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08
1108회. 마나 프트라스의 특별한 축복
‘차라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파비안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이제 곧 균열이 사라지겠네요?”
“그건 차라트를 제거해 봐야 알 수 있다 하더라고. 균열이 메꿔지는지, 아니면 더 이상 커지지 않는지.”
“저는 원상태로 복구가 된다고 봅니다. 그래야 이치에 맞습니다.”
엘리오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천 년간 빙벽이 저런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그럴 것 같았다.
“그런데 차라트를 찾아 제거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야. 뭐, 성곽을 쌓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왜요? 균열을 중심으로 수백 개 정도 뿌렸다면서요? 어디에 몇 개가 있는지 아는데 뭐가 어렵다고요?”
“히르헤라에 하루가 멀다 하고 눈보라가 치잖아. 메테오 스웜 자국도 눈에 묻혀 사라졌는데, 설원에서 뼛조각 수백 개를 찾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아! 그건 그렇네요. 그래도 성곽을 쌓는 거보다는 훨씬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곽은 진짜 답이 없는 일이잖습니까.”
“당연히 성곽 쌓는 것보다는 수월하지. 하지만 작업량이 두 배로 늘어나서 일꾼들 만으로는 안 될 거야. 어쩌면 병사들까지 뼛조각 발굴에 동원될지도 몰라.”
“자작님 말씀을 들으니까 빨리 제대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거봐.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내가 나만 좋자고 너를 데리고 가는 게 아니라니까. 주둔지에서 추위에 떨면서 뼛조각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나를 따라다니는 게 훨씬 낫지.”
“그렇네요.”
파비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거처럼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는 거라면 모를까?
중대원들과 뼛조각 찾으러 다닌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피로가 몰려왔다.
***
다음 날.
엘리오는 베르나르도 후작의 막사에서 마나 프트라스의 신관과 만났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나서서 양측의 소개를 했다.
“엘리오 경, 이분은 마나 프트라스의 고위 신관인 안나 라마크리슈 님이시오. 안나 라마크리슈 님, 이쪽이 말씀드린 엘리오 라고아 자작입니다.”
소개를 마친 베르나르도 후작이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나 라마크리슈는 기이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았다.
젊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앳되게 생겼을 줄이야.
대귀족들이 흑마법이나 마족과 관계된 게 아닌지 의심할 법도 하다.
삼십 대인 자신도 예외적인 경우인데 상대는 자신이 봐도 너무했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고위 신관’ 소리를 들었음에도 멀뚱 멀뚱 보고만 있자 안나 라마크리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후작님은 고위 신관이라고 하셨지만 사실 저는 마나 프트라스의 대리자인 사도(使徒)예요.”
사도라는 말에 베르나르도 후작이 흠칫 놀랐다.
사도는 대신관이나 고위 신관보다 더 대단한 존재인 까닭이다.
대신관과 고위 신관이 성직자이면서 동시에 교단의 행정가인 반면, 사도는 죽을 때까지 오직 마나 프트라스의 뜻만 좇는다.
단지 그것만으로 사도가 경외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기사든 마법사든, 그가 마나 유저라면 사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사도의 저주를 받으면 마나 프트라스의 가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엘리오도 마나에 대한 공부를 했던 만큼 사도가 뭘 뜻하는지 알았다.
‘그런데 뭘 어쩌라고?’
영기 수련자인 자신에게는 고위 신관이건 사도건 별 상관이 없었다.
“아, 그러시구나. 그렇게 말하자면 저는 샤스트라 파라크티(구천현녀의 진신)의 대리인이에요. 반가워요.”
안나 라마크리슈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대리인을 아직 만나 본 적이 없어서다.
“정말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의 대리인이세요?”
“속고만 사셨나. 정말이지 그럼 거짓말을 하겠어요? 난 거짓말은 안 해요.”
“아아! 죄송해요. 믿지 못해 그런 게 아니라,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의 대리인을 처음 만나서 그랬어요.”
안나 라마크리슈는 사과를 하고서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생각해 보니 사도라는 신분을 드러낸 뒤에 처음 해 보는 사과였다.
‘영기 수련자라서 나를 어려워하지 않는구나.’
하기야 마나와 관련이 없다면 자신을 어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안나 라마크리슈는 찬찬히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살폈다.
그러면서 에스카토스 공작의 의뢰를 떠올렸다.
그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나이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영기를 지니고 있다면서, 그게 흑마법이나 마족과 관계가 된 것인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어디 보자. 일단 눈빛은 맑고…….’
흑마법사의 눈빛은 탁하고, 마족에게는 피의 기운이 서려 있다.
눈만 봐서는 흑마법이나 마족과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고 있는 게 뭔지는 직접 확인해 봐야만 알 수 있다.
그녀는 막사 안에 신성력을 슬쩍 풀어놓았다.
마나 프트라스의 기운은 마력과 상극이라 흑마법사나 마족이라면 바로 발작을 일으킨다.
뚱한 얼굴로 앉아 있던 엘리오가 문득 말했다.
“신관님, 향수를 좋은 걸 쓰나 봐요? 냄새가 은은한 게 좋네요.”
안나 라마크리슈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자신이 내보낸 신성력을 향수의 냄새라고 하는 걸 보니 마력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러다 그녀는 이상함을 느꼈다.
‘향수라고?’
당연한 말이지만 신성력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흑마법사들의 마력에서 악취 같은 게 느껴지지만 그것도 실제 악취가 아니다. 불쾌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악취로 표현할 뿐이다.
그런데 분명히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냄새’라고 했다.
역사 이래 신성력을 냄새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눈을 돌렸다.
“후작님도 향수 냄새가 느껴지시나요?”
“아니요.”
베르나르도 후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신관에게서 체향은 맡을 수 있었지만 그걸 향수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고개를 갸웃하던 안나 라마크리슈는 신성력을 대거 방출했다.
만에 하나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수작을 부렸다면 신성력으로 박살 낼 생각이었다.
싸아아아―.
신성력이 가득 차오르자 청량한 소리가 들려왔다.
농밀한 마나에 마나 유저인 베르나르도 후작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무아지경이라도 들 얼굴이다.
안나 라마크리슈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코를 킁킁거리던 엘리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이건 혹시 마나의 냄새인가요? 좋네, 좋아.”
기분이 좋아진 엘리오는 무심결에 구천기를 일주천시켰다.
막사에 가득하던 농밀한 신성력이 엘리오에게 빨려 들어갔다.
마나 프트라스의 신성력은 이내 구천기로 화해 그의 몸에 축적됐다.
신성력이 모두 사라지자 안나 라마크리슈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자작님, 지금 신성력을 흡수하신 거예요?”
“아, 죄송해요. 저하고 너무 잘 맞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제 영기와 신관님의 신성력이 이렇게 잘 맞을 줄 몰랐습니다.”
“아니, 이건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신성력하고 자작님의 영기가 잘 맞는다고요?”
“예, 집 나갔던 애들이 돌아온 것처럼 잘 섞이는데요?”
“말도 안 돼. 아, 죄송. 제 신성력의 뿌리는 마나예요. 자작님은 영기 수련자시고요. 마나와 영기는 섞이지 않아야 정상이라고요.”
“제가 마나는 느낄 수가 없는데……. 신관님의 신성력은 느껴집니다. 보셨다시피 저와도 잘 맞고요. 신관님이 사도라서 그런가?”
“그게 무슨 관계가 있다고요?”
“제가 창조신의 영기를 흡수한 적이 있거든요. 잘 섞이는 건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요? 창조신이 마나 프트라스의 전신(前身)일 수도 있잖아요.”
“창조신이 마나 프트라스인데 그 둘을 다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아, 다른 차원의 창조신을 말한 거예요.”
“미치셨어요?”
“미치지 않았는데요?”
엘리오가 멀뚱멀뚱 여신관을 보았다.
만약 다른 여자가 저런 소리를 했다면 귀싸대를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이 어떻게 들릴지 알고 있었기에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돌연 안나 라마크리슈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마나 프트라스의 이름으로 명한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깃든 것이 있다면 모습을 드러내라. 인트라 루케툼!”
싸아아아―.
신성력이 다시 한번 물결쳤다.
그러나 둘 사이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계면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엘리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하세요?”
“뭘 했고요, 이제 결과를 말씀드릴게요. 자작님은 흑마법이나 마족과도 무관하십니다. 자작님의 영기가 마나 프트라스님의 일부인 것도 확인했고요. 그건 마나 프트라스께서 이 세계의 창조신이니까 당연하겠죠. 그러니 미쳤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어디 가서 다른 차원 운운하지 마세요.”
안나 라마크리슈는 진단 결과를 폭풍처럼 쏟아 냈다.
멍하니 듣던 엘리오는 ‘아무튼 일이 잘 끝나 다행이다’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신성력을 흡수하는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자작님처럼 마나를 압도하는 영기도요. 왜 그런 거라고 생각하세요?”
“말씀드렸잖아요. 창조신의 영기를 받아들였다고.”
곰곰 생각하던 안나 라마크리슈가 물었다.
“그 말은 혹시 이 세계에 깃든 영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창조신의 영기를 뜻하는 건가요?”
“네, 어쩌다 보니 창조신의 영기를 받게 됐어요.”
“…….”
한순간 안나 라마크리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창조신의 영기라니?
“혹시 마나 프트라스님과 직접 만난 적이 있어요?”
“전혀요. 그랬다면 제가 마나의 축복을 받았겠죠. 저는 운 좋게 창조신이 세상에 남겨 놓았던 영기를 만났던 것뿐이에요.”
“아…….”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그의 영기가 마나 유저보다 뛰어난 것도 수긍이 된다.
어찌 보면 그것도 마나 프트라스의 축복이었다.
“이제 보니 ‘마나 프트라스의 특별한 축복’을 받으셨군요. 모든 것이 히르헤라를 구원하기 위한 마나 프트라스님의 섭리입니다.”
안나 라마크리슈는 사도답게 한참 동안 마나 프트라스를 찬양했다.
엘리오는 지루했지만 꾹 참았다.
마나 프트라스의 사도에게 찍혀 봐야 자기 인생만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안나 라마크리슈와의 면담은 점심 시간 직전에야 끝이 났다.
안나 라마크리슈가 떠나자 베르나르도 후작이 웃으며 말했다.
“축하하오. 생각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왔구려.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가 경이 ‘마나 프트라스의 특별한 축복’을 받았다고 했으니, 앞으로 경의 검술 경지를 두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이제 누가 뭐라고 하면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의 이름을 대면 되나요?”
“그렇소. 사도의 권위는 절대적이라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게요.”
“그 정도예요?”
“사도의 말 한마디에 마나의 축복을 잃어버릴 수도 있소. 마법사든, 검사든, 마나 유저에게 사도의 말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소.”
“그럼 이제부터는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칼을 휘둘러도 되겠네요?”
“사도의 보증을 받았으니 작위를 올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게요. 경의 작위를 더 높이지 못한 것도 대귀족들이 경을 완전히 믿지 못해서였소. 그런데 사도가 마나 프트라스의 특별한 축복을 받았다고 했으니……. 왕국에 남아 있으면 공작의 작위도 가능할 게요.”
베르나르도는 ‘왕국에 남아 있으면’을 은근히 강조했다.
눈치 빠른 엘리오는 피식 웃었다.
그의 마음은 알지만, 히르헤라를 떠나면 다시 북부에 올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말씀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저와 파비안 남작의 제대는 어떻게 됐나요?”
“아, 그 부분은 아침에 참모에게 말해 두었소. 부단장의 자리는 당분간 비워 두겠지만, 루퍼스 중대는 오후에 새 중대장을 보내기로 했소.”
“잘됐네요. 점심 식사 후에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후작님.”
엘리오의 의미심장한 작별 인사에 베르나르도 후작이 화답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빌겠소. 경은 에스카토스 왕국과 북부의 자랑이자 긍지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