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06
1006회. 결투를 신청한다
엔아르케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치료사인 일리아나의 실력은 뛰어났다.
사흘 만에 연적하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자유롭게 마을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그는 마을 안팎을 다니며 이 세계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다 슬슬 땅거미가 지자 치료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막 치료소 안으로 들어설 때다.
앰버라는 이름의 괴팍한 여자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이봐요! 어디를 가면 간다고 말을 해 줘야죠! 오늘 내가 그쪽을 찾아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나를 왜 찾아다녀요?”
“푸토코아 백작령에서 그쪽을 찾으러 사람들이 왔었다고요. 내일 아침에 다시 온다고 했으니까, 내일은 어디 나가지 말고 숙소에 있어요.”
연적하가 눈을 찌푸렸다.
사흘 전에 치료사가 귀띔해 준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그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대요?”
“당신의 정체를 아는 누군가가 푸토코아 백작령에 흘렸겠죠.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돌아다니는데 소문이 안 나면 이상하죠. 당신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눈에 띄는지 알아요?”
“쩝…….”
앰버의 지적에 연적하는 할 말이 없었다.
이곳 엔아르케에서 흑발은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야인 청년을 쏘아보던 앰버가 한마디 덧붙였다.
“내일은 꼼짝도 하지 마요.”
그러나 연적하는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상대가 강압적으로 나오니 어깃장이 난 것이다.
앰버는 야인 청년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얼른 자리를 피했다.
여자의 뒷모습을 보던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하여튼 밉상이라니까.”
치료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왜 저렇게 사람 차별을 하는지 모르겠다.
고개를 젓던 연적하는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는 숙소 앞에서 치료사 일리아나와 마주쳤다.
일리아나가 눈인사를 하며 말했다.
“방에 빵과 스프를 가져다 놓았어요. 그런데 소식 들었나요? 오후에 푸토코아 백작령 사람들이 찾아왔었는데.”
“아, 네. 조금 전에 앰버라는 아가씨에게 들었어요.”
“그랬군요.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도 될까요?”
연적하는 일리아나가 야인 부족을 걱정한다고 느꼈다.
조금 전 앰버의 속을 긁는 말투에 상했던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모르겠어요. 일단 만나 보려고요.”
그는 만나서 대화를 하다 보면 뭔가 길이 열릴 거라 생각했다.
“아무쪼록 좋은 쪽으로 해결이 되기를 바라요. 스프가 식기 전에 드세요.”
말을 마친 일리아나는 그를 스쳐 지나갔다.
몇 걸음 가던 그녀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연못에 비친 붉은 노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딱히 불안하거나 초조해 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늘은 일부러 앰버를 엉뚱한 곳으로 보내 엇갈리게 만들었는데, 내일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될 것 같다.
왠지 믿음이 갔다.
‘잘 하겠지?’
야인들은 부족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나다.
부족 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도 푸토코아 백작령의 야인들에게 해가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게다.
한편 방으로 들어간 연적하는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탁자 위에 놓인 희멀건 스프와 나무토막 같은 빵 한 덩이를 보고 있으려니 착잡했다.
배는 고팠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볼수록 식욕이 뚝 떨어졌지만 살려면 뭐라도 먹어야 했다.
빵을 찢어 스프에 적신 후 입에 넣는 그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그동안 로디나 대륙의 식생활에 적응을 한 것이다.
어느덧 스프가 바닥을 드러냈다.
연적하는 마지막 빵 조각으로 접시를 싹싹 닦은 뒤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허전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했다.
식사도 부실하지만, 식후에 식솔들과 마시던 차와 왁자지껄하던 대화가 그리웠다.
다음 날 아침.
앰버는 특별한 용무 없이 환자들의 숙소를 들락거렸다.
연적하는 단번에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밖으로 나가는지 감시하는 게 분명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녀의 행동을 보고 있으려니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 기가 막혔다.
‘참 일관성 있는 여자라니까.’
앰버가 남자였으면 불러서 몇 대 쥐어박았을 게다.
어차피 푸토코아 백작령 사람들과 만날 계획이던 연적하는 방에서 진기요상에 몰입했다.
푸토코아 백작령 사람들이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빙벽에 가 볼 생각이었다.
그곳이야말로 혼돈 그 자체일 테니까 말이다.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일주천을 마칠 즈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푸토코아 백작령 사람들이 온 것이다.
눈을 뜬 연적하는 보란 듯 막대기를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일리아나와 앰버의 뒤로 세 남자가 보였다.
두 사람의 기도는 그저 그랬지만 남은 하나가 달랐다.
삼십 대 중반의 사내는 강한지 약한지 도통 가늠이 되지 않았다.
며칠 전 자신을 찾아왔던 공작과 후작, 마법사를 볼 때와 같았다.
짙은 안개 속을 보는 느낌이랄까?
강호에서는 대체로 상대가 자신보다 뛰어날 경우 가늠하기 어려웠다.
예컨대 오봉산에서 한창 도적질할 때 만난 의천검존, 파천마군이 그랬다.
‘저 남자가 나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추측하기 어려운 것과 별개로 두렵지도 않았다.
문득 그건 상대가 강해서 그런 게 아니라 마나의 특성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적하의 앞에서 멈춰 선 일리아나와 앰버가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이윽고 일리아나가 남자들을 향해 말했다.
“저분이 베르나르도 후작님이 저희 치료소에 치료를 맡긴 야인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견습기사인 막스가 나섰다.
“우리는 푸토코아 백작가의 그리폰 기사단이다. 네가 푸토코아 백작가의 병사라고 들었다. 맞느냐?”
“그런데요?”
연적하가 되묻자 막스는 살짝 언성을 높였다.
“‘예’와 ‘아니오’ 중에 하나만 택해라. 너는 푸토코아 백작가가 고용한 야인 부족의 일원이냐?”
“맞는데요.”
“그렇다면 짐을 꾸려 우리를 따라오거라. 푸토코아 백작령의 치료소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 주겠다.”
연적하가 애매한 얼굴로 말했다.
“베르나르도 후작님이 이곳에서 치료받으라고 했는데, 푸토코아 백작령으로 가도 되나요?”
“강요하지 않을 테니 스스로 결정해라. 푸토코아 백작가와 맺은 신성한 계약의 의무를 다할 것인지, 아니면 저버릴 것인지.”
“푸토코아 백작가의 새 주인은 인품이 훌륭하신가 봐요? 야인 병사 하나까지도 알뜰하게 챙기시는 걸 보니.”
순간 롤프 프릿츠 남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말은 명백하게도 푸토코아 백작의 후계자를 비꼬는 소리였다.
감히 야인 주제에 푸토코아 백작가를 비웃다니?
히르헤라 균열에서 일어난 전투가 궁금하지 않았다면, ―한낱 야인 따위를 데려가기 위해― 기사를 파견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남작이 불쾌감을 얼굴에 드러내자 막스가 버럭 소리쳤다.
“이놈! 야인 주제에 감히 푸토코아 백작가를 모욕하다니! 죽고 싶으냐!”
연적하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똥물에 빠져 죽을 놈이 어따 대고 욕이야! 나를 데려가고 싶으면 베르나르도 후작님에게 말해!”
베르나르도 후작의 이름이 나오자 막스는 슬쩍 프릿츠 남작을 돌아보았다.
남작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보내 주지 말라는 뜻이다.
기다렸다는 듯 막스가 야인 청년의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나는 프릿츠 남작님의 견습기사 막스다! 나와 푸토코아 백작가를 모욕한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유스티아 여신께서 불의한 자의 검을 꺾으실 것이다.”
로디나 대륙에서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아의 이름을 걸고 결투를 신청하면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연적하는 그런 자세한 내막까지 알지 못했지만 당당하게 응했다.
“어, 그래. 덤벼 봐.”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생각도 없지만, ‘마나 유저’와 ‘영기 수련자’의 차이를 알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막스가 황당한 눈으로 야인 청년을 보았다.
결투를 하겠다는 상대가 자신이 누군지 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옆으로 비켜나 있던 일리아나가 연적하에게 말했다.
“결투에 앞서 자신이 어디의 누군지 말해 줘야 해요.”
그제야 연적하는 오연한 얼굴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굳센 숲’ 부족의 ‘연못에 비친 붉은 노을’이다. 와 봐.”
말과 함께 그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막스가 동료 견습기사 웨버를 돌아보았다.
“웨버. 저 야인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게 네 검이라도 빌려줬으면 좋겠는데?”
그러자 웨버는 흔쾌히 자신의 검을 풀어 야인 청년에게 건넸다.
연적하는 무덤덤한 얼굴로 중검을 받아 들었다.
‘이놈들 얼굴에 철판을 깔았네.’
팔과 다리의 뼈가 부러져 막대기를 짚고 서 있는 사람에게, 검 한 자루를 빌려주면서 공정을 말한다.
이윽고 연적하가 막대기를 버리고 중검에 의지해 서자, 막스는 검을 상단으로 치켜세웠다.
아직 소드 비기너(입문자)도 되지 못한 막스는 힘과 기술로 야인을 때려눕힐 생각이었다.
“차핫!”
막스가 요란한 기합과 함께 야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그를 무심한 눈을 보던 연적하가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촹―!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막스의 몸이 날아갔다.
일격에 막스의 검이 부러지고, 갑옷이 움푹 찌그러졌다.
땅에 처박힌 막스는 기절을 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웨버는 너무도 현격한 차이에 감히 나서지 못하고 남작의 눈치만 살폈다.
견습기사의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한 롤프 프릿츠 남작이 말했다.
“베르나르도 후작께서 관심을 가질 만도 하구나. 그렇다고 해서 푸토코아 백작가를 모욕한 너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 그리폰 기사단의 기사 롤프 프릿츠 남작은, 푸토코아 백작가를 조롱한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는 막스와 달리 ‘정의의 여신’ 유스티아를 거론하지 않았다.
상대에게 회피할 기회를 준 것이다.
‘소드 비기너’인 그는 축복받은 ‘마나 유저’로서 팔과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야인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승리를 얻었다 해도 그건 개인이나 그리폰 기사단에 명예스러운 일이 못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롱한 게 아니라고 변명하거나, 지금은 몸이 낫지 않았으니 거절한다고 하면 끝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결투가 처음인― 연적하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알지 못했다.
“덤벼요.”
야인이 결투에 환장한 사람처럼 자신에게 손가락을 까딱이자, 프릿츠 남작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마나는 영기보다 두 단계나 위에 있다. ‘마나 유저’인 자신이 ‘소드 비기너’니 야인이 영기로 ‘소드마스터’급에 도달하기 이전에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야인의 나이는 이십 대 중후반.
‘소드마스터’가 아니라 잘해야 ‘소드 익스퍼트’급이다.
침착하게 화를 가라앉힌 프릿츠 남작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무슨 꿍꿍이로 나와 싸우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결투의 참관인들이 증언해 줄 것이다. 이 결투를 원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너라는 것을.”
조마조마한 눈으로 지켜보던 일리아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프릿츠 남작에게 야인이 결투의 규칙을 몰라서 그런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귀족의 결투에 평민이 끼어드는 건, 결투를 모욕한 행위로 간주되어 중벌을 받는다.
그녀는 ‘굳센 숲’의 야인이 이번 결투로 죽지 않기만을 바랐다.
스으으으―.
프릿츠 남작의 검신에 희뿌연 안개가 어렸다.
‘쇠도 자른다’는 마나 포스(Mana Fos)의 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