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93
1093회. 내 칼이 어디를 향할지 알겠지?
기막혀 하는 엘리오에게 파비안이 애매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그게 좀 이상합니다.”
“뭐가?”
“탈린 왕국은 지금까지 에스카토스나 라미노프 왕국의 분쟁에 끼어든 적이 없거든요. 에스카토스나 라미노프 왕국이 탈린 왕국의 곡물을 사 가고 있으니까 어느 한쪽 편들기가 애매했던 거죠.”
“그럼 다른 일로 그러는 거 아냐? 소문이 잘못 났을 수도 있잖아.”
“탈린과 라미노프 왕국이 손을 잡은 건 확실합니다. 요즘 탈린과 라미노프 왕국 기사들이 자주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서 비취호수 얘기도 솔솔 흘러나오고 있고요.”
“말이야 뭐든 못 하겠어. 그래서 뭐가 문젠데?”
엘리오가 시큰둥한 얼굴로 파비안을 보았다.
“공교롭지 않습니까?”
“뭐가?”
“뜬금없이 탈린 왕국이 라미노프와 손을 잡는가 하면, 비취호수 얘기가 나오고 있는 거 말입니다.”
“왜? 그러면 안 돼?”
엘리오가 파비안을 빤히 보았다.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
잠시 멍하니 엘리오를 보던 파비안이 뭔가 깨달은 얼굴로 말했다.
“아! 부단장님 눈에는 세상일이 하찮아 보이겠지요? 미천한 제가 잠시 부단장님을 평범한 인간의 기준에 두고 생각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헛소리하지 말고. 본론을 말해.”
타박을 들었지만 파비안은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호랑이다.
호랑이가 토끼들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얼마 전에 부단장님이 탈린 왕국 기사단장을 두드려 팼잖습니까. 아무래도 그 보복으로 탈린 왕국에서 수작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면 되지. 왜 비취호수를 건드린대?”
“그러게요. 왜 갑자기 에스카토스 왕국을 건드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단장님이 두려워서 그러는 거라면 오히려 조용히 덮었을 텐데……. 도대체 뭘 노리고 그러는 걸까요?”
“탈린 왕국도 비취호수에 욕심내는 거 아냐? 라미노프 왕국과 나눠 먹기로 했다든가 하는 식으로…….”
“라미노프가요? 에이, 그럴 거였으면 에스카토스 왕국에 먼저 분할하자고 제안했을 겁니다.”
“그건 또 그렇네. 아무렴 어때. 까부는 건 자유잖아. 일만 벌이지 말라고 해. 뛰어다니는 것도 귀찮으니까.”
“그런데 위에서는 별 이야기가 없습니까? 부단장님 때문이라면 슬슬 말이 나올 때도 됐는데…….”
“설마 나를 비취호수로 보내지는 않겠지?”
“그럴 리가요. 부단장님은 히르헤라를 지키셔야죠. 대귀족들도 머리가 있다면 그렇게까지는 안 할 겁니다.”
“탈린 왕국 때문에 보직이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은근 기분 나쁘네?”
“에이, 안 바뀐다니까요. 대귀족들도 부단장님을 곁에 두고 싶어 할 겁니다. 마족이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그래도 엘리오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사람이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나. 왜 잘 지내고 있는 사람을 툭툭 건드리지?”
“부단장님.”
“왜?”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부단장님은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으실 수 있는데, 미풍만 불어도 격하게 흔들리신다고. 그냥, 흘려보내십시오.”
“봐주라고?”
“예, 대귀족들이 알아서 잘 처리할 겁니다. 균열에 비하면 비취호수는 아무것도 아니잖습니까.”
“그 아무것도 아닌 거에 왜 나를 엮냐 이거지.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엘리오는 자기가 한 말에 슬슬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놀란 파비안이 서둘러 그를 진정시켰다.
“부단장님. 그냥 소문이 그렇다는 겁니다. 대귀족들이 별말 없는 걸 보면 헛소문인 것 같습니다.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쇼.”
“케른 백작의 일로 그러는 거면 다 부숴 버릴 거야.”
“누, 누굴요?”
“누군 누구야. 탈린 왕국이지.”
“부단장님, 탈린 왕국은 건드리면 안 됩니다. 진짜 큰일 납니다.”
“왜?”
“북부에 유통되는 곡물의 삼십 퍼센트 정도가 탈린 왕국에서 나온 겁니다. 탈린 왕국이 곡물을 안 팔면……. 에스카토스 왕국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할 수 있습니다.”
“가만 보면 너도 참 헛똑똑이다.”
“예? 왜요?”
“잘 봐. 곡물을 안 팔아. 그럼 난 뭐 구경만 하고 있겠냐?”
“어쩌시게요?”
“뭘 어째? 팔겠다는 사람으로 왕을 바꿔 줘야지.”
“헉! 부단장님이, 탈린 왕국의 왕을 바꾼다고요?”
“어. 대귀족들을 싹다 죽이는 것보다 그게 더 빠르고 쉽잖아.”
“그게, 저어, 탈린 왕국의 소드마스터들이 가만히 구경만 하겠습니까?”
“내가 소드마스터랑 싸워 봤잖아. 별거 없더라고. 몰록보다 약해. 나 몰록도 죽인 사람이야.”
“부단장님, 마음은 알겠는데 참으십시오. 왕은 건드리는 거 아닙니다.”
“풋! 너도 웃긴다. 왕이라고 뭐 별다를 것 같아? 벗겨 놓고 보면 그놈이 그놈이야. 사람은 다 비슷하다고.”
“왕을 건드리면…… 대귀족들이 벌 떼처럼 들고일어납니다. 그래서 어쩌다 왕을 포로로 잡아도 돈만 받고 풀어 줍니다.”
그때 점원들이 방 안으로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탁자 위에 차려지는 음식을 물끄러미 보던 엘리오가 말했다.
“파비안. 너는 ‘한 사람의 생명의 무게’와 ‘백 명의 생명의 무게’ 중 어느 게 더 무겁다고 생각하냐?”
“그야 당연히 백 명이지요.”
“그게 네 어머니와 적국 병사 백 명의 목숨이라면. 그래도 백 명이 더 무겁냐?”
“아뇨. 당연히 제 어머니의 생명이…….”
파비안은 말끝을 흐렸다.
조금 전 자신이 당연히 백 명이라고 했던 게 떠올라서다.
문득 파비안은 하나와 백 명에 차이가 없음을 깨달았다.
“내 칼이 어디를 향할지 알겠지?”
“그래도 왕과 대귀족들은 좀…….”
“먹을 거 가지고 장난치는 놈은 다 죽인다. 그게 내 신조다.”
음식을 차리던 점원들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왕과 대귀족들을 죽인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먹을 거 가지고 장난치는 놈은 다 죽인다’고 했으니 반란 모의는 아닌 것 같고, 이게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음식을 진열한 점원들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파비안은 그들이 신경 쓰였지만 이내 털어 냈다.
엘리오의 질문에 답을 한 게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맥주 잔을 집어 든 파비안이 슬쩍 물었다.
“이상한 소문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소문내라고 한 소리야.”
“탈린 왕국 들으라고요?”
“뭐, 귀가 있으면 듣겠지. 아니면 말고. 머리 쓰는 일은 딱 질색이야. 누님과 함께 다닐 때는 참 좋았는데.”
“부인께서 똑똑하셨나 봅니다?”
“우리 누님 아직 안 죽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우주에서 가장 똑똑한 여자다. 신들만큼이나 지혜롭고.”
“에이, 신은 너무했습니다. 신을 만나 본 적은 없지 않습니까?”
“신이라 불리는 존재를 만나 봤거든?”
“정말요?”
파비안이 반신반의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았다.
그가 대단한 것은 알고 있지만 신적 존재와 만났다니 놀라웠다.
“내가 다소 과장이나 축소는 하지만 거짓말은 안 한다.”
“신적인 존재를 만났다니 부럽습니다.”
“부러워할 거 없다. 그중에 몇은 내 손에 작살이 났으니까.”
“아, 예. 어련하실라고요.”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허풍으로 치부했다.
과장이나 축소는 한다더니 바로 써먹을 줄이야.
맥주를 절반쯤 비웠을까?
낯익은 여점원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에리카 양의 공연이 곧 시작됩니다. 바깥에 자리를 만들어 두었는데, 나와서 들으시겠습니까?”
파비안이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빈자리가 없어서 방으로 왔는데 자리를 만들었다고?”
“마스터께서 귀빈실의 손님들이 에리카 양과 각별한 사이니 자리를 만들어 두라고 하셔서요. 탁자 하나를 비워 두었습니다.”
“어이쿠! 이거 미안해서라도 나가서 봐야겠네요? 부단장님, 나가시죠?”
파비안은 빨리 나가고 싶은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엘리오는 어차피 무료하던 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두 사람은 주인이 마련해 두었다는 ―무대에서 상당히 가까운―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이 멀뚱멀뚱 빈 무대를 보고 있을 때다.
점원들이 부지런히 새 맥주와 안주를 탁자로 가져왔다.
파비안이 술을 가져온 점원에게 물었다.
“이거 뭐지? 우리 더 안시켰는데?”
“아, 이건 저희 마스터께서 단골 손님들에게 대접하시는 겁니다.”
“아, 그래? 이렇게 고마울 데가.”
좋아서 실실 웃고 있는 파비안에게 엘리오가 말했다.
“단골이란다. 너 대체 얼마나 여길 들락거린 거냐?”
“기수와 소대장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술값이 비싸서 돌아가며 한두 사람씩. 원래 중대장은 그러는 겁니다. 부단장님이 그런 부분에서는 좀 심했습니다. 지금도 소위들이 부단장님을 소금이라고 합니다.”
“그 소금 덕분에 목숨이 붙어 있는 걸 감사하라고 해.”
“그야 물론이죠.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는 동안 에리카가 무대 위에 나와 연주할 준비를 했다.
곧이어 부드러운 하프 소리와 에리카의 노래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에리카가 노래하는 사이사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쳐다보았지만, 엘리오는 한 번도 알은체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파비안이 지나치듯 한마디 했다.
“에리카 양이 계속 보는데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 주시죠?”
“한 번 더 그런 소리 하면 여기에 발 끊는다.”
“아, 예.”
파비안은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참았다.
다른 건 몰라도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말한 건 꼭 지켰기 때문이다.
에리카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번갈아 보던 파비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자들이 목석 같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 주위에 들끓는 이유를 모르겠다.
“세상 참 불공평해.”
무심코 내뱉은 파비안의 말을 듣고 엘리오가 고개를 돌렸다.
“그걸 이제 알았냐?”
파비안은 자기가 왜 그랬는지 설명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말 잘못 꺼냈다가는 바로 세라의 안부를 물어 올 것 같아서다.
***
히르헤라 에스카토스 왕국군 주둔지.
중앙 지휘 통제 막사.
거대한 장방형 탁자 끝부분에 네 사람이 마주 앉았다.
왕국군 원수 에스카토스 공작과 대장군 베르나르도 후작, 부장군 콜린 스트롱 백작, 그리고 참모장 메토 로베르트 자작이다.
참모장이 보고를 이어 갔다.
“……라미노프 왕국의 부장군 블러드 미르 백작을 만났습니다. 미르 백작은 히르헤라에 나도는 소문이 사실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탈린 왕국의 참모장이 그런 제안을 한 적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자고 약속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라미노프와 탈린 왕국이 연합을 하지 않았다는 건가?”
“예, 심지어 미르 백작은 라미노프에서는 그 누구도 비취호수를 거론한 적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백작은 우리 에스카토스 왕국에 맞설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참모장의 말에 에스카토스 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라미노프와 탈린 왕국이 연합해서 비취호수를 되찾는다는 이야기가 히르헤라에 파다한데……. 라미노프는 비취호수를 거론한 적조차 없다고?”
“미르 백작의 태도로 보아 라미노프가 비취호수를 포기한 건 분명해 보입니다.”
부장군 콜린 스트롱 백작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탈린 왕국이 불안을 조성하려고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볼 때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처벌 요구를 거절한 뒤에 벌어진 일들이라…….”
참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참모진들도 같은 생각입니다. 탈린 왕국은 라미노프 왕국이 저렇게 적극적으로 해명에 나선 줄 모를 겁니다. 소문의 진원지는 아무래도 탈린 왕국 같습니다.”
그때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불사조 기사단장 엘런 파레스 백작이 막사로 들어왔다.
공작에게 군례를 올린 그는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뭔가를 전하고 돌아갔다.
의아한 얼굴로 보는 에스카토스 공작에게 베르나르도 후작이 말했다.
“조금 전 탈린 왕국의 레이지 기사단 단장인 빅토르 케른 백작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결투를 신청했답니다. 그런데 백작의 대전사가 용병왕 크리스 두나미스라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