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39
1039회.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이라고 하던가.
데니스 로빈 남작이 파비안의 방정맞은 입놀림을 야단칠 때다.
드드득―.
가벼운 진동이 균열 앞 설원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데니스 로빈 남작은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의 근처에 있던 기사와 병사 들이 한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데니스 로빈 남작은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막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기사와 병사 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들의 긴장된 행동은 이내 알파 중대에 퍼져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파 중대는 묘지처럼 고요해졌다.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
거친 바람만 설원 위를 사납게 쓸고 지나갔다.
휘이잉― 휘잉―!
모두가 데니스 로빈 남작의 다음 행동을 기다릴 때다.
드드드득―!
균열 아래에서 시작된 진동이 마치 파도처럼 알파 중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밀려왔다.
순간 데니스 로빈 남작이 알파 중대원들을 향해 짧게 소리쳤다.
“칼림바움이다! 움직이지 말고! 소리도 내지 마라!”
애석하게도 그 말을 들은 건 알파 중대원만이 아니었다.
돌연 금을 긋는 것처럼 설원에 긴 선이 그어졌다.
그 선의 끝에 데니스 로빈 남작이 서 있었다.
드드득―!
균열 앞에서부터 일직선으로 갈라져 나가던 설원이 데니스 로빈 남작의 앞에서 멈췄다.
데니스 로빈 남작은 숨을 멈추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땅밑의 칼림바움이 주둔지로 향하기를 내심 기원했다.
주둔지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주둔지는 멀었고, 취침 시간이라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젠장. 가라. 가라. 가라.’
칼림바움이 주둔지로 향하면 종을 쳐서 알려 주면 된다.
물론 종소리에 칼림바움이 돌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알파 중대도 칼림바움과 싸울 준비를 끝낸 상태일 테니 상관없다.
아주 잠깐 동안 시간을 벌면 된다.
‘제발 가라고!’
그런데 칼림바움은 ―자신의 발밑에서 갑자기 잠이라도 든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데니스 로빈 남작이 고개를 갸웃할 때다.
콰아아―.
설원에서 거머리를 닮은 거대한 마물이 튀어 올라왔다.
지름이 이십 미터가 넘는 몸통에, 뻥 뚫린 동굴 같은 입에는 수천 개의 이빨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그 충격적인 모습 앞에 데니스 로빈 남작이 얼어 있을 때, 엘리오가 번개처럼 날아가 그를 낚아챘다.
그 순간 칼림바움의 거대한 입이 데니스 로빈 남작의 자리에 처박혔다.
콰드드득―!
칼림바움은 마치 바닷속에 빠진 것처럼 설원 아래로 사라졌다.
허공을 훨훨 날아간 엘리오는 데니스 로빈 남작을 내려놓은 뒤, 보란 듯 설원 위를 달렸다.
그런 엘리오의 뒤로 설원이 쩍쩍 갈라져 나갔다.
드드드득―!
칼림바움의 목표가 된 것이다.
곧이어 칼림바움이 설원을 뚫고 솟구쳐 올랐다.
거의 동시에 엘리오의 몸도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칼림바움은 멈추지 않고 거대한 입을 벌린 채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안 돼!”
데니스 로빈 남작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기사의 도약력은 한계가 있다.
등에 날개가 달려 있지 않은 이상 십 미터 이상은 무리다.
그러나 칼림바움의 몸체 길이는 삼십여 미터에 달한다.
조금 전 설원으로 튀어나왔을 때도 이십여 미터나 몸을 세웠다.
그는 엘리오가 칼림바움의 입에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엘리오의 몸은 마치 하늘로 쏜 마력탄처럼 끝없이 날아갔다.
금방이라도 그를 삼킬 듯하던 칼림바움이 정지했다.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 칼림바움과 달리 엘리오의 몸은 더 높이 날아올랐다.
약이 오르는지 빳빳하게 몸체를 세운 칼림바움의 입에서 괴성이 흘러나왔다.
우어어어어엉―!
칼림바움의 기괴한 울음이 히르헤라를 뒤흔들었다.
그 소리에 주둔지가 발칵 뒤집혔다.
일찌감치 잠들었던 병사들이 막사 밖으로 튀어나왔다.
엘리오는 칼림바움의 입에서 오 장(약 15미터)이나 더 날아오른 뒤에 신형을 뒤집었다.
순간 칼림바움의 입에서 나오는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우! 대체 뭘 먹은 거야!”
투덜거리던 그는 천둔검을 종횡으로 휘둘렀다.
쓰아아아― 쓰아―!
열십자[十] 형태의 거대한 반월형 검강이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검강이 칼림바움의 입을 강타했다.
콰지지직! 콰직―!
그 충격에 칼림바움의 입이 급하게 오므라들었다.
그러나 그뿐이다.
놀랍게도 다시 벌어진 칼림바움의 입에는 상처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우어어어어엉―!
칼림바움이 다시 한차례 소리를 내질렀다.
어찌나 그 소리가 강력했던지 이번에는 설원이 들썩거렸다.
칼림바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알파 중대원들이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비틀거릴 정도였다.
그 충격으로 ―입 위쪽 허공에 잠시 멈춰 있던― 엘리오의 몸이 움찔하더니 급속하게 추락했다.
조바심이 나는지 칼림바움은 바람을 빨아들였다.
후우우웅―.
갑작스럽게 일어난 돌풍에 엘리오의 몸이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그 시간 데니스 로빈 남작도 바쁘게 움직였다.
“자네! 체인 메일을 벗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파이어 스톤을 모아 오도록! 서둘러라!”
기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체인 메일을 벗었다.
이윽고 소대별로 보관 중이던 파이어 스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개중에는 불붙은 파이어 스톤도 있었다.
데니스 로빈 남작은 사람 머리통 크기만큼 모인 파이어 스톤 조각들을 체인 메일에 때려 넣고 쇠사슬로 꽉 묶었다.
멀쩡하던 파이어 스톤 조각들에 불이 옮겨 붙자, 쇠고리로 만들어진 체인 메일은 금새 붉게 달아올랐다.
화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시간을 지체하면 체인 메일이 끊어질 판이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데니스 로빈 남작은 쇠사슬 한쪽 끝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칼림바움이 빨아들이는 힘에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엘리오의 몸이 수평으로 이동했다.
구룡번신(九龍翻身)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러나 칼림바움은 보기와 달리 지능이 뛰어났다.
칼림바움 역시 뱀처럼 먹이를 따라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거대한 몸체가 지나가는 곳마다 깊게 도랑이 파였다.
그걸 본 엘리오는 ‘쯧!’ 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공간까지도 이동하는 구룡번신의 수법이면 칼림바움에게서 벗어나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피하면 마물은 알파 중대를 덮칠 게 분명하다.
‘마물이라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껍데기가 질긴 거야?’
진검강에 직격당하면 ‘왕들의 하늘’에서 만난 신좌(神座)들도 상처를 입는다.
그런데 저 거머리를 닮은 마물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초식을 벗어난 경지로 조금 전의 한 수에는 구천구검의 묘용이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는 것은, 마물의 신체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뜻이다.
‘구천검령이 아니면 힘들겠는데?’
신좌가 아닌 존재를 상대로 구천검령을 떠올리기는 처음이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구천검령을 꺼낼 수는 없었다.
구룡번신으로 마물의 입 주위를 돌던 엘리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차례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구천구검 오 식 산검멸지(散劍滅地)다.
수십, 수백 개의 검영(劍影)이 칼림바움의 입에 박혔다.
콰직! 콰직! 콰지직―!
무지막지한 파열음이 쉬지 않고 울렸지만 칼림바움은 입을 닫았다 열었다 할 뿐 멀쩡했다.
순간 연적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이곳이 상계라 해도 반신(半神)의 경지에 이른 자신이 마물 하나 어쩌지 못하다니!
밀려오는 자괴감에 엘리오가 고개를 휘휘 내저을 때다.
바람처럼 달려온 데니스 로빈 남작이 때마침 벌어진 칼림바움의 입속에 불덩이를 던져 넣었다.
칼림바움의 벌어진 입 크기를 생각하면 무의미한 행동으로 보였지만, 그게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터업―!
갑자기 칼림바움이 입을 처닫은 것이다.
그리고 격통을 느끼는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달아나듯 설원으로 파고 들어갔다.
쿠드드득―.
놀랍게도 칼림바움은 등장할 때처럼 빠르게 종적을 감춰 버렸다.
엘리오가 깃털처럼 가볍게 데니스 로빈 남작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중대장님, 마물이 달아난 겁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데니스 로빈 남작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혹시 그 불덩어리 때문인가요?”
“맞습니다. 칼림바움의 유일한 약점이 불입니다. 치명적이지는 않은데, 마법사의 파이어 볼이나 파이어 스톤을 아주 싫어합니다.”
“아!”
“북부에서 마법사를 최고 대접해 주는 이유 중에 하나가 저 빌어먹을 칼림바움 때문입니다. 마법사가 없으면 파이어 볼의 위력만큼 파이어 스톤을 써야 하지요. 지금처럼요.”
“그래도 죽일 수는 없고요?”
“칼림바움의 별명이 불가사리입니다.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마족도 저놈을 피해 다닐 정도니까요.”
“대단하네요.”
엘리오는 진심으로 칼림바움의 질긴 생명력에 감탄했다.
“엘리오 경이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피해가 없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피해가 없는 건 아니죠. 파이어 스톤을 그만큼 썼는데. 쩝.”
엘리오가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북부에서 파이어 스톤은 비싼 값에 거래가 됐다.
호두알만 한 조각이 일 실버라고 하던가.
한 사람의 한 달 생활비가 일 실버니, 수박 한 덩어리만큼의 파이어 스톤이면 어마어마한 지출이었다.
“하하! 파이어 스톤이야 주둔지에서 또 가져오면 됩니다. 왕국의 위기 앞에서 파이어 스톤이 대숩니까.”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알파 중대 진지로 걸음을 옮겼다.
지휘부로 돌아간 데니스 로빈 남작이 한쪽에 엉거주춤 서 있는 파비안에게 쏘아붙였다.
“파비안, 자네는 오늘 밤 곁불도 쬐지 마라. 자네의 그 입방정 때문에 큰일 날 뻔한 거 알지?”
“죄송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다. 앞으로 방정맞은 소리는 자제하도록.”
“예, 그런데 중대장님, 불은 좀 쬐게 해 주십시오.”
파비안이 애처로운 눈으로 중대장을 보았다.
설원에서 불을 쬐지 말라는 것은 죽으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물론 중대장이 진심으로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허락을 받고 쬐는 게 마음이 편했다.
“내 눈에만 띄지 않으면 된다.”
요령껏 하라는 소리다.
그제야 파비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데니스 로빈 남작이 귀찮다는 얼굴로 손을 까딱였다.
파비안은 지은 죄가 있는지라 조심조심 물러났다.
잠시 후 주둔지로 갔던 병사들이 불사조 기사단의 기사들과 함께 균열 감시 초소로 돌아왔다.
불사조 기사단의 마크 스톤 남작을 발견한 데니스 로빈 남작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은 남작이라도 베르나르도 후작 직속의 불사조 기사단과 알파 중대 중대장의 대우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마크 스톤 남작이 데니스 로빈 남작에게 물었다.
“칼림바움의 소리가 주둔지까지 들리던데, 피해는 어느 정도나 입었습니까?”
“인명 피해는 없습니다. 대신 알파 중대가 보유하고 있던 파이어 스톤을 모두 날렸습니다.”
“인명 피해가 전혀 없었다고요?”
“전혀요. 엘리오 경께서 칼림바움의 주의를 끌어 준 덕분입니다.”
“아! 엘리오 경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쉬러 갔습니다.”
데니스 로빈 남작의 손가락이 방풍벽을 가리켰다.
때마침 파이어 스톤을 공급받았는지 방금까지 어둡던 방풍벽 너머에서 불빛이 일어났다.
마크 스톤 남작은 잠시 망설였다.
이럴 때 보통은 상대가 달려와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려 주곤 했다.
하지만 엘리오가 어디 보통 기사인가.
소드 익스퍼트에 후작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다.
머뭇거리던 그는 마지못해 불빛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