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89
1089회. 특별히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세요?
북부 중심에 있는 탈린 왕국은 자타가 인정하는 ‘북부의 최강 국가’다.
그 기반이 된 것은 식량.
척박한 주변 왕국들과 달리 탈린 왕국은 비옥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탈린 왕국을 제외한 북부 왕국들은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다.
북부에 유통되는 식량의 30% 정도가 탈린 왕국산이고, 50%는 제국, 20%는 남부 왕국에서 사들인 것이라고 보면 얼추 맞는다.
북부 최강 왕국답게 탈린 왕국 기사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그런 탈린 왕국의 ―그것도 왕국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레이지 기사단 단장 빅토르 케른 백작이 병신 소리를 들었으니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엄격한 사람이 있다.
빅토르 케른 백작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도 사람인 만큼 술집에서 자신의 행동이 과했음은 알고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이라 여겼다.
백작이 술집에서 바르도스를 희롱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새파랗게 어린 기사 놈들이 최강 왕국의 기사단장을 조롱한 것은 중죄다.
자리에서 일어난 빅토르 케른 백작과 한스 홀트 자작이 젊은 기사들의 자리로 다가갔다.
8개 왕국과 제국군 1개 사단 병력이 모인 주둔지인 만큼 아직 엘리오와 파비안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빅토르 케른 백작이 젊은 기사들의 자리에 멈춰섰다.
먹이를 보는 눈으로 두 청년을 내려다보던 빅토르 케른 백작이 말했다.
“나는 탈린 왕국의 기사인 빅토르 케른 백작이다. 복장을 보니 에스카토스 왕국의 기사들 같군. 맞나?”
남작에 불과한 파비안이 딴청을 부리자 마지못해 엘리오가 나섰다.
“그런데요?”
“얼굴들을 보니 고작해야 남작 같은데, 왕국 연합군 지휘관들에게 즉결 처분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그런 게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상급자를 모욕한 죄가 즉결 처분감이라는 것도 알고 있겠군?”
엘리오가 눈을 끔뻑이자 부단장인 한스 홀트 자작이 버럭 소리쳤다.
“이놈들! 백작님이 말씀하시는데 앉아 있다니! 죽고 싶으냐!”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파비안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래도 엘리오는 술잔을 홀짝거릴 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부단장이 또 뭐라 하려 하자 빅토르 케른 백작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제법 기개가 있군. 계급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건가? 그건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겠지? 이거 재밌군. ‘폭풍의 기사’라고 불리는 나에게 도전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사양하지 않겠다. 네가 승리한다면 즉결 처분은 없던 것으로 해 주겠다. 어떠냐? 도전해 보겠느냐?”
그러자 엘리오가 뚱한 얼굴로 답했다.
“나이를 먹으면 힘이 입으로 간다더니,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네. 즉결 처분은 뭐고, 도전은 또 뭐래? 백작님, 쉽게 갑시다.”
빅토르 케른 백작이 계속 말하라는 듯 손짓을 해 보였다.
“즉결 처분과 도전, 둘 다 마음에 안 들어. 그냥 내가 백작님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거로 하자고. 백작님 하는 짓이 영 눈에 거슬려서 못 봐 주겠거든? 어때? 쫄리면 그냥 가셔도 되고.”
순간 빅토르 케른 백작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즉결 처분, 도전, 결투 신청, 그 모두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였다.
그것은 저 애송이 기사가 자신과 검을 맞대야 끝난다는 것이다.
‘즉결 처분보다는 결투가 깔끔하겠군.’
아무리 자신이 상급자라 해도 즉결 처분으로 다른 왕국의 남작을 죽이는 것은 께름칙했다.
하지만 결투는 다르다.
작위와 왕국을 떠나 결투의 결과에는 누구도 시비를 걸지 못한다.
“좋다. 받아들이겠다. 에스카토스에 고작 바르도스를 위해 목숨까지 거는 기사가 있을 줄은 몰랐군. 내 소개는 이미 했고, 나에게 결투를 신청한 너는 누구냐?”
엘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파비안이 나섰다.
“제가 대신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분은 슬래시 랜드의 영주이시며, 균열의 기사, 히르헤라의 수호자로 불리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님이십니다.”
“…….”
한순간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히르헤라의 균열과 마족의 침공은 한 영웅을 탄생시켰는데 그가 바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었다.
뜻밖의 이름 앞에 빅토르 케론 백작은 한순간 멍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는 눈앞의 기사를 찬찬히 살폈다.
소드마스터 특유의 강한 기세와는 거리가 먼 눈빛과 얼굴이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젊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런 애송이일 줄이야!
‘소문이 지나치게 과장됐군.’
그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세 왕국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으로 여겼다.
‘에스카토스 공작도 있는데 왜 이런 애송이를 띄워 줬지?’
젊은 기사들의 사기를 위해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너무했다.
이런 어린놈이 소드마스터를 꺾고 마족 군주의 목까지 베었다니 개가 웃을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빅토르 케른 백작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경이 소문의 그 라고아 자작이라니 놀랍군. 나는 소문을 그다지 믿는 편이 아니라서 말이야. 경을 이기면 내가 히르헤라의 수호자로 등극하는 건가? 후훗!”
그러자 엘리오가 그를 빤히 보며 말했다.
“우리 고향에 ‘때지 않은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는 말이 있어요.”
“미안하지만 우리 탈린 왕국 귀족가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 모두 파이어 스톤을 쓰기 때문이지. 이곳에 모인 기사들이 결투의 증인이다. 어디에서 하겠느냐?”
“나가기도 귀찮은데 여기서 하죠.”
“이곳에서?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기물이 파손되면 패자가 물어 주기로 하지. 동의하나?”
“자의식이 과하네요. 장담하는데 기물이 파손되기 전에 끝날 거예요.”
“대단한 자신감이군. 너의 검술 실력이 소문처럼 대단하다 해도 그러기는 쉽지 않을 텐데. 에스카토스 왕국을 생각해 죽이지는 않겠다.”
말과 함께 빅토르 케른 백작은 뒤로 물러나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의 맞은편에 엘리오가 섰지만 그는 굳이 천둔검을 뽑지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빅토르 케른 백작이 말했다.
“어떻게든 결투를 피하고 싶은 모양인데, 이미 늦었다. 네가 검을 뽑든 말든 결투는 시작됐다.”
“시작됐다고 했으니 딴소리하기 없기.”
한순간 엘리오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퍽!’ 하고 사라졌다.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빅토르 케른 백작 앞에 나타난 엘리오가 손바닥으로 백작의 뺨을 후려쳤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백작의 머리가 한쪽으로 홱 돌아갔다.
엘리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빅토르 케른 백작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자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손바닥이 날아왔다.
철썩!
백작의 머리가 속절없이 돌아갔다.
미처 백작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엘리오는 무려 다섯 번이나 귀싸대기를 날렸다.
백작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조금의 대응도 하지 못하고 맞기만 했다.
다섯 대를 때린 엘리오가 처음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백작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코에서 흘러나온 핏물로 백작의 가슴이 시뻘겋게 물들어 갔다.
뒤늦게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빅토르 케른 백작이 앞으로 달려 나가려 할 때다.
또다시 유령처럼 그의 앞에 나타난 엘리오가 다시 한번 귀싸대기를 갈겨 댔다.
철썩! 철썩! 철썩!
이번에는 빅토르 케른 백작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듯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그의 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느 틈에 엘리오가 손가락으로 빅토르 케른 백작의 검 손잡이 밑단, 퍼멀(pommel)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오가 바람처럼 뒤로 물러났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체술에 놀란 빅토르 케른 백작은 감히 발을 떼지 못했다.
양쪽 콧구멍에서 뜨거운 액체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그는 닦지 않았다.
두 차례 얻어맞은 뒤에야 비로소 상대의 존재감이 눈에 들어왔다.
굳어 있는 그를 향해 엘리오가 말했다.
“백작님, 더 해 볼 테야? 아니면 패배를 인정할래?”
반말이지만 빅토르 케른 백작은 오히려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패배를 인정하겠소.”
“그럼 사과해.”
“경에게 실례를 범했소. 용서해 주시오.”
자존심을 내다 버린 빅토르 케른 백작은 망설이지 않고 시키는 대로 따랐다.
“바르도스에게도. 에리카 양이 백작의 시녀는 아니잖아.”
순간 빅토르 케른 백작이 멈칫했다.
백작이 일개 바르도스에게 사과를 하라니?
그건 탈린 왕국 귀족들의 체면에 똥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망설이는 그의 귓가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 하면 결투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으로 생각할 거야. 이번에는 주먹으로 해 줄게. 이빨이 다 털리면 앞으로 고기 먹기는 어려울걸?”
엘리오가 시장통의 건달들처럼 주먹으로 제 손바닥을 ‘쩍쩍!’ 때렸다.
그 천박한 도발에 빅토르 케른 백작은 눈물을 머금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에리카를 향해 소리쳤다.
“에리카 양, 나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에리카가 우아하게 한 손을 옆으로 벌리며 살짝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빅토르 케른 백작이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엘리오가 그만 가라는 듯 손을 까딱이자, 급히 돌아선 빅토르 케른 백작과 한스 홀트 자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엘리오와 파비안이 자리에 앉자 에리카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무슨. 같은 남자로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남자가 모두 그 백작 같지는 않으니까 남자들에게 실망하지는 마세요.”
“당연하죠. 자작님 같은 신사분도 많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에리카를 힐끔거리던 파비안이 끼어들었다.
“남작 중에도 신사가 많습니다.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자작님과 함께 ‘균열의 기사’로 불리는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입니다.”
“아, 네. 루퍼스 중대의 중대장님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는 에리카…… 노블이에요. 이젠 귀족의 성만 남아 있는 라무스죠.”
“아하! 이런 인연이 있나! 저도 얼마 전까지 귀족 성씨만 쓰던 라무스였습니다. 최근 남작 작위를 받으면서 진정한 귀족이 됐습니다만.”
“어머, 그러셨군요. 정말 반가워요.”
라무스로 차별 아닌 차별을 받으며 살았던 에리카의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모든 평민이 신분 상승을 꿈꾸지만 라무스는 특별히 더했다.
처음부터 가져 보지 못한 자보다, 가졌다가 잃어버린 자의 욕망이 더 큰 까닭이다.
자연스럽게 합석을 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에리카에게 여점원이 다가와 귀엣말로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에리카가 엘리오와 파비안에게 말했다.
“벌써 다시 노래를 불러야 할 시간이 됐네요. 특별히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세요?”
순간 파비안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기사는 늘 도망가’로 부탁합니다. 부단장님은요? 뭐 없습니까?”
에리카가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에게 물었지만 사실 그녀의 질문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향한 것이었다.
그의 검술이 뛰어나서도, 그가 자작이어서도 아니다.
그녀는 위기의 순간 자신을 구해 준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푹 빠진 상태였다.
엘리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아는 노래가 있어야지. 에리카 양의 노래는 다 마음에 드니 아무거나 불러 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자리 떠나지 말고 끝까지 꼭 들어 주세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에리카는 그녀를 부르러온 여점원과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