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18
1018회. 네 이름 기억해 주마
소리를 듣던 파비안이 갑자기 엘리오에게 물었다.
“엘리오 님,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자 엘리오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내가 경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 이게 무슨 귀신이 볍씨 까먹는 소리야? 전에 들어 본 적 없어?”
“전혀요. 엘리오 님의 아티팩트로도 해석이 안 되는 소리인가 봅니다?”
“그런가?”
그제야 연적하는 파비안이 왜 자신에게 뜻을 물어봤는지 알았다.
“아티팩트로 해석이 안 되는 언어가 있나?”
“대체로 언어라면 해석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참. 이상하네. 한번 가서 확인해 보자고. 뭐가 저런 소리를 내는지.”
연적하가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소리는 빙벽 인근에서 나고 있었다.
일다경(약 20분)쯤 눈을 헤치며 전진하던 연적하가 멈춰 섰다.
빙벽에서 멀지 않은 설원에 일 장(약 3미터)여 길이의 말뚝이 꽂혀 있는데, 그 말뚝을 중심으로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서 있었다.
얼어붙은 나무숲에서 연적하가 파비안에게 속삭였다.
“저게 뭔지 알아?”
“트레이더(Traidor) 같습니다.”
“트레이더?”
연적하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벌써 이 빙벽 앞에서 두 번째 듣는 소리였다.
“마족에게 영혼을 판 흑마법사를 트레이더라고 합니다.”
“영혼을 판다고?”
연적하는 문득 유명교주를 떠올렸다.
그녀 역시 염마왕에게 영혼을 저당잡히고 천두마왕이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마법사가 마족들의 권능을 빌려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무슨 권능?”
“태고의 마족이나 칠십이 마신 중에 하나를 불러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불러내서 뭘 하는데?”
“흑마법사가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하겠죠.”
“트레이더들이 저렇게 모여서 뭘 하기도 해?”
“그러게요. 저도 트레이더들의 모임은 처음 봅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요? 헉!”
파비안의 입에서 비명 같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돌연 트레이더들이 옆 사람을 꿇어앉히더니, 그들의 목에 칼을 박아 넣었기 때문이다.
말뚝을 중심으로 사방 십 미터의 설원이 붉게 물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피가 아니라 혈기(血氣)였다.
말뚝 주변에 서 있는 트레이더는 여섯.
그들 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붉은 혈기가 말뚝으로 빨려 들었다.
말뚝 주위의 혈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피 냄새를 맡고 마수들이 어슬렁어슬렁 모여들었다.
하지만 마수들은 말뚝 주변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때다.
일 장여 길이의 말뚝이 설원으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말뚝이 절반쯤 들어갔을까?
보고 있던 파비안이 자못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엘리오 님, 왠지 저 말뚝이 사라지면 안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안 될 건 뭐야?”
“트레이더들이 뭘 노리는지 모르지만, 말뚝과 관계가 있을 게 틀림없으니까요.”
“뭐, 일단 얘기는 들어 보는 게 낫겠지?”
연적하는 트레이더들과의 만남이 처음이라 싸우려 하기보다 대화를 먼저 떠올렸다.
“아직 트레이더에 대해 몰라서 그러시는데…….”
파비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적하는 숲을 벗어났다.
마족의 땅인 타메이온에서 비밀스러운 행사를 하던 흑마법사 딜런 던포드가 멈칫했다.
한 젊은 남자가 설원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타메이온에 사람이?’
복장을 보니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기사였다.
균열을 지키는 줄로만 알았는데 타메이온까지 넘어올 줄이야!
뒤늦게 기사의 출현을 눈치챈 다른 흑마법사들이 딜런 던포드를 주목했다.
“어떤 기사가 타메이온까지 왔는지 궁금하군. 묘비를 세워 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름 정도는 알고 싶으니 잠시 내버려 두어라.”
다섯 명의 흑마법사들이 고개를 숙인 후 딜런 던포드의 뒤에 늘어섰다.
청년이 십여 보 앞에 도달하자 딜런 던포드가 말했다.
“멈추어라. 너는 누구냐?”
연적하가 마법사들의 뒤를 힐끔 보았다.
말뚝은 완전히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주변에 널브러진 여섯 구의 시체가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을 터였다.
“나는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기사 엘리오입니다. 여러분은 악명이 자자한 트레이더 맞죠?”
“어리석구나. 우리가 누군지 알면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냐?”
“말로만 들었지 트레이더를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니까요. 자아, 트레이더 여러분. 이제부터 내 말에 정직하게 대답을 해 줘야겠습니다. 타메이온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딜런 던포드의 어깨가 가볍게 들썩였다.
“흐흐흐!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재밌는 기사가 있었구나. 최초로 타메이온에 발을 디딘 기사여. 네 이름 기억해 주마.”
그 말을 끝으로 딜런 던포드가 돌아섰다.
순간 뒤쪽에 있던 다섯 명의 흑마법사들이 주문을 영창했다.
“보칸테 카다베리토! 스켈레톤 나이트!”
“카다베 크렙투스!”
언데드 소환을 위한 ‘첸트 오브 나이트메어’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모두가 4서클의 흑마법이라 기사 하나에게는 과한 느낌이다.
설원에서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꾸물꾸물 기어 나오고, 죽은 시체 여섯 구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미련 없이 걸어가던 던포드는 문득 치밀어 오르는 호기심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십 구의 스켈레톤 나이트와 여섯 구의 시체가 기사를 압박하고 있었다.
전투에 있어 마법사가 검사보다 한 단계 위로 대접받는 것을 생각하면 소드 익스퍼트(전문가)에게도 어려운 싸움이다.
스켈레톤 나이트의 뼈는 ‘마나 오라’로만 부술 수가 있다.
어지간한 기사들은 죽음을 모르고 돌진하는 스켈레톤 나이트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마침내 기사와 스켈레톤 나이트가 충돌했다.
콰자자작―!
‘응?’
딜런 던포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가고 있었다.
고작 이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데 소드 익스퍼트였던 모양이다.
떠나려던 딜런 던포드는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완전히 돌아섰다.
그 짧은 순간 절반의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사라졌다.
열 구의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슬쩍 기사와 거리를 벌렸다.
그사이 여섯 구의 시체가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우람한 스켈레톤 나이트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몸짓처럼 보였다.
연적하는 조금 전에 죽은 시체들이 달려오자 흠칫했다.
‘강시인가?’
강호에서도 강시술을 하는 술사들이 있었다.
해골 기사들보다 훨씬 연약해 보이는 강시를 왜 앞세우는지 모르겠다.
그는 천둔검으로 다가온 시체들을 일격에 베었다.
순간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세상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콰콰콰콰쾅―!
반사적으로 호신강기를 펼쳤음에도 내부가 진탕될 정도로 충격은 컸다.
과연 해골 기사를 뒤로 물릴 정도의 강력함이다.
연적하는 천둔검에 의지해 숨을 골랐다.
모르고 당해 충격이 컸지만 위태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사이 다시 해골 기사들이 롱소드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연적하의 시선이 해골 기사들의 너머에 있는 흑마법사들을 향했다.
또다시 마법 영창에 들어 간 걸 보니 쉴 틈 없이 몰아치려는 모양이다.
그때 숲에서 파비안이 요란한 기합과 함께 달려 나왔다.
자신을 돕겠다고 끼어든 것이다.
순간 설원에서 해골 기사 다섯이 기어 올라와 파비안을 향해 마주 나아갔다.
챙! 챙! 채앵―!
파비안과 해골 기사들이 검격을 주고받았다.
단순 무식한 해골 기사에 비해 파비안의 검술이 월등히 뛰어났지만, 그의 검에 쓰러지는 해골 기사는 없었다.
어느새 자신에게 달라붙은 해골 기사의 숫자가 늘어났다.
‘쯧! 해골 기사가 아니라 흑마법사를 제압해야 싸움이 끝나겠는걸?’
흑마법사들의 마법을 더 보고 싶었지만, 궁지에 몰린 파비안을 생각하면 그럴 시간이 없었다.
‘끝내자.’
연적하가 천둔검을 휘두르자 수백 개의 검영이 부챗살처럼 해골 기사들에게 뻗어 갔다.
구천구검 오 식 산검멸지(散劍滅地)다.
콰자자자자작―!
산산조각 난 해골 기사들이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스켈레톤 나이트를 꿰뚫은 검영이 흑마법사들을 덮쳤다.
깜짝 놀란 흑마법사들은 즉시 다크 실드를 펼쳤다.
흑마법사들의 앞에 어둠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쿠쿠쿠쿠쿵―!
검영이 어둠에 꽂힐 때마다 천둥 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둠의 장막에 균열이 가는가 싶더니 한순간 흩어졌다.
당황한 흑마법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할 때다.
멀찍이서 보던 딜런 던포드가 들고 있던 고풍스러운 지팡이로 엘리오를 가리켰다.
순간 그와 엘리오 사이의 허공에 마력장이 생성됐다.
뒤이어 마력장에서 검은 창들이 쏟아져 나와 엘리오를 향해 날아갔다.
6서클 흑마법 다크 스피어다.
연적하는 즉시 풍화겁륜(風火劫輪)으로 맞받아쳤다.
천둔검에서 일어난 검풍이 수레바퀴처럼 돌며 검은 창들에 맞섰다.
콰콰콰콰콰콰―!
검은 창들이 기괴한 소리와 함께 검풍에 갈려 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다.
풍화겁륜의 회전이 조금씩 느려지더니 한순간 퍽 하고 사라졌다.
곧이어 검은 창들이 연적하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퍼퍼퍼퍼퍽―!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자리를 피한 연적하는 즉시 천둔검을 흑마법사에게 던졌다.
쐐애액―!
찢어지는 파공성과 함께 천둔검이 딜런 던포드를 향해 날아갔다.
순간 딜런 던포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살다 살다 검을 던지는 기사는 처음이다.
“미친!”
그는 즉시 블링크(공간 이동술)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빈손이 된 엘리오에게 다시 한번 다크 스피어를 날렸다.
허공에 떠 있던 마력장에서 수백 개의 다크 스피어가 빠져나와 엘리오를 향해 날아갔다.
딜런 던포드는 빈손의 엘리오에게 다크 스피어를 상대할 방법이 없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죽어라!”
의기양양한 얼굴로 외치던 딜런 던포드는 오싹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헉!”
엘리오의 롱소드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마법사의 ‘매직 애로우(마법 화살)’도 아니고, 롱소드가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블링크로 이동했다.
한가하게 다크 스피어를 쳐다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퍼퍼퍼퍽―!
멀리서 다크 스피어의 타격음이 들렸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다크 스피어를 블링크까지 쓸 줄 아는 엘리오 같은 마검사가 피하지 못할 리 없기 때문이다.
딜런 던포드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마족의 땅인 타메이온에서 인간 마검사를 만나 고전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연적하와 딜런 던포드는 공간을 이동해 가며 천둔검과 다크 스피어로 상대를 압박했다.
답답하기는 연적하도 마찬가지였다.
흑마법사의 신묘한 공간 이동술은 이기어검으로도 따라잡기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찰나지간에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움직이는 흑마법사를 상대할 기술이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구천검령이라면 스스로 움직이는 검이니 결국 흑마법사를 격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광활한 설원에서 함부로 그걸 꺼낼 수는 없었다.
연적하가 흑마법사의 처리를 두고 고민할 때, 딜런 던포드가 우뚝 멈춰 섰다.
지루한 탐색전에 지친 딜런 던포드는 궁극의 마법을 쓸 생각이었다.
그 마법으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도 있지만, 베르나르도 후작의 기사 둘이 죽으면 해결될 문제였다.
하늘에 생성된 이래 방금까지 다크 스피어를 쏟아 내던 마력장이 스르륵 사라졌다.
뒤이어 딜런 던포드는 자신의 마력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가공할 마력에 그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고오오오―.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천둔검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딜런 던포드의 몸을 때렸다.
그러나 천둔검은 딜런 던포드의 마력 실드를 뚫지 못했다.
텅―!
허망한 소리와 함께 천둔검이 뒤로 튕겨 났다.
연적하는 즉시 검결지로 튕겨 난 천둔검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러면서도 연적하는 흑마법사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흑마법사의 푸른 눈동자에서 마치 도깨비불 같은 시퍼런 광망이 요요하게 흘러나왔다.
곧이어 딜런 던포드가 지팡이로 엘리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죽어라.”
그것은 7서클 이상의 최고 마법사 마구스(Magus)만의 절대 언령 마법인 ‘데스 워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