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
11회. 오봉산(五峰山)의 새 식구
남궁세가의 손님들이 와룡장을 방문할 즈음.
연적하는 한참 남쪽의 오봉산에서 헤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오봉산에서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라고 해야 맞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에게 무공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던가! 지금 그의 처지에 딱 맞는 말이었다. 무공이 구슬이라면 그는 그걸 활용해 먹고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의 상태는 여러 모로 좋지 않았다.
한여름에 개방의 고수에게 얻은 바가지는 매우 불결했다.
그런 바가지에 살짝 쉰 음식을 담아 먹으면서 돌아다니다가 배탈이 나고 말았다. 며칠째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뒤로 내보내는 게 더 많았다.
급기야 진이 빠져서 이젠 누가 지나가다 툭 스치기만 해도 쓰러질 정도였다.
장사치 무리를 따라 오봉산을 지나던 그는 얼마 못 가 체력이 바닥나고 말았다. 하지만 갈 길 바쁜 상인들은 어린 거지가 뒤를 따라오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뒤처져 걷던 연적하는 설상가상 길마저 잃고 말았다.
‘큰일 났네…….’
와룡장에서 달아나던 처음과 달리 지금은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중이라 급할 건 없다. 그런데 막상 주위가 어둑어둑해지자 덜컥 겁이 났다.
가진 게 깨진 바가지 하나뿐이라 산적은 무섭지 않다.
지금 그가 두려워하는 건 산짐승이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판에 늑대나 들개 떼라도 만난다면 잡아먹히고 말 테니까.
기진맥진한 연적하는 일단 눈에 띄는 바위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뱀이 다니는 풀숲보다 바위에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너무 힘이 드니 그냥 창고에 있을걸 하는 후회도 든다.
커다란 바위에 기대어 앉아 쉬던 연적하는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더러운 가죽 신발이 연적하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그러나 기력을 상실한 그는 가늘게 숨만 쉴 뿐 눈도 뜨지 못했다.
가죽 신발이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야 씨발. 시체야? 아니야? 아침 댓바람부터 재수 옴 붙겠네.”
뒤에서 구경하던 텁석부리 장한이 키득거렸다.
“크큭! 형님! 우리 막둥이가 밥 짓고 빨래하는 거 지겹다고 하던데, 가지고 가 볼까요?”
“숨넘어가게 생긴 놈을 주워 가자고?”
“죽고 사는 건 그 녀석 팔자고요. 우리는 공덕이나 쌓자 이겁니다. 혹시 압니까? 그 덕에 우리 앞날이 피게 될지.”
“어휴! 그놈의 자식. 절 밥 좀 먹었다고 또 공덕 타령하고 있네.”
“조금이 아닙니다요. 이래 봬도 제가 사미계(沙彌戒)까지 받은 몸이라니까요.”
“염불 하나 못 외우는 놈이 중 타령은.”
“우리 스승님께서 ‘나무아미타불’만 잘하면 된다고 했습니다요.”
수하와 농짓거리를 하던 가죽 신발이 연적하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중심을 잃은 연적하의 상체가 한쪽으로 스르륵 넘어갔다.
가죽 신발이 뒤로 펄쩍 뛰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이쿠! 씨벌! 벌써 뒤졌나 보다. 딱 보니 굶어 죽은 애새끼 같은데.”
“정말요?”
텁석부리가 어기적거리며 다가갔다.
그는 연적하의 코에 손등을 대 보더니 가죽 신발, 두목 풍연초를 힐끔 돌아보았다.
“안 죽었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풍연초가 턱밑에 난 수염을 배배 꼬며 물었다.
“우리 식구가 몇이지?”
“여섯요.”
“숟가락 하나 더 얹는다고 쫄딱 망하지는 않겠지?”
“이놈 허리에 매달린 바가지를 보니까 빌어먹던 놈 같습니다. 눈치껏 먹을 겁니다.”
“쩝! 데려가자. 살다 살다 우리보다 못한 새끼는 처음 본다.”
“잘 생각하셨슴다. 이런 게 다 공덕이라니까요.”
텁석부리 장한, 부두목 탁고명이 ‘영차’ 하고 힘쓰는 소리와 함께 연적하를 어깨에 둘러맸다.
***
연적하의 눈이 먼 하늘로 향했다.
구름을 타고 날아가던 구천현녀가 뒤를 돌아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선녀님?”
순간 괄괄한 음성이 들려왔다.
“선녀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오늘부터 여섯째를 따라다니며 산채 일을 배워. 알겠냐?”
연적하가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두목인 풍연초가 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이를 잡고 있었다.
구천현녀를 본 건 꿈이었던 모양이다.
“어쭈? 대답 안 하지?”
“……예.”
한 박자 늦은 대답에 풍연초가 인상을 찌푸렸다.
“느려, 느려. 그래 가지고 언제 한 사람 몫을 하겠어?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연적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지난 사흘간 산채의 도적들은 툴툴거리면서도 자신을 돌봐 주었다. 저들이 아니었으면 벌써 산짐승에게 잡아먹혀 똥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함께 살겠냐?’고 물었을 때 고민하지 않았다.
“인마, 너도 우리 식구가 되기로 했으면 열심히 움직여야 돼. 빌어먹던 버릇 때문에 게으름 부리면 안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풍연초는 은근 그게 신경 쓰였다.
빌어먹던 놈들은 놀고먹는 게 버릇이 돼서 일을 잘 하지 않으려 한다. 잡일을 시키려고 겨우 살려 놓은 저 놈이 그러면 정말 미쳐 버릴 것이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연적하를 훑어 보던 풍연초는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와 봐.”
“예.”
연적하는 풍연초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산채는 오봉산 중턱의 은밀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풍연초는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가 우뚝 섰다.
“막내야, 이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뺏는 사람과 뺏기는 사람. 너는 어느 쪽이 되고 싶으냐?”
“……뺏는 사람요.”
우두커니 서 있던 연적하의 눈에 결기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자신은 빼앗기기만 했다. 계모와 배다른 형제들의 핍박, 그리고 좁고 냄새나는 창고…….
“그래, 그런 마음가짐이면 너는 훌륭한 산적이 될 수 있다.”
풍연초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영 매가리가 없어서 고민했는데 저 정도면 쓸 만할 것 같다.
이윽고 풍연초는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저기 왼쪽 첫 번째 봉우리부터 요 앞 다섯 번째 봉우리까지가 우리 땅이야. 굉장히 넓지?”
“예.”
“이 넓은 땅을 지키려면 형님들 모두가 똥줄 빠지게 뛰어다녀야 돼. 네 위로 여섯 형님들이 전부 바깥일을 해야 한다 이거야. 너는 몸이 부실하니 집안일이라도 열심히 해야겠지?”
“예.”
“아, 그 새끼! 넌 예, 예밖에 몰라 가슴에서 우러나는 말을 좀 하란 말이다.”
“예.”
“어이쿠! 씨벌. 앓느니 죽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던 풍연초가 연이어 말했다.
“하여튼 형님들이 일 나간 동안 네가 밥과 빨래 따위를 해야 해. 집안 일이 되어 있지 않으면 형님들도 바깥일을 할 수가 없어.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아뇨.”
“몰라?”
“예.”
풍연초가 연적하의 뒤통수를 딱 소리가 나게 때렸다.
“뭘 몰라 이 새끼야. 쫄쫄 굶는 거지. 우리가 골골거리고 다니면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비웃을 거다. 씨발! 너 병신 소리나 듣고, 무시당하면서 살고 싶어?”
“아닙니다!”
연적하의 음성에 처음으로 힘이 실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싫다. 정말 싫다. 매일 욕을 하던 계모와 배다른 형제들, 돌멩이를 던지던 아이들까지. 생각할수록 이가 갈린다.
독이 오른 연적하의 반응에 풍연초가 대견하다는 듯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새끼야. 그거야. 오봉산에서는 우리가 왕이야. 누구도 우리를 무시하면 안 돼. 그런 새끼들은 죄다 쳐 죽여야 돼. 따라 해. 우리가 최고다!”
“……우리가 최고다.”
아직 산적이 덜된 연적하의 음성은 옆에서도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때 풍연초가 두 팔을 벌리고 미친놈처럼 포효했다.
“씨발! 우리가 최고다아아아!”
“…….”
순간 연적하는 태어나 처음으로 전율을 느꼈다.
지금까지 단단하게 다져져 있던 가슴속의 뭔가에 금이 쩍쩍 가는 것 같았다. 뒤이어 정수리부터 발뒤꿈치까지 한 줄기 벼락이 관통했다.
아!
자신이 오봉산의 일부가 되는 충만한 느낌이랄까?
산채의 일원으로 새로운 삶을 활활 불사르고 싶은 열망이 생겨났다.
마음이 일자 단전에 잠들어 있던 구천기가 명치로 치고 올라왔다.
연적하는 두목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소리 질렀다.
“씨발! 우리가 최고다아아아아!”
운무(雲霧)가 쫙 갈라졌지만 마침 먹먹해진 귀를 후비고 있던 풍연초는 보지 못했다.
‘헐! 비쩍 곯은 놈이 목소리 하나는 일품일세.’
화전민으로 살다가 호미 대신 박도를 잡은 풍연초는 내공을 모른다. 그저 산 아래서 주워 온 거지의 목소리가 우렁우렁한 게 신기할 뿐이다.
***
유랑 걸식하던 연적하는 오봉산에 자리를 잡고 눌러앉았다. 어차피 도덕을 글로 배워서 산적이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다.
정파의 무가에서 개처럼 키워졌는데, 죽어 가는 그를 살린 건 산적이다. 그러다 보니 옳고 그름의 경계도 자연히 허물어졌다.
처음 몇 달간 연적하는 여섯째 형님이 하던 잡일을 도맡아 했다.
그편이 서로에게 더 좋았다.
산적들은 잡일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연적하에게는 아직 남의 몸에 칼질할 독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채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똑같았다.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산채를 나간 형님들은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돌아왔다.
투박한 박도 하나만 들고 나간 형님들의 손에는 등짐이나 돈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노상 그렇게 운이 좋은 건 아니다.
형님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날도 부지기수다.
그래도 일곱 명이 소소하게 음주가무를 즐기며 살 정도의 벌이는 충분했다.
뜨거운 여름도 가도 선선한 가을이 찾아왔다.
가출한 연적하가 오봉산에 들어온 지도 어언 석 달.
애늙은이처럼 과묵하기만 하던 연적하의 입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부엌일도 손에 익어 한 식경(약 삼십 분)이면 충분할 정도.
빠르게 저녁 준비를 마친 연적하는 언제나처럼 뒷마당에서 검술을 연마했다.
쉬이익. 쉬익.
비록 대충 다듬은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바람 가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구천기의 기운이 담긴 막대기는 쇠뭉치처럼 묵직해 보인다.
연적하는 내려치고 베는 동작을 수백 번이나 반복했다.
그런 뒤 몸이 조금 풀린 듯하자 이번에는 ‘구천세법’과 ‘구천구검’을 빠르게 펼쳤다.
휘리리링.
마당에 떨어져 있던 낙엽들이 연적하의 몸으로 빨려 들어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몸은 휘감아 도는 낙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낙엽 속에서 은은한 빛이 번득였다.
잠시 후 그가 구천구검의 마지막 초식인 능운소요(凌雲逍遙, 구름에 올라 노닐다)를 펼쳤다.
연적하가 허공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몸 주위를 회전하던 낙엽이 마치 구름처럼 발밑에 깔렸다.
한순간 그의 몸이 낙엽을 밟고 허공에 우뚝 섰다.
구천현녀경에 잠깐 나타났던,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선녀처럼 말이다.
그의 몸이 막 하늘로 솟구치려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낙엽이 흩어지며 연적하의 몸은 지면에 처박혔다.
쿠당탕.
대자로 누운 그의 몸 위로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크크크큭!”
연적하는 낙엽을 뒤집어쓴 자신의 꼴이 우스워서 한참이나 키득거렸다.
선녀 흉내를 내는 게 아직은 무리인 것 같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구천여일진경의 가르침대로 호흡을 조절했다.
들끓던 구천기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연적하는 형님들이 돌아올 때까지 쉬지 않고 구천여일진경을 연공했다.
언젠가는 구천현녀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갈 날이 올 게다. 천진난만한 상상이지만 아직은 그 정도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