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07
1007회. 내 이름을 왕국식으로 하면 어떻게 돼요?
프릿츠 남작의 검에 희뿌연 안개가 어리자 일리아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한 응급처치를 떠올렸다.
이럴 때는 자신이 마법사가 아니라는 게 안타까웠다.
마법사의 치료마법이 치료사의 기술보다 백배 나은 까닭이다.
그녀는 기사가 자신을 ‘그리폰 기사단의 기사 롤프 프릿츠 남작’이라고 소개할 때 야인의 패배를 확신했다.
전사의 검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마나를 각성하지 못하면 소드맨(검사)이라 불린다.
소드맨 중에서 마나 각성에 성공해 마나 포스(Mana Fos)를 발현하면, ‘소드 비기너’라는 칭호와 함께 ‘남작’의 작위를 내린다.
그 말은 프릿츠 남작이 단순한 마나 각성자가 아니라 마나 포스의 경지에 이른 진짜 기사라는 소리였다.
‘마나 유저의 상대는 마나 유저다’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굳센 숲’ 부족의 ‘연못에 비친 붉은 노을’의 검술이 소드마스터급에 이르지 못했다면 패할 게 분명했다.
영기 수련자들에게 마나 유저는 넘지 못할 벽이기 때문이다.
연적하는 프릿츠 남작의 검신에서 안개와 같은 기운이 피어오르자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전형적인 검기의 발현이었다.
물론 형체 없이 일렁이기만 하는 검기에 비해 좀 더 뚜렷한 형태를 가졌지만, 본질은 검기였다.
그래서 자신도 검기를 끌어 올려 봤다.
츠으으―.
야인의 포스(Fos)를 본 프릿츠 남작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멍청한 놈.’
그는 그리폰 기사단의 자랑인 슈타우터 검술을 쓸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야인의 포스에 슈타우터 검술이라니!
그거야말로 돼지를 잡는 데 검술을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릿츠 남작은 빠르게 다가가 야인을 양단하겠다는 기세로 내리찍었다.
프릿츠 남작의 검과 연적하의 검이 중간에서 맞부닥쳤다.
채앵―!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연적하의 검신이 뒤로 튕겼다.
마나 포스에 야인의 검이 밀렸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훗!”
프릿츠 남작이 비웃음과 함께 연격을 퍼부었다.
챙! 채앵―!
연적하는 힘에서 밀린 듯 연신 뒷걸음질 쳤다.
야인이 수비에 급급하자 프릿츠 남작은 마치 도끼질이라도 하듯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챙! 챙! 채앵―!
그런데 폭풍처럼 몰아쳐 가는 프릿츠 남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지? 왜 멀쩡한 거지?’
마나 포스의 강력한 힘에 야인이 검을 떨구거나, 그게 아니라면 검신이 잘렸어야 한다.
그런데 야인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같이 미약한 포스로 자신의 마나 포스를 받아 내고 있었다.
‘이놈이!’
울컥한 프릿츠 남작은 마나를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츠으으으―.
검신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그 상태에서 프릿츠 남작은 야인의 허리를 베어 갔다.
프릿츠 남작의 검과 연적하의 검이 다시 한번 정면으로 맞부닥쳤다.
쩡―!
처음으로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났다.
순간 연적하의 눈매가 좁아졌다.
두 치(약 6센티) 너비의 검신이 무려 손가락 한 마디만큼이나 파먹혔다.
조금만 더 상대의 힘이 강했다면 검신이 잘렸을 터였다.
검기 대 검기의 싸움에서 밀린다는 느낌을 받으니 속이 쓰렸다.
구천여일진경(九天如一眞經)을 익힌 뒤로 처음 있는 일이다.
‘제길! 마나가 영기보다 두 단계쯤 위라더니…….’
순간 프릿츠 남작이 작정한 듯 성큼 다가오며 검을 머리 위로 치켜세웠다.
고작 검기 발현의 상대에게 져 본 적이 없던 연적하는 ‘울컥!’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즉시 한 단계 위의 진검기를 검신으로 밀어 넣었다.
우웅―.
묵직한 검명과 함께 연적하의 검신이 하얗게 빛났다.
이른바 검광(劍光)의 단계다.
이윽고 프릿츠 남작의 마나 포스와 연적하의 검광이 만났다.
창―!
철벽을 때린 것 같은 반탄력에 프릿츠 남작의 어깨가 움찔했다.
작정하고 내리찍었던 프릿츠 남작은 손목이 꺾이는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그는 노련하게 튕겨져 나온 검으로 슈타우터 검술을 펼쳤다.
쉬이익―!
연적하는 무심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자신의 검광이 마나 포스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게 느껴졌다.
마나가 영기보다 월등하게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창! 창! 차앙―!
워낙 검의 무게가 무거워서 그런지 무림에서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은 없었다.
물론 연적하의 기준에서 그런 것이지 프릿츠 남작의 견습기사 웨버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야인의 오라(Aura, 검광)로 마나 포스를 막아 낼 수 있는 거지?’
그는 프릿츠 남작이 슈타우터 검술까지 쓰고도 야인을 눕히지 못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야인을 가지고 노시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웨버는 프릿츠 남작의 표정을 살폈다.
‘헉! 아니다?’
힘에 부치는지 남작의 얼굴은 땀범벅이었다.
그에 반해 야인의 얼굴은 소름 끼치리만치 멀쩡했다.
누가 들으면 헛소리라고 할 테지만, 상대를 가지고 노는 사람은 프릿츠 남작이 아니라 야인 같았다.
한편 상대와 자신의 기량을 확인한 연적하는 검에 영기를 더 불어넣었다.
우우웅―!
연적하의 검은 마치 태양처럼 빛났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프릿츠 남작이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연적하는 집요하게 달라붙으며 연격을 날렸다.
챙! 채앵―!
단 두 번의 칼질에 프릿츠 남작의 검이 삼등분 됐다.
혼이 나간 얼굴로 굳어 있는 프릿츠 남작의 이마를 연적하가 검 손잡이로 내리찍었다.
퍽―!
수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프릿츠 남작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연적하가 쓰러진 프릿츠 남작을 발로 툭툭 건드렸지만 그는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연적하가 이번에는 웨버에게 걸어갔다.
“형씨, 칼 잘 썼어. 그런데 쇠가 좀 무딘 거 같더라. 칼 몇번 부딪쳤다고 이빨이 이렇게 나가냐.”
“송구합니다.”
“송구는 무슨. 남작이나 깨워 봐.”
“예, 예…….”
칼을 갈무리한 웨버는 급히 남작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남작은 웨버가 몇 번 흔들자 깨어났다.
정신을 차린 프릿츠 남작이 엉거주춤 일어나자, 연적하가 손을 까딱였다.
프릿츠 남작이 쭈뼛쭈뼛 야인 청년에게 다가갔다.
연적하가 그를 빤히 보며 물었다.
“남작님. 내가 결투 규칙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결투에서 이기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머뭇거리던 프릿츠 남작이 마지못한 얼굴로 답했다.
“정의의 여신이 승리하게 하였으니……. 승자의 주장이 진실이며, 정의가 된다고 할 수 있소.”
순간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씨! 푸른 숲[綠林]하고 똑같네. 사람 사는 데가 다 비슷한가 봐. 그거는 마음에 든다. 힘 센 놈이 정의라는 거네?”
“…….”
프릿츠 남작은 모멸감에 이를 악물었다.
귀족의 지위를 내세워 어떻게 해 볼까 생각도 잠시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야인의 검술 경지는 최소한 ‘소드 비기너’니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남작’의 작위를 받게 될 터였다.
비록 그가 오라(Aura)를 썼지만 영기 수련자의 오라는 ‘소드 익스퍼트’로 인정받지 못한다.
영기 수련자가 만든 일반 ‘오라’는 마나 유저의 ‘마나 오라’에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약하기 때문이다.
생각에 잠긴 프릿츠 남작의 귓가로 야인 청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가서 푸토코아 백작의 후계자에게 전해요. 만약 나 때문에 푸토코아 백작령의 야인들을 괴롭히면……. 새로운 후계자를 찾아야 할 거라고. 무슨 소린지 알죠?”
“어리석은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라면 피했을 상황에 연루된다는 말이 있소. 푸토코아 백작가를 자극해서 좋을 일은 없소이다.”
“그럼 남작님이 순화해서 내 뜻을 전해요. 괜히 야인들을 건드리면 내 보복이 뒤따를 거라고.”
“알겠소.”
얼핏 보면 프릿츠 남작이 야인 청년과 푸토코아 백작가를 중재하는 모양새지만 사실은 달랐다.
지금 그가 ‘백작가를 자극해서 좋을 일이 없다’고 만류한 것은 야인 청년을 위해서가 아니다.
야인 청년이 한 말을 전했다가는 자신마저 위험해지니 그러지 못하게 한 것에 불과했다.
그는 야인 청년의 협박보다 푸토코아 백작의 장자인 토비아스 푸토코아를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혈기 왕성한 후계자 토비아스 푸토코아의 비위를 거슬렀다가는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릿츠 남작이 볼 때 푸토코아 백작가의 힘에 비하면 야인 청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푸토코아 백작가가 야인 청년을 건드리지 않는 건 그의 후견인이 베르나르도 후작이라서 그런 거지, 야인 청년의 검술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베르나르도 후작이 푸토코아 백작령의 야인들까지 보호해 주지는 않겠지.’
그럼 문제없다.
야인이 토비아스 푸토코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면, 야인들의 피로 씻으면 되는 거다.
잠시 후 프릿츠 남작은 견습기사들을 데리고 조용히 떠났다.
던져 두었던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산책을 나가려고 하는 연적하의 곁으로 일리아나가 다가왔다.
“연못에 비친 붉은 노을 님, 팔과 다리는 좀 어떠세요?”
멍하니 듣고 있던 연적하가 어깨를 들썩이며 ‘킥킥!’ 웃었다.
“왜 웃으세요?”
“이름이 너무 길어서요.”
“아, 혹시 이름을 왕국 식으로 바꾸실 건가요?”
“그러려고요. 이름 부르다가 숨넘어갈 것 같아요.”
“훗!”
실소를 흘리던 일리아나는 야인 청년을 힐끔 보았다.
자신이 이름을 바꾼 것은 평범한 치료사의 삶을 살기 위해서다.
‘연못에 비친 붉은 노을’은 어떤 마음으로 바꾸려는 것일까?
“치료사님, 내 이름을 왕국식으로 하면 어떻게 돼요?”
“노을이 ‘엘리오’고 연못이 ‘라고아’니까, 혹시 작위를 받게 되면 ‘엘리오 라고아’라는 이름을 쓰면 될 거예요.”
엘리오 라고아라는 이름을 몇 번 불러 보던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이제부터 나를 엘리오라고 불러 줘요. ‘연못에 비친 붉은 노을’은 너무 튀어서.”
이름이 길다는 건 핑계고 연적하는 벌써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다.
“그럴게요. 엘리오 님은 이제 ‘굳센 숲’ 부족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건가요?”
“돌아갈 거예요.”
“아!”
일리아나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엘리오를 보았다.
망설임도 없이 답하는 걸 보니 진심인 모양이다.
“언제쯤 돌아갈 생각이세요?”
“그 전에 해야 할 일을 마쳐야 해요.”
“산에서 나온 이유도 그것 때문인가 봐요?”
“네.”
“어떤 일인지 궁금하네요.”
일리아나의 말에 연적하는 웃기만 했다.
야인 주제에 이 세계 최고 신들을 잡으러 왔다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할 게다.
“왜 웃으세요? 제가 도움이 되어 줄지도 모르잖아요? 저 이래 봬도 왕국에서 나름 유명한 치료사라서 아는 사람 많아요.”
이 정도면 과분한 호의다.
문득 연적하가 고개를 들어 일리아나를 보았다.
“그건 베르나르도 후작의 지시인가요?”
“…….”
잠시 침묵하던 일리아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앰버가 남작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선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아 마당에는 둘밖에 없었다.
“본래 내 이름은 ‘팽나무 아래 시끄러운 강물’이었어요. 푸토코아 백작령에 있는 ‘하얀 바위’ 부족에서 태어났죠. 병약하게 태어난 나를 살리기 위해서 부모님은 산에서 나왔어요. 병치레나 하던 야인족 아이가 치료사까지 됐으니, 나름 성공한 인생이죠?”
일리아나가 엘리오를 보았지만 여전히 납득한 얼굴이 아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아쉽게도 후작님과의 인맥은 아직 없네요. 그 정도로 성공한 치료사는 아니라서. 대답이 됐나요?”
“후작의 지시든, 순수한 호의든 상관없어요. 어차피 인맥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그러니까 일리아나 님도 나에 대해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러자 일리아나가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거절로 받아들일게요. 내가 내민 손을 마다한 사람이 없었는데, 친해지기 어려운 분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