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92
1092회. 으쌰으쌰 할 일이 있어?
‘언터처블’이라는 말에 탈린 왕국 참모장 로랜드 베넌트 자작은 반신반의한 눈으로 콜린 스트롱 백작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기막힌 소리건만 백작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설마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는 겁니까?”
“사실이냐고요? 무슨 소리를 들었든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십시오.”
“…….”
로랜드 베넌트 자작이 확인하듯 되물었다.
“과장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겁니까?”
“겪어 보면 알겠지만 라고아 자작과의 다툼은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콜린 스트롱 백작이 로랜드 베넌트 자작을 빤히 보았다.
해 줄 이야기는 다 했다.
그래도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물고 늘어지겠다면 어쩔 수 없다.
자기 눈으로 확인을 해야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머뭇거리던 로랜드 베넌트 자작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유감이군요. 에스카토스 왕국군이 우리 탈린 왕국군 원수의 공식 요청을 거부하다니……. 부장군님의 말씀을 에스카토스 왕국군의 공식 입장으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순간 콜린 스트롱 백작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역시나 틀린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참모장이 누굴 만나도 같은 대답을 듣게 될 겁니다.”
“이번 결정은 탈린 왕국과 에스카토스 왕국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겁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 대해 알게 되면, 양국의 우의는 이전보다 더욱 돈독해질 것입니다.”
콜린 스트롱 백작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로랜드 베넌트 자작을 보았다.
원수처럼 지내던 라미노프 왕국도 에스카토스 왕국의 눈치만 살살 보고 있는데 악영향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
실제로 에스카토스와 라미노프 왕국의 관계는 역사 이래 가장 좋았다. 전적으로 라미노프 왕국이 양보를 한 때문이다.
그쯤 되자 로랜드 베넌트 자작은 살짝 불쾌한 감정마저 들었다.
부장군이 탈린 왕국군 원수의 정식 요청을 거절하고서 하는 말이 이전보다 더 좋은 관계를 가지게 될 거라니?
그건 탈린 왕국을 호구로 보고 있다는 소리였다.
“방금 그 말씀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을 책임지라는 겁니까?”
“부장군께서 우리 원수님의 공식 요청을 거절하고서, 양국의 우의가 더욱 돈독해질 거라고 하신 말씀 말입니다.”
“아, 그거라면 얼마든지 책임지리다. 대장군인 베르나르도 후작 각하를 만나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겁니다.”
참다못한 로랜드 베넌트 자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제게 하신 말씀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협박이다.
그러나 콜린 스트롱 백작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아무쪼록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모멸감에 이를 갈며 콜린 스트롱 백작을 노려보던 로랜드 베넌트 자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
히르헤라 탈린 왕국군 주둔지.
참모장 로랜드 베넌트 자작은 곧바로 대장군을 찾아가 에스카토스 왕국군 부장군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했다.
“……콜린 스트롱 백작은 원수님의 공식 요청을 거절하며, 오히려 두 왕국의 우의가 더욱 돈독해질 것이라는 망언까지 했습니다.”
“정말 그런 소리를 했다고?”
“예, 공작님께 그 말을 전하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했습니다.”
“미치겠군. 고작 백작 따위가 뭘 믿고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지?”
울리크 룬드그렌 공작은 소드마스터다.
전장에서 마주치면 공작을 쳐다보지도 못할 사람이 그런 망발이라니?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는 대장군 발테르 스토미어 후작에게 로랜드 베넌트 자작이 말했다.
“이는 에스카토스 왕국이 우리 탈린 왕국을 얕잡아 봐서 생긴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북부 최강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지 않습니까.”
발테르 스토미어 후작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탈린 왕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북부 최강 왕국이다.
하지만 에스카토스 왕국은 자국의 소드마스터들을 믿고 그 분명한 격차를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에스카토스 왕국이 그렇게 나오는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에스카토스 왕국의 전력은 탈린 왕국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카토스 왕국은 북방의 마수들을 막는 데 왕국군의 절반 가까운 숫자를 투입해야 한다.
그들과 달리 북부 중앙에 위치한 탈린 왕국은 전력의 누수가 없어 에스카토스 왕국보다 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발발하면 에스카토스 왕국은 마수를 막던 부대를 후방으로 돌릴 테지만, 그때는 결과에 상관없이 망하게 될 것이다.
에스카토스 왕국 전역이 마수에 짓밟히게 될 테니까.
그런 이유로 에스카토스 왕국처럼 최북방의 왕국들은 상대적으로 후방에 위치한 왕국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곡물 공급을 안정적으로 받기 위한 것도 있지만 전쟁이 터지면 무조건 자신들의 손해인 까닭이다.
“지금 비취호수를 에스카토스 왕국이 점거하고 있지?”
“그렇습니다.”
“경이 라미노프의 참모장을 만나라.”
“라미노프를 지원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직은 아니니 슬쩍 언질만 주는 선에서 끝내라. 유사시 탈린 왕국은 라미노프 왕국의 편에 서겠다고. 실제로 어떻게 할지는 원수님이 결정하겠지만, 원수님 생각도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라미노프 왕국으로 에스카토스 왕국을 압박해 보기로 했다.
‘자신들의 위치를 알면 지금과 같은 헛소리도 하지 못할 테지.’
히르헤라에서 고생했다고 떠받들어 주니 자신들이 북부 최강인 줄 아는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확답은 주지 말고 에스카토스 왕국이 조바심을 내게 냄새만 피워라.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면 그때 원수님에게 보고를 올릴 테니까.”
“예!”
대장군에게 특명을 하달받은 참모장 로랜드 베넌트 자작의 눈이 빛났다.
잠시 후 참모장이 나가자 대장군 발테르 스토미어 후작은 한쪽에 걸린 북부 지도 앞으로 다가갔다.
용병왕 크리스 두나미스가 엘리오 라고아 자작 개인을 노린 것이라면, 라미노프 왕국과의 은밀한 교류는 에스카토스 왕국을 괴롭히기 위함이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 그리고 에스카토스 왕국…….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 여우가 왕 노릇을 너무 오래 했어.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북부의 주인은 에스카토스가 아니라 우리 탈린 왕국이니까.”
***
군사도시로 급성장한 히르헤라에 변화가 찾아왔다.
북부의 왕국들이 점점 커지는 균열에 성벽을 쌓기로 결의하고, 앞다퉈 기술자들을 보내기 시작한 때문이다.
군사도시던 히르헤라는 군산복합 도시로 빠르게 변해 갔다.
기술자, 노동자, 노예 들로 도시가 북적거렸다.
술집과 여관밖에 없던 도시 곳곳에 대장간과 상점 들이 들어섰다.
균열 감시 부대에도 변화가 생겼다.
과거 한 개 중대밖에 투입하지 않던 것을 이제는 두 개 중대를 투입했다.
성곽 공사를 하는 기술자와 인부, 노예 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균열 감시 임무를 끝낸 파비안은 저녁 무렵 불사조 기사단을 찾아갔다.
“부단장님.”
“어, 오늘 내려왔냐?”
“예. 기념으로 외식이나 나가시죠.”
“기념할 게 뭐가 있다고?”
말하면서 엘리오는 주섬주섬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제가 균열 감시를 무사히 마치고 왔잖습니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제가 자타가 공인하는 자작님의 오른팔 아닙니까? 오른팔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왔으면 축하해 주셔야죠.”
“그래서, 또 크리소페디오에 가자고?”
“왜요? 벌써 맥주에 질리셨습니까?”
“그럴 리가. 가자.”
엘리오가 성큼성큼 막사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를 걷던 파비안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이젠 거리에 사람들이 있네요? 진짜 놀랍지 않습니까?”
“뭐가?”
“없던 사람들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바글거리지 않습니까! 보기만 해도 신기하지 않습니까?”
“신기하긴 개뿔. 성곽 쌓는다고 북부에서 기술자며, 일꾼이며, 노예 들을 막 끌어모았잖아.”
“제 말은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이 추운 히르헤라에 사람들이 바글거리니 신기하다 이겁니다.”
“왕국에서 돈 준다고 사람들 불러 모아서 그런 게 왜 신기해?”
그러자 파비안이 답답한 듯 제 가슴을 때렸다.
“아! 자작님은 감성이 메말라도 너무 메마르셨습니다.”
“너는 안 말라서 그렇게 술집 타령만 하고?”
“인생 뭐 있습니까? 소소한 행복을 찾아 누려야죠.”
“그러시든지. 참, 균열 주변은 좀 어때? 마수와 마물이 슬슬 나올 때가 됐지 않았어?”
“그렇지 않아도 그 말씀 드리려고 했습니다. 하루에 대여섯 마리쯤 출몰합니다. 처음 경험하는 왕국군의 피해가 막심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나 탈린 왕국 같은 곳에서 곡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탈린 왕국은 군사력이 좀 된다고 들었는데?”
“되면 뭐합니까?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데. 사방이 북부 왕국들로 에워싸여서 마물을 여기서 처음 봤답니다.”
“그럼 피해를 좀 봤겠네.”
“처음 베일럼 왕국이 왔을 때만큼 피해를 입은 것 같더라고요.”
“그래도 곧 적응되겠지. 베일럼과 라미노프 왕국 봐. 조용하잖아.”
“라미노프 왕국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요즘 이상한 소문이 있습니다.”
“이상한 소문?”
엘리오가 관심을 보이자 파비안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크리소페디오에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서요.”
“그러든가.”
엘리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소페디오.
초저녁인데 술집은 빈자리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손님들로 붐볐다.
내부를 둘러보던 파비안이 혀를 내둘렀다.
“와아! 뭐 이리 사람이 많죠? 돈을 아주 갈고리로 긁어모으겠습니다.”
“그러게. 장사 잘되네.”
엘리오가 질린 눈으로 손님들을 둘러보았다.
손님들은 기사가 반, 일반인이 반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일반인들은 귀족이든지, 아니면 돈 많은 상단 관계자리라.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돌아선 두 사람에게 주인이 허겁지겁 달려갔다.
“어서 오십시오. 다른 일을 하느라 오신 걸 이제 봤습니다.”
헛걸음했다고 생각한 파비안이 주인에게 툴툴거렸다.
“보면 뭐해요? 빈자리가 없는데. 다음에 올게요.”
“아닙니다. 안쪽에 귀빈을 위한 방이 있습니다.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본래 술집의 방은 대귀족들이나 사용했다.
주인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그 방을 내주겠다는 것이었다.
뜻밖의 제안에 파비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빈방이 있어요?”
“예, 그런데 방은 음식값이 두 배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두 배라는 말에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눈치를 살폈다.
엘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안과 두 번 올 걸 한 번으로 줄이면 되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엘리오가 허락하자 주인은 서둘러 두 사람을 귀빈실로 모셨다.
방으로 들어가자 외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파비안이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약간 조심스러운 이야기라서 조용한 장소가 필요했는데.”
“뭔데?”
“탈린 왕국과 라미노프 왕국이 은밀히 손을 잡았다고 합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처음 듣는 얘기야. 그런데 새삼 손잡을 일이 있어?”
엘리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히르헤라에 모인 여덟 개 왕국이 이미 하나의 연합군을 만들었는데, 손을 잡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있죠. 왕국에게 균열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무슨 소리야?”
“균열과 왕국의 운영은 별개라는 소립니다. 균열은 함께 막지만, 자기들 왕국의 이익을 위해 따로 으쌰으쌰 하겠다는 거죠.”
“으쌰으쌰 할 일이 있어?”
“라미노프 왕국과 우리 에스카토스 왕국이 비취호수를 두고 오랫동안 싸우지 않았습니까. 현재 비취호수를 점령하고 있는 건 우리 에스카토스 왕국인데요. 탈린 왕국에서 라미노프 왕국을 지원하면……. 비취호수를 눈 뜨고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균열에 힘을 모아도 시원치 않은데 그런 일로 싸운다고?”
엘리오가 황당한 눈으로 파비안을 보았다.
인간의 욕심이 크다는 건 알지만 멸망을 앞두고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