 곳을 향한 길 안내를 맡긴다는 발상이 골 때리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우리 손에는 마왕군의 거점 정보가 있다 보니 잘못된 길에 들어서거나 함정에 휘말릴 걱정은 조금도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팔 하나 정도는 부러뜨릴 생각이었는데 녀석은 정말 순순히 안내를 이어나갔다. 의심받을 행동조차 안 하기 위해 열심히 신경을 쓰는 모습은 그 짧은 순간에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도망칠 자신은 없고, 뒤에서는 뭐 하나 잘못하면 신체 일부분부터 잘라내려는 사람이 바짝 따라오고 있다면 누구나 협조적으로 행동하지 않을까?”
비겁하게도 지극히 합리적이고 논리 정연한 팩트로 녀석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칼 칸시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이어진 여행길은 왕국군과 합류하기 위해 움직일 때보다 몇 배는 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것도 역시 자진 납세자의 적극적인 협조 덕이었다.
머릿수가 많긴 했지만 놈은 정말 마왕군의 순찰대가 맞았고, 초행길을 안내해야 했던 칼 칸시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길을 찾아내면서도 능숙하게 마왕군들을 피해 움직였다.
하지만 피하는 건 어디까지나 마왕군 뿐이었다. 인근에 몬스터가 있다 싶으면 주저 없이 파고들어서 뿌리까지 뽑아내는 과정을 네 차례 정도 반복했을까? 우리는 이틀에 걸쳐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가 옆길로 빠져 꼬박 하루를 더 걷고 나서야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진짜 좆 같은 곳에 있네.”
숨만 쉬어도 질병에 감염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숲속은 분명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왔던 다른 지역과 하등 다를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보적으로 음침했다. 해가 떠 있음에도 숲은 어두웠고,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짙게 깔려 모든 형태가 흐릿하게 보이는 탓에 더할 나위 없이 스산한 분위기다.
한 때 건축물의 일부였을 것으로 예상되는 석재들과 잔해가 한가득할 뿐만 아니라 발을 딛기 전부터 저 안에서 꿈틀거리는 오묘한 기척들이 느껴질 정도로 불쾌한 숲속의 끄트머리에는, 반 정도 허물어진 거 같은 첨탑이 죽은 시체와도 같은 빛을 띈 채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진 납세자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건 그 첨탑이었다.
“리치는 저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느 교단의 신전이었던 것인지 안 그래도 멀쩡한 부분이 튼튼했던 걸 군에게 지원까지 받아 가며 물리적으로도 마법적으로 추가 보강까지 마친 상태라 보이는 것 이상으로 견고합니다.”
“거리가 꽤 있는 거 같은데 저렇게 크게 보인다고?”
“실제로도 꽤 큰 편입니다. 규모를 보면 과거에 이 일대에 큰 도시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칼 칸시와 자진 납세자가 짧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숲속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별다른 규칙성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누가 봐도 우리를 인지하고 접근하는 모양새였다.
“인근에 널린 언데드들은 뭐냐?”
“리치의… 사역마라고 할 수 있나요 이거? 아무튼 리치가 만든 방범책입니다. 무슨 수를 쓰는 것인지는 몰라도 저걸 통해 저희를 확인하더군요.”
“속여 넘길 수 있어?”
“아뇨. 지휘부에게 따로 지급받는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1회성이죠.”
아주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소리로군. 나중에 왕국군과 합류하고 나면 그 부대만큼은 확실하게 붙잡아서 자세한 내막을 알아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흠, 상대가 리치인만큼 고위 언데드가 있을 수도 있다네. 어쩌겠는가? 잘 죽지도 않는 것들이니 적당히 피하면서 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하네만.”
이성적인 판단이었지만 내키지 않았다.
사령술사같은 놈들이 불러내는 언데드는 뼈와 시체를 조합하여 만드는 골렘에 가깝지만 리치가 만들어 내는 언데드는 별도의 생명체에 가깝다. 리치가 죽는다고 해서 이곳에 있는 언데드들이 알아서 소멸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현대인의 마음가짐이 아직 남아 있는 탓에, 알아서 사라지지 않는 쓰레기들을 굳이 못 본 척 지나갈 생각이 없었던 나는 간만에 챙긴 카쿨라의 도끼를 꺼내 쥐며 대답했다.
“시체 새끼 눈치 봐가면서 기어 다니는 취미가 없다 보니.”
“…자네는 정말 이런 거에 예민하게 반응하는군. 용사라서 그런가?”
“글쎄요, 이번엔 마법만 쓰는 게 아니라 쓸 수 있는 건 다 쓰겠습니다.”
“물론 그래야지. 이런 상황에서까지 마법만 쓰라고 할 정도로 못된 선생은 아니라네.”
어깨를 으쓱이며 지팡이를 고쳐쥐는 에밋을 보며 짧게 웃어 보인 나는 양손 도끼에 축복을 건 뒤 짙은 안개 너머로 일렁이는 그림자를 향해 집어 던졌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가 놀랐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오랜만에 투척된 양손 도끼는 정확하게 그림자에 적중하여 놈의 상태를 터트리다시피 했다.
아무래도 시체라서 내구도가 영 좋지 못한 모양인지 좀 과하게 터지는 감이 없진 않았으나, 오랜만에 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명중률과 위력이었다.
“간만에 쓰니까 좋네.”
“……아니, 보통 양손 도끼를 투척용으로 쓰나?”
어안이 벙벙해진 칼 칸시가 납득이 안 간다는 듯 던진 질문에 말 대신 되돌아오는 도끼로 대답해주며 기억을 되짚어보니, 드러누웠던 이후로 제대로 된 근접전은 처음이었다.
시체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재활 치료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