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17
1017회. 아홉 하늘의 수호신이십니다
저 깊고 험한 몬타노사 산맥의 레인저였다는 파비안의 말에도 연적하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엘리오가 레인저 부대에 대해 모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파비안이 한마디 덧붙였다.
“정찰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레인저 부대라고 합니다.”
“뭐든 상관없어. 길만 헤매지 않으면 돼.”
연적하가 확인하듯 파비안의 눈을 지그시 보았다.
파비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짐하듯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같이 가 보자고. 참고로 나는 이 지역(타메이온)에 뭐가 있는지 몰라. 그러니까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엘리오 님을 그림자처럼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런 마음 가짐 아주 마음에 들어. 그럼 슬슬 움직여 보자고.”
연적하는 파비안과 함께 균열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파비안이 레인저 부대 출신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가급적 빙벽을 시야에 두고 움직였다.
마수는 물론 마물까지도 출몰한다니 최대한 몸을 사린 것이다.
다행히 오전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
육지 최강 생명체인 아이스 오우거의 출현으로 인근 마수가 달아난 탓이다.
정오 무렵.
눈 덮인 숲속 공터에 연적하와 파비안이 마주 앉았다.
연적하가 덜덜 떨고 있는 파비안에게 물었다.
“이봐. 경은 기사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추위를 타?”
그러자 파비안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답했다.
“원래 기사라도 3시간 이상은 바깥 활동을 못 합니다.”
“균열 앞을 사흘간 지킨다면서?”
“잠깐이라도 천막에서 몸을 녹이지 않으면 버티질 못합니다.”
“경도 그런 거야?”
“엘리오 님이 특별한 겁니다. 모든 기사들이 다 3시간에 한 번씩은 몸을 녹입니다.”
“아니, 그런 체력으로 왜 나를 따라다니겠다고 한 거야?”
“엘리오 님, 혹시 파이어 스톤 가진 거 없으십니까? 작은 조각이라도.”
“파이어 스톤이 뭐야?”
되묻는 엘리오의 표정을 본 파비안은 절망했다.
그에게 파이어 스톤이 없다면 자신은 죽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균열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큰일이다. 균열까지 최소 2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
이런 몸 상태로 균열까지 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파이어 스톤은 불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 돌입니다. 그래서 불을 붙여 주면 화력이 오래 유지됩니다. 조각이라도 있으면 얼어붙은 나무를 태울 수 있습니다.”
“돌에 불이 붙는다고?”
“예, 아무 돌이나 그런 건 아니고 불의 기운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막사에서 주먹만 한 파이어 스톤 태우는 거 보셨잖습니까.”
“그거 석탄 아니었어? 나는 발갛게 타길래 석탄인 줄 알았는데.”
“실내에서 석탄을 그렇게 태우면 죽습니다. 파이어 스톤만 실내에서의 사용이 가능합니다.”
“알았어. 그러니까 나무라도 태우지 않으면 경은 알파 중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네?”
그러자 파비안이 처연한 얼굴로 말했다.
“제 몸 상태로 균열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사가 왜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해? 일단 불부터 피워 보자고.”
“파이어 스톤 조각이 없으면 안 됩니다. 대설원의 나무는 꽁꽁 얼어 있어서 부싯깃(tinder)으로는 불을 피울 수 없습니다.”
“뭐든 포기부터 하는 습관은 버리라고. 참, 3시간에 한 번 쉬는 거 말야. 정해진 시간이 있어? 아니면 몸만 녹이면 되는 거야?”
“그야 당연히 몸만 녹이면 됩니다. 하지만 대설원에서 불을 피우려면 파이어 스톤이 있어야 합니다.”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더 추울 테니까 나무나 좀 모아 봐.”
이제 슬슬 한계에 도달했는지 파비안이 덜덜 떨며 말했다.
“하, 하나 마나입니다. 파이어 스톤이 아니면 수천 년 동안 얼어 있던 나무를 녹일 수가 없습니다.”
“거 사람이 귀찮다는 소리를 저렇게 하네. 일어나 움직이라고!”
소드마스터의 호통에 마지못해 일어난 파비안은 근처에서 한 아름 되는 나무를 뽑아 들고 왔다.
연적하는 파비안이 구해 온 나무를 천둔검으로 툭툭 쳐 적당한 크기로 다듬어 쌓았다.
“소, 소용없습니다. 마법사가 파이어 볼이라도 날려 주지 않는 한, 부, 불이 붙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나무를 적당히 쌓아 올린 연적하가 문득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파비안 경, 나와 관계된 일을 평생 비밀로 한다고 약속해.”
“야, 약속하면 불이 붙습니까?”
“그럴걸?”
“야, 약속하겠습니다. 불, 불을 피워 주십쇼.”
“기사의 명예를 걸어.”
“기, 기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립니다.”
그제야 연적하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공간 창고 마하담에 넣어 둔 부적을 찾는 것이다.
갑자기 텅빈 허공에서 누런 종이 한 뭉치가 튀어나오자 파비안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아, 아공간 아티팩트를 가지고 계셨습니까?”
파비안은 ‘그 종이를 불쏘시개로 사용한다 해도 불은 붙지 않을 겁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연적하는 부적을 뒤적거렸다.
화염부(火焰符)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화염부를 찾아 든 연적하는 그것을 장작더미에 던졌다.
“구천현녀님, 다만 의지하오니 신력으로 불꽃을 드러내 주십쇼[九天玄女 但憑火焰威神力]!”
순간 부적에서 일어난 화염이 장작더미를 집어삼켰다.
화르륵―.
불길이 얼마나 거셌던지 얼었던 장작더미가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파비안은 예상치 못한 엘리오의 마법에 깜짝 놀랐지만 본능적으로 장작불 가까이 몸을 붙였다.
한 아름이나 되는 나무들이 나뭇가지처럼 쉽게 타들어 가는 걸 보고 있으려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다.
“엘리오 님, 그건 야인족 마법입니까?”
주문 영창으로 마법을 쓰는 평범한 마법사와 달리 엘리오가 종이를 사용해 물어본 것이다.
“어, 비슷해.”
연적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무를 더 집어넣었다.
화염부의 화력이 너무 세서 통나무가 금방 타 버린 탓이다.
활활 타오르던 화염부는 파비안이 가지고 온 아름드리나무 하나를 다 태우고서야 스르륵 소멸했다.
“엘리오 님, 나무가 없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이제 파이어 스톤은 없어도 되겠습니다.”
그러자 연적하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진 부적이 다 떨어지면 불을 못 피워. 그러니까 파이어 스톤이 있는 게 좋아. 파이어 스톤은 지상에 있어? 지하에 있어?”
“지상과 지하 모두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불의 기운이 담긴 돌을 찾으면 된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간단하네.”
연적하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기로 화기(火氣)를 찾으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정령사가 아니면 불의 기운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마나를 수련한다면서? 불의 기운도 감지 못 해?”
“마나는 보다 근원적인 힘이라서요. 이를테면 마법사가 불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불의 기운을 감지하지는 못합니다. 탐색 마법으로 불의 기운을 찾는 건 가능합니다만.”
“순수한 본인의 능력으로 감지할 수는 없다?”
“그렇습니다. 마법의 도움 없이 그게 가능한 사람을 정령사라고 부릅니다.”
연적하는 파비안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기로 가능한 것을 마나가 할 수 없다니 묘했다.
“재밌네. 영기로는 기운을 찾는 게 가능할 것 같은데.”
“정령이나 영기가 자연을 기반으로 해서 그럴 겁니다. 하지만 마나는 그것들과 결이 다릅니다.”
“그래도 정령사의 대우는 좋다면서?”
“정령사 역시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하! 개나 소나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천대받는다?”
“그보다는 사람의 노력으로 얻는 힘보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힘이 더 강해서 그렇습니다.”
“아…….”
연적하는 이 세계의 원리를 어느 정도 알 것도 같았다.
누구라도 창조신에게 선택받을 수 있으니 공평하다고 해야 할지, 사람이 노력해 봐야 선택받은 사람보다 못하니 더럽다고 해야 할지…….
생각에 잠긴 연적하의 귓가로 파비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는 엘리오 님이 샤스트라 파라크티 님의 신자인 줄 몰랐습니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샤스트라 파라크티가 왜 나와?”
순간 파비안이 황당한 눈으로 엘리오를 보았다.
방금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이름으로 마법을 사용해 놓고, 왜 나오냐니?
“조금 전에 불 마법을 하실 때,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나는 ‘구천현녀’님의 이름으로 했는데?”
“어이쿠! 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지금도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이라고 하시면서…….”
그제야 연적하는 모두가 아티팩트의 통역으로 생긴 일임을 깨달았다.
‘가만? 구천현녀를 샤스트라 파라크티로 통역했다고?’
저들이 ‘샤스트라 파라크티’를 말할 때는 자신에게도 똑같이 들리는데, 자신이 ‘구천현녀’를 발음할 때면 ‘샤스트라 파라크티’로 통역되는 모양이다.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에 대해 설명해 봐.”
“정말 모르십니까?”
“모르니까 묻지.”
고개를 끄덕이던 파비안이 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웠다.
“저기 뭐가 보이십니까?”
“하늘?”
“네, 맞습니다. 이 세계의 하늘이지요.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은 이 세계를 포함한 아홉 하늘의 수호신이십니다.”
“아홉 하늘?”
“아홉 차원의 주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정확한 건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사도들만 알 테죠?”
“그럼 혹시 이 세계의 창조신이 샤스트라 파라크티야?”
“어이쿠! 그럴 리가요? 이 세계를 창조하신 신은 마나 프트라스십니다.”
“샤스트라 파라크티가 아홉 하늘의 주인이라면서?”
“그런 말도 있다고 했지 제가 언제 주인이라고 했습니까?”
“그럼 창조신이 이 세계를 만들었고, 수호신이 샤스트라 파라크티라는 거지?”
“그게 정설입니다.”
“흐음!”
연적하의 입에서 묵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구천현녀가 여러 진선(眞仙)들 가운데 하나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빙산의 일각이었다.
아홉 개나 되는 차원의 수호신이라니?
상상도 못 할 일이 아닌가 말이다.
“엘리오 님은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의 이름으로 마법을 쓰시고서 왜 저에게 그분에 관해 물으십니까?”
잠시 생각하던 연적하는 파비안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반지 보이지? 이게 궁정 마법사에게 받은 통역 아티팩트야. 나는 사실 대륙어를 몰라. 우리 부족의 언어와 대륙어가 달라서 그랬던 거야.”
“아!”
파비안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엘리오의 설명을 들으니 그간의 사정이 이해가 갔다.
“엘리오 님의 부족어로는 이름이 다른가 봅니다?”
“어. ‘구천현녀’라고 해.”
“하하. 지금 뭐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제 귀에는 ‘샤스트라 파라크티’로 들립니다. 어쩐지, 가끔씩 말씀을 이상하게 하신 것도 그래서였군요.”
“통역이 시원치 않아서 귀족들에게 가끔 오해도 받고 그래.”
“대륙 공용어를 배우면 나아지실 겁니다. 단어의 뜻을 알게되면 통역이 매끄러워진다고 들었습니다.”
“알았어. 여하튼 나하고 지내면서 보고 들은 건 모두 무덤까지 가지고 가. 어기면 명예가 아니라…….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어.”
연적하는 파비안으로 인해 자신의 일이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다.
만약 그가 떠벌리고 다닐 기미가 보인다 싶으면, 그를 죽여서라도 입을 봉할 생각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쇼. 죽으면 죽었지 명예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파비안이 호언장담했다.
명예가 아니더라도 소드마스터급 검술에 마법까지 사용하는 엘리오를 배신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활활 타오르던 나무가 빨간 숯으로 변했다.
은은한 온기 속에서 연적하와 파비안은 각자 지니고 있던 에너지 볼을 꺼내 입에 물었다.
쩝쩝거리며 씹던 파비안이 감개무량한 얼굴로 말했다.
“꼼짝없이 얼어 죽는 줄 알았는데 인생은 정말…….”
“쉿!”
연적하가 파비안의 말을 끊었다.
순간 눈치 빠른 파비안은 숨을 멈추고 연적하를 보았다.
이윽고 바람결에 ―사람의 것도 아니고 짐승의 것도 아닌―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