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91
1091회. 그는 예외적인 인간이오
파비안은 슬쩍 엘리오의 안색을 살폈다.
북부 최강 국가인 만큼 탈린 왕국 기사들의 자부심은 유명했다.
그런 탈린 왕국 기사단장을 연합군 기사들 앞에서 팼으니, 그냥 넘어가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마음대로 하라고 그래. 난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야.”
“탈린 왕국 기사들이 결투를 걸어올 수도 있습니다.”
“하라고 해. 줘 패 주지. 뭐가 문제야?”
“그런 식으로 탈린 왕국과 싸우다가는 왕국 간의 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꼴리는 대로 하라고 해. 내가 왕도 아니고. 괜찮아.”
엘리오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지 귀족의 체면이 아니었다.
“왕가의 눈 밖에 나면 승작이 어려워지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자작님 검술이면 공작이 되고도 남는데……. 분란을 일으키시면 백작도 어렵습니다.”
“파비안.”
“예?”
“자리에 연연하면 그때부터 인생이 피곤해지는 거야. 자작은 하루 세끼 먹고 공작은 하루 열 끼 먹냐? 어차피 자작이나 공작이나 하루 세끼 먹는 건 마찬가지야.”
“여기서 먹는 얘기가 왜 나옵니까?”
“왜 나오냐니? 먹고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자작님은 하루 세끼만 먹으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겁니까?”
“어.”
엘리오의 말에 파비안이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퍽퍽!’ 후려쳤다.
“아니, 사람이 짐승도 아니고 어떻게 먹는 것만 생각합니까? 자작님 정도 되시면 좀 더 위를 보셔야죠.”
“위에 뭐가 있는데?”
“백작, 후작, 공작요. 기사라면 못해도 백작까지는 노려 봐야죠.”
“그래서, 네 말은 술집에서 탈린 왕국의 백작이 주사를 부려도 구경만 했어야 한다는 거냐? 백작에게 욕을 한 건 너잖아! 인마! 이거 아주 앞뒤가 다른 놈이네?”
“제 말은 케른 백작 선에서 끝내자는 겁니다. 더 키워 봐야 자작님에게 손해니까요.”
“판을 내가 키우냐?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나는 싸움을 싫어해. 내가 얼마나 속이 여린 사람인데.”
“자작님이 착한 분이라는 건 제가 알죠. 제 말은 탈린 왕국에서 시비를 걸어와도 가급적 일을 키우지 마시라는 겁니다.”
“얘가 같은 소리 자꾸 하게 만드네. 우리 고향에 이런 말이 있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는데 바람이 불어와 가지를 흔든다고. 나는 나무 같은 사람이야.”
“예, 태풍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나무신데, 왜 미풍만 불어도 흔들리시냐 이겁니다. 제 말은.”
“왜 그런지 알아?”
“몰라서 물은 겁니다.”
“꼴 같지도 않은 것들이 힘을 앞세워 못된 짓 하는 걸 보면 피가 끓어.”
“자작님.”
“왜?”
“저 같은 기사가 감정대로 하면 흐지부지 끝이 납니다. 그런데 자작님 같은 분이 그렇게 하면…… 나라가 흔들립니다.”
“불의를 응징하는 일로 흔들릴 나라라면 망해도 돼.”
“정의와 불의를 따지자는 게 아니고요. 감정대로 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자작님 같은 분이 자기 감정대로 막살면 나라가 흔들린다고요.”
“나는 막산 적 없다.”
“탈린 왕국 기사들이 덤비면 다 팬다면서요. 나라가 흔들려도 왕이 아니니까 괜찮다면서요. 그 정도면 막사는 거 맞습니다.”
그러자 엘리오가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파비안.”
“예?”
“만약 네가 소드마스터라면, 너는 어떻게 할 것 같으냐?”
“…….”
파비안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엘리오가 거듭 물었다.
“탈린 왕국 기사들이 너에게 찾아와 지랄을 하면 잘못했다고 사죄할 거냐? 아니면 줘 팰 거냐?”
“……사죄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행이군. 사죄한다고 했으면 어디 한 군데 부러뜨리려고 했는데.”
“고작 그런 일로요?”
“고작이라니? 정신이 제대로 박히지 않은 소드마스터는 세상에 해악을 끼친다. 죽이겠다고 하지 않은 걸 감사해야지.”
“이럴 때 보면 자작님은 누구보다 정의로우신데, 안타깝네요.”
“뭐가 안타까워?”
“탈린 왕국에서는 자작님을 성질 더러운 사람으로 생각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더 분노할 테고요. 그런 악순환이 반복될걸 생각하면…….”
파비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기사 아카데미 졸업생인 그는 이 문제가 해결하기 어려운 딜레마라고 생각했다.
탈린 왕국 기사들이나 엘리오 자작의 극적인 태도 변화가 있어야 풀릴 일인데, 그건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인 까닭이다.
***
크리소페디오에서 벌어졌던 일이 탈린 왕국 기사들 귀에 들어가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빅토르 케른 백작이 에스카토스 왕국의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맞았다’는 소문을 접한 탈린 왕국 귀족들은 원수인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에게 몰려갔다.
탈린 왕국군 부장군 롤프 에크만 백작이 귀족들을 대표해 말했다.
“에스카토스 왕국의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연합군의 규율을 어긴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가 상급자인 빅토르 케른 백작을 구타한 것에 대한 목격자가 수십 명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백작과 동행했던 한스 홀트 자작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연합군 기사들이 우리 탈린 왕국의 대처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간다면……. 탈린 왕국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묵묵히 듣던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이 롤프 에크만 백작과 그 뒤에 서 있는 귀족들에게 물었다.
“경들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 대해 아는가?”
귀족들이 머뭇거리자 롤프 에크만 백작이 다시 나섰다.
“그가 코드란테스 백작을 꺾었고, 글라체스 요새에서 몰록을 죽였다는 걸 말씀하시는 거라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소문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 일을 두고 연합군 내에서도 말들이 많습니다. 일각에서는 히르헤라 주둔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영웅이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소드마스터인 코드란테스 백작의 위상을 생각하면 그게 얼마나 근거 없는 추측인지 알 텐데.”
“하지만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이제 고작 이십 대 후반입니다. 그의 나이에 소드마스터를 꺾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그 불가능한 소문을 왜 에스카토스와 베일럼, 라미노프에서 퍼트리느냐 이 말이다.”
“히르헤라 주둔군의 사기를…….”
“허튼소리. 야인 출신 기사보다 코드란테스 백작이나, 에스카토스 공작을 영웅으로 만드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하지만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정말 그런 일을 했다면, 왜 에스카토스 왕국에서 그의 작위가 고작 자작이겠습니까?”
“…….”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백작의 말이 맞았다.
엄청난 소문에 비해 엘리오 라고아의 작위는 너무도 보잘것없었다.
고민하는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에게 대장군 발테르 스토미어 후작이 말했다.
“전하. 부장군의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세운 공과 작위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코드란테스 백작이 모종의 이유로 그에게 승리를 양보했을 수도 있습니다. 몰록을 죽였다는 것도 목격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대장군은 소문을 믿지 않는군.”
“이 자리에 참석하기 전 빅토르 케른 백작을 만났습니다. 검술이 아니라 체술에 당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믿을 수 없다?”
“이대로 덮는 것은 탈린 왕국 기사들의 사기에도 좋지 못합니다.”
“이 일을 정식으로 문제 삼으면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 탈린 왕국 중에 어느 한쪽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이미 탈린 왕국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기사들 앞에서 상급자를 폭행한 것에 대한 책임은 물어야 합니다.”
“흐음!”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봐도 연합군 기사들 앞에서 자작이 백작을 폭행한 것은 문제가 있었다.
고민하던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이 문득 대장군을 보았다.
“그런데 나는 아직 이번 일의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한다. 두 사람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주둔지에 크리소페디오라는 술집 겸 여관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케른 백작이 여자 바르도스를 희롱했던 모양입니다. 그걸 본 에스카토스 왕국 기사들이 욕을 하면서 시비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고작 바르도스를 희롱한 일로 자작이 백작을 때렸다는 것인가?”
“연합군 기사들이 우리 탈린 왕국의 대처를 주목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두 사람의 다툼에서 이제는 탈린 왕국의 위상이 걸린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대책은?”
“에스카토스 왕국에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처벌을 요구하거나, 케른 백작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결투를 신청해야겠지요.”
“에스카토스 왕국이 처벌에 동의해 줄 것 같지는 않고, 결투라……. 케른 백작을 대신해 싸울 대전사가 있는가?”
탈린 왕국에도 소드마스터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 중 케른 백작의 대전사가 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 어울릴 상대라면 하나 있습니다.”
“있다고? 케른 백작을 대신하려면 소드마스터 정도는 돼야 할 텐데?”
“마침 용병왕 크리스 두나미스의 용병대가 탈린 왕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크리스 두나미스는 대외적으로 코드란테스 백작보다 강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는 과분한 상대이지요.”
“하지만 그는 베르나르도 후작의 지인이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사람임을 잊었나.”
“예, 하지만 크리스 두나미스는 뼛속까지 용병입니다. 그에게 우리가 먼저 대전사를 의뢰하면,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의 결투를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일단 용병 계약이 성사되고 난 뒤에는 베르나르도 후작도 엎을 수 없습니다.”
“그럴듯하군. 우선 에스카토스 왕국군에 정식으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처분을 요구하고, 만일에 대비해 크리스 두나미스와의 계약을 진행하도록.”
“알겠습니다.”
우르르 몰려갔던 귀족들이 만족한 얼굴로 돌아섰다.
***
다음 날 아침.
탈린 왕국의 참모장 로랜드 베넌트 자작이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를 찾았다.
에스카토스 왕국군 부장군 콜린 스트롱 백작과 독대한 그는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의 말을 전했다.
“이틀 전 크리소페디오에서 귀국의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본국 기사단장인 빅토르 케른 백작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께서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행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요구하셨습니다.”
콜린 스트롱 백작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그 일은 유감이오만……. 케른 백작도 잘한 일은 아니라고 들었소. 게다가 양측이 결투의 절차를 밟았으니 하극상이라고 보기도 어렵소. 결투에서 누가 직위를 따진단 말이오?”
“지금 탈린 왕국군 원수님의 정식 요청을 거절한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맞습니까?”
“거절이 아니라, 애초에 죄가 성립되지 않음을 알아주십사 하는 말이오.”
콜린 스트롱 백작은 최대한 정중하게 응대했다.
탈린 왕국은 에스카토스 왕국이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닌 까닭이다.
그러자 로랜드 베넌트 자작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부장군님. 다른 건 다 차치하고 백작이 자작에게 맞았습니다. 이는 우리 귀족들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닙니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게 여러모로 볼 때 옳습니다. 아닙니까?”
“다 맞는 말이오. 나라고 왜 그걸 모르겠소. 하지만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안 되오. 그는 예외적인 인간이오. 히르헤라 주둔지에서 그를 뭐라고 불렀는지 아시오?”
“뭐라고 부릅니까?”
“언터처블. 그는 아직 남작일 때 병사들 앞에서 푸토코아 백작을 두드려 팼소. 그 일로 코드란테스 백작이 그와 결투를 벌였지만, 그도 패했소. 우리라고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마냥 좋기만 하겠소? 어찌할 수 없으니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오. 그는 말 그대로 언터처블이오. 귀국도 가급적 그와 얽히지 않는 게 좋을 게요.”
콜린 스트롱 백작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행히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얌전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균열이고 뭐고 귀족들이 죄다 히르헤라에서 빠져나갔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