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90
1090회. 네가 낭만이 뭔지 알아?
에리카와 여점원이 사라지자 엘리오는 파비안에게 물었다.
“기사는 늘 도망가? 그것도 자랑이라고 노래로 불러 달래?”
“부단장님이 노랫말을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제목에 이미 다 나왔는데 뭘 몰라? 늘 도망친다며? 너는 기사면서 그런 부끄러운 노래를 듣고 싶냐? 하여간 특이하다니까.”
그러자 파비안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적 앞에서 도망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도망이 잘못된 거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목숨이 위험하면 도망칠 수도 있지. 그런데 늘 도망가는 건 좀 아니지 않냐? 그래도 기사라는 사람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이거 참 뭐라고 설명을 못 하겠네요.”
“설명하지 마. 듣고 싶지도 않다.”
엘리오와 파비안이 노래를 두고 옥신각신할 때 에리카가 무대 위에 나타났다.
비파를 무릎 위에 세운 그녀는 노래에 앞서 엘리오와 파비안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파비안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에리카 양이 저를 보며 웃는 거 보셨습니까?”
“이쪽을 보며 웃는 건 봤다.”
“저에게 보내는 미소입니다. 귀족도 평민도 아닌, 라무스들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거든요. 외로움과 허전함, 서글픔, 처량함 등등……. 이건 정말 라무스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영혼의 울림입니다. 두 사람의 영혼이 공명을 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 너 잘났다. 그래서 세라 양과는 끝낼 거야?”
“영혼의 공명과 사랑은 결이 조금 다릅니다. 이건 굉장히 정신적인 관계거든요.”
“세라 양 앞에서 똑같은 소리 할 수 있으면 인정해 줄게. 할 수 있겠어?”
“하면 안 되죠.”
“에라! 이 도둑놈아.”
엘리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때 에리카의 노래가 시작됐다.
두 개의 달이 파랗게 물든 그 밤에 당신은 말했죠.
너만이 나의 운명이라고.
철없던 나는 그 말을 믿었고 내 모든 걸 다 주었어요.
하지만 꿀처럼 달콤한 미래는 오지 않았어요.
사랑한다면서 왜 도망치듯 나를 떠나려 하나요?
기사는 늘 도망간다고 하더니 당신도 그런 건가요?
흐느끼는 듯한 에리카의 미성이 술집을 가득 채웠다.
호소력 짙은 그녀의 목소리에 왕국 연합 기사들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말했다.
“저런 도망인 줄은 몰랐네.”
“예, 그래서 들어 보시라고 한 겁니다.”
“여자를 두고 도망치는 기사가 그렇게 많냐? 기사는 늘 도망간다고 할 정도로?”
“열이면 일곱은 그런다고 봐야죠?”
“와아. 바람둥이들이네.”
“꼭 바람둥이라서가 아니라 검술에 전념하거나, 자유기사로 떠돌다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착하면 되잖아?”
“영주가 고용을 해 줘야지 말이죠.”
“왜? 영주도 기사가 필요할 텐데.”
“매년 쏟아져 나오는 기사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흘러 들어온 기사를 다 고용하면 영지가 망할 겁니다.”
“그건 또 그렇네.”
“뭐, 그러다 보니 기사가 꿀벌처럼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게 된 거죠.”
“듣고 보니 가슴 아픈 기사의 현실을 노래한 거네?”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인정.”
엘리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람둥이 기사를 주제로 한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설명을 들으니 애잔하다.
뒤이어 에리카는 남녀의 운명 같은 만남을 노래했다.
그녀가 부른 다른 노래들처럼 꽤나 서정적이었지만 엘리오는 ‘기사는 늘 도망가’ 때보다 별로인 눈치였다.
뚱한 엘리오의 표정을 보던 파비안이 슬쩍 물었다.
“왜요? 노래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가사가 영 남의 얘기 같아서 별로다.”
“왜요? 왕실 연회에서 남녀가 운명처럼 만난 게 어때서요? 그건 세대를 불문하고 기사와 숙녀의 로망입니다.”
“나는 그렇게 안 만났거든.”
“아, 예에. 그러시겠죠. 그럼 깊은 산중의 폭포 아래에서 만나기라도 하셨습니까? 아니면 호랑이나 곰 굴 앞에서라든지.”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서 처음 만났어. 그리고 같이 개구멍으로 나갔지.”
“개구멍요?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여섯 살.”
“부인을 여섯 살 때 만나셨다고요? 태중혼약이라도 하셨던 겁니까?”
“그건 아냐. 아버지 의형의 딸이었어. 큰아버지 가족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만난 거야.”
남궁연을 떠올리던 엘리오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고개를 끄덕이던 파비안이 말했다.
“저는 그런 심심한 일상보다 왕실 연회에서의 만남이 더 좋습니다. 현실에는 환상적인 만남이 없어서 별롭니다. 개구멍이 뭡니까, 개구멍이. 꿈이라도 낭만적으로 꿔야죠.”
“네가 낭만이 뭔지 알아?”
“당연히 알죠. 그걸 모르는 건 부단장님 아닙니까?”
“나?”
엘리오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예, 부인과 처음 만나셨을 때 어떠셨습니까? 개구멍 같은 얘기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보십쇼.”
“누님에게 귀싸대기를 맞았지.”
“예? 무슨 잘못을 하셨길래요?”
“몰라. 세게 한 방 맞았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어.”
“와우. 정말 상상이 안 되는 만남이네요. 존경합니다.”
“그렇지? 누님과 나의 만남은 처음부터 강렬했다고. 심심할 틈이 없었어.”
“솔직히 부단장님의 낭만에 대해서 더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전투적인 낭만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두 사람이 낭만에 대해 옥신각신할 때 노래를 마친 에리카가 두 사람 자리로 와서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그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귀 기울여 듣다가, 대화가 끊길 즈음이면 모두가 한 번쯤 생각했음 직한 질문을 던져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던 세 사람에게 여점원이 다가왔다.
“저어, 죄송한데 문 닫을 시간이 됐습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세 사람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비안이 우물쭈물하는 에리카에게 물었다.
“에리카 양은 숙소가 어딥니까?”
“이곳 이 층에 방을 얻어 두었어요. 한 달 정도 머무를 예정이에요. 물론 계속 있을 수도 있고요.”
“아, 일 때문에 계시는 건가요?”
“네, 한 달 동안 노래를 부르기로 했거든요.”
“그럼 한 달 동안은 에리카 양의 노래를 실컷 들을 수 있겠네요.”
“후훗! 자릿값이 비싸니 무리하지는 마세요.”
“아닙니다. 술도 맛있고, 안주도 어지간한 요릿집보다 낫습니다. 중대장 월급이 부단장님에 비하면 박봉이지만 자주 들르겠습니다.”
그러자 에리카가 웃으며 말했다.
“가격이 비싸니까 혼자 오지는 마시고, 자작님과 함께 오세요.”
“아! 물론 그래야지요. 그런 의미에서 부단장님, 오늘 계산은 부단장님이 하시는 걸로 할까요?”
파비안의 말에 엘리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 훗날 자신을 따라다니며 개고생할 파비안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 정도 지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파비안, 내가 아무에게나 안 사 주는 거 알지?”
“예,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중대장으로 계실 때도 ‘에너지 볼’ 하나 그냥 나눠 주신 적이 없잖습니까.”
“알면 됐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두말하면 잔소리죠.”
두 사람의 대화를 구경하던 에리카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작과 남작의 대화치고는 격이 없는 게 너무 신기했다.
엘리오와 파비안은 에리카에게 작별을 고하고 밖으로 나갔다.
북부 특유의 한기가 실린 바람이 얼굴로 몰아쳐 오자 파비안이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춥냐?”
“예, 따뜻한데 있다가 나오니까 더 추운 것 같습니다. 부단장님은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 추위에 떨어서야 되겠냐. 마나를 더 갈고닦아야겠다.”
“춥다고 했지 떨지는 않았습니다.”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과장을 지적했다.
사실 마나 유저라면 모를까?
소드 비기너에게 이 정도 추위는 ―아주 잠깐 동안은― 견딜 만했기 때문이다.
“뭘 입술이 퍼렇구만.”
“바깥이 따뜻하지는 않잖습니까.”
파비안은 지기 싫어서 꼬박꼬박 말대꾸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위를 둘러보던 엘리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아! 진짜 발전했네. 한 달 만에 이게 가능한 일이냐?”
“석조 건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돈을 쏟아부으면 가능합니다.”
“돈이 좋네. 설원 위에 건축물이 콩나물 자라듯 쑥쑥 올라오고.”
“그런데 제가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뭐?”
“석조 건축물을 올리려면 바닥부터 평평하게 다져야 하잖습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평평한 바닥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눈을 좀 걷어 내면 땅이 움푹움푹 꺼져 있답니다. 마력 포탄이 떨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 예전에 전쟁터였나?”
“누가 이런 곳까지 와서 전쟁을 합니까? 글라체스 요새도 쓸 일이 없어서 폐쇄했던 거라던데.”
“…….”
엘리오는 그것이 메테오 스웜에 의한 것임을 밝히지 않았다.
‘여기에 메테오 스웜이 떨어졌었다는 걸 알아도…… 도시가 만들어졌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간혹 불나방처럼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 때가 있으니까.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대 전쟁의 흔적이 아닐까 하고요.”
“고대 전쟁?”
“대륙의 역사는 짧지 않습니까? 그 이전에 이곳에 누가 살았었는지도 모르고요. 우리 선조가 정착하기 전에 엄청 발전한 문명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히르헤라의 구덩이는 그때의 흔적인 거죠.”
“그렇게 오래된 거라면 눈 밑이 아니라 땅속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아, 그건 또 그렇네요. 그럼 눈 밑의 구덩이들은 다 뭐죠? 주둔지 주변에서 평평한 땅을 찾는 게 어려울 정도라고 하던데.”
“옛날에 이곳에서 몰래 마력포 실험이라도 했었나 보지.”
“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마력포 실험장이라면 말이 됩니다. 그래서 주둔지 주변에 크고 작은 구덩이들이 생겼다. 이게 제일 그럴듯한데요?”
“혹은 메테오 스웜이 떨어졌을 수도 있고.”
“에이, 그건 아니죠.”
“왜?”
“대륙에는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없습니다. 제국의 자랑이라는 코르보 마법병단의 마법사들을 만나 보셨지 않습니까?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이 7서클인데, 메테오 스웜은 9서클 마법입니다.”
“흑마법의 도움을 받는다면?”
“7서클을 이끌어 주려면 8서클 이상이 되어야 하는데, 그 정도 경지에 이른 흑마법사가 없습니다. 흑마법사라면 발견되는 족족 죽여 버리니까요.”
“메테오 스웜은 절대 아니다?”
“당연하죠. 그게 메테오 스웜의 흔적이었다면 벌써 북부 왕국이 발칵 뒤집혔을 겁니다. 이런 곳에 주둔지를 허가하지도 않았을 테고요.”
“주둔지 위치를 북부 왕국들이 선택할 상황은 아니잖아. 히르헤라 최북단에 균열이 생겼는데 한참 아래인 글라체스 요새로 모일 수도 없고.”
“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할 말이 없네요. 그런데 왜 메테오 스웜인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설마, 히르헤라에 메테오 스웜이 떨어졌었던 건 아니죠?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쇼. 안 그러면 진짜 큰일 납니다.”
“큰일 날 건 또 뭔데?”
“한 번 일어난 게 두 번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죠? 그냥 해 본 말이죠?”
파비안의 재촉에 엘리오는 말을 돌렸다.
“어때? 이제 안 춥지?”
“안 춥냐고요? 오싹합니다. 추위를 잊게 하려고 그러신 거라면, 실패하셨습니다. 아주 오싹오싹합니다.”
“식은땀은 안 나고?”
“예, 안 납니다. 그런 거로는 장난하지 마십쇼.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쯧쯧! 겁은 많아 가지고.”
“그런 얘기 듣고 겁먹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죠. 참! 그런데, 탈린 왕국의 빅토르 케른 백작 말입니다. 나중에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
“자작님이 기사들 앞에서 코피가 터지도록 백작의 귀싸대기를 날리지 않았습니까? 탈린 왕국 귀족들이 알면 가만히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