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7
117회. 떠나는 사람들
날이 밝자 정의맹 정주 지부의 세 청춘 남녀는 일찌감치 정주제일루로 향했다.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등에 커다란 짐 꾸러미를 짊어지고 있었다. 허리에 찬 도검이 아니었으면 보따리 상인으로 보일 정도다.
금검문의 유근식이 창인문의 진설하를 힐끔거리며 실실 웃었다.
“유 사형, 왜 그렇게 봐요?”
“어제 너 대단하더라. 그 무시무시한 연 소협을 아주 꽉 잡고 흔들던데?”
“어머! 아침부터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뭘 잡고 흔들었다고 그래요?”
진설하가 펄쩍 뛰자 설차수까지 한 마디 보탰다.
“없는 소리는 아니지.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니까. 그래도 녹림 총순찰인데, 너무 옆집 총각처럼 대하더라고. 하긴 지부장님 처음 온 날도 그랬으니까 일관성은 있다만. 그런 거 보면 연 소협 성격도 괜찮은 거 같아. 유 사제, 그렇지 않아?”
“예. 진 사매 주사 다 받아 줄 때 저는 그가 녹림인으로 안 보이더라고요. 소림사 고승인 줄 알았다니까.”
“어머, 설 사형까지 왜 그러세요. 그래도 제 덕분에 서로 많이 친해지지 않았어요? 사형들은 처음에 심 노선배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잖아요.”
설차수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 그건 네 덕분이다만 다음부터는 조금만 격식을 차렸으면 좋겠다. 알고 있겠지만 녹림은 말보다 칼을 앞세우는 사람들이라고.”
“아, 네에. 알아 모시겠습니다.”
진설하가 입술을 삐죽이자 유근식이 한마디 했다.
“진 사매, 그렇다고 너무 기죽지 마. 연 소협도 너에게 아주 관심이 없는 것 같지는 않더라. 혹시 알아? 녹림 총순찰과 잘될지? 사매 말대로 청춘 남녀가 오래 여행을 다니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라고.”
“어머, 유 사형이 보기에도 그랬어요? 정말 연 소협이 그래 보였어요?”
“왜? 너는 진짜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냐?”
“젊은 나이에 녹림 총순찰이라니 멋있잖아요. 마두들도 그의 말이라면 꼼짝 못 할 거 아니에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설차수가 혀를 찼다.
“쯧쯧! 철없는 것들. 지금이야 유명교 때문에 정의맹과 녹림이 협력하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 것 같으냐? 유명교라는 강적이 사라지면 그다음은 녹림이야. 정의맹의 여제자와 녹림의 총순찰이 뭘 해?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어머, 설 사형. 선입견을 버리세요. 안 될 건 뭐예요? 그렇죠? 유 사형?”
“그래, 난 사랑에는 정사파가 없다고 믿는다. 물론 그 전에 두 사람의 마음이 먼저 맞아야겠지만. 그런데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진 사매. 정말 연 소협에게 관심 있는 거야?”
“몇 번을 말해요. 멋있다니까요!”
“알았어. 나는 응원해 줄게. 여자라고는 진 사매밖에 없으니까 잘될 거야.”
세 사람은 부푼 꿈을 안고 정주제일루로 들어갔다.
칠 층에 올라간 순간 세 사람은 얼어붙듯 그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처음 보는 일 남 일 녀가 연적하와 심통을 상대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울상을 한 진설하가 중얼거렸다.
“설마, 아니겠지요?”
머뭇거리던 설차수와 유근식, 진설하가 천천히 다가갔다.
세 사람을 발견한 구천노도 심통이 ‘킬킬’거리며 소개를 했다.
“함께 갈 분들이시니 인사 올려라. 남궁천 공자님과 남궁연 소저시다.”
심통이 연적하와 파천마군 외에 정중하게 대하는 사람이 딱 둘 있는데 남궁천과 남궁연이다.
전과 다른 심통의 모습에 세 남녀는 살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차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천도문의 설차수라 합니다. 혹시 두 분은 청운검 대협과 화용독심 소저가 아니십니까?”
남궁천의 나이가 서른둘이라 대협이라 하기는 조금 이르다. 스물셋의 설차수는 그를 대하기가 어려워서 대협이라 칭한 것이었다.
남궁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만나서 반갑소. 정의맹 분들이라고 하시니 마음이 든든하구려.”
남궁세가 역시 정의맹에 속한 무가인지라 그들은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반갑습니다. 저는 금검문의 유근식이라 합니다. 두 분의 협명은 많이 들었습니다. 영광입니다.”
“저는 창인문의 진설하예요.”
“남궁천이오.”
남궁천이 두 사람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나누었다.
남궁연은 남궁천의 옆에서 고개만 까딱거릴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설차수와 유근식, 진설하는 인사를 마친 후 멀뚱멀뚱 서 있었다. 나이와 강호의 배분상 남궁천 앞에서 나댈 수가 없어서다.
심통과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난 뒤 남궁천이 세 남녀에게 말했다.
“내용은 다들 알고 있을 거요. 일정을 간단하게 말씀드리리다. 우리가 갈 곳은 세 곳의 산채와 두 곳의 수채요. 동선을 고려해서 순서를 정했소. 첫째는 산동성 태산 광풍채, 둘째는 남직례성 구화산 삼도산채, 셋째는 호광성 장강수채, 넷째는 호광성 동호수채,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가 하남성 대별산 대별산채요. 정주에서 출발해 오른편으로 한 바퀴 돈다고 생각하면 될 거요.”
멍하니 듣고 있던 진설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굉장히 먼 길이네요.”
“그래서 산채는 사두마차를 이용할 생각이오. 수채는 모두 장강에 있으니 배로 갈 생각이고. 긴 거리지만 생각보다 고되지는 않을 거요.”
“아. 마차와 배…….”
중얼거리던 진설하는 무심코 뱃놀이를 떠올렸다.
그러다 슬쩍 연적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마치 남의 일인 양 뒤로 물러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누가 보면 남궁천이 이번 일의 책임자라고 오해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진설하는 그런 무심함과 엉뚱한 여유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이어서 진설하는 남궁연을 힐끔 보았다.
의식하지 않으려 하는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그녀가 신경 쓰였다.
화용독심(花容讀心)이라고 하던가.
독심은 아직 모르겠지만, 화용이라는 말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있다.
의자에 새초롬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궁연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녀는 마치 미녀도를 찢고 나온 사람처럼 아름다웠다.
작은 얼굴에 균형 있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
하얀 피부에 앵두처럼 도톰한 입술과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까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
자신도 정주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미모를 가졌지만, 그녀와는 비교가 안 된다.
‘내 장점도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진설하는 뜬금없이 전투 의지를 활활 불살랐다.
정주제일루 앞으로 사두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그러자 기루 주인 장보옥이 직접 나와 마차 지붕에 육포와 건량을 잔뜩 실었다.
그간의 마음고생에도 시원섭섭해하는 얼굴을 보면 나름 정이 들었나 보다. 혹은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것에 대한 감사이든지 말이다.
연적하 일행이 내려온 것은 사시정(오전 10시)쯤이다.
사두마차지만 마차 내부는 일곱 명이 타기에 조금 좁아 보였다.
결국 나이에 밀려 설차수와 유근식이 교대로 마부 옆자리에 앉기로 했다.
유근식이 먼저 마부 옆자리로 올라갔다.
여섯 명이 차례로 마차에 타자 마부가 기다란 채찍을 가볍게 휘둘렀다.
“이려!”
덜커덩 덜컹.
사두마차가 천천히 길을 따라 성문으로 이동했다.
유명교를 상대로 녹림이 벌이는 싸움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었다.
***
이월 초.
정주.
삼장(백가장, 양가장, 와룡장)은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겨울을 나야 했다.
녹림 총채주 파천마군의 머리에서 나온 삼장불립은 삼장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다.
삼장의 제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삼장은 장악하고 있던 상권마저 다 빼앗겼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녹림과 사파는 상인들을 위협해 삼장과의 거래마저도 끊게 했다.
견디지 못한 삼장의 제자들은, 과거 와룡장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녹림은 끝까지 삼장 출신들을 물고 늘어졌다.
어쩔 수 없이 삼장 출신들은 과거를 숨기고 낭인으로 떠돌아야 했다.
가장 먼저 해체된 것은 와룡장이다.
연무백은 와룡장의 문을 닫고 백호대를 백가장으로 돌려보냈다.
어머니 백미주와 동생 연승백이 반대했지만 연무백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백미주는 백호대와 함께 백가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스스로 폐문을 결정한 연무백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정의맹 정주 지부로 들어갔다.
나름 알려진 무가의 가주가 일반 무사로 갔으니 백의종군이랄 수 있다.
승운검객 마천덕은 고수들을 모집하고 있던 터라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연무백은 정주 지부에 자리를 잡자 동생 연승백을 불렀다.
오갈 데 없던 연승백은 마지못해 정주 지부에 몸을 담았다.
사실 연무백의 선택은 옳았다.
오늘날 강호에서 삼장 출신을 받아 줄 만한 곳은 정의맹밖에 없었으니까.
일찌감치 포기한 와룡장과 달리 백가장과 양가장은 미련하리만치 끝까지 버텼다. 그러나 사파의 끊임없는 압박에 하루하루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백가장.
제자들이 다 떠난 백가장에는 백씨 일족만 남았다.
그들은 요즘 가주인 무천검 백승호가 모종의 결심을 해 주기만 바랐다.
어느 날.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백미주가 그런 가족들의 바람을 백승호에게 전했다.
“아빠, 어차피 정주에서는 더 이상 힘들어요. 차라리 다른 지역으로 가서…….”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승호가 버럭 소리 질렀다.
“닥치거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너 하나의 잘못으로 세 가문이 망했다! 네가 그놈에게 용서를 구하기만 했어도! 이런 일까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승호는 백미주를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외동딸이라 오냐오냐하며 키웠더니 결국 이런 사달을 일으켰다. 좀 더 엄하게 할걸 하는 생각도 들지만 때늦은 후회일 뿐이다.
“제가 머리를 숙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잊으셨어요? 그놈은 저뿐 아니라 아버지와 양가장주까지 무릎 꿇으라고 했어요.”
“나와 양가장주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럼 저는요? 도대체 저는 무슨 큰 죄를 저질렀는데요? 아버지가 쓰라고 데려온 몸종이 고아라기에 남들보다 더 잘해 줬어요! 그런데 친자매처럼 대했더니 그 보답으로 제 남편을 빼앗아 갔다고요! 그년을 들인 후로 그 사람이 저를 어떤 눈으로 봤는지 알아요?”
백미주가 눈을 부릅뜨고 백승호를 노려보았다.
그 비참한 기억을 떠올리니 칼이라도 물고 엎어져 죽고 싶었다.
“그런 내가 그년의 새끼를 잘 돌봐야 했나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죽였을 거예요! 그래도 명문의 체면 때문에 죽이지 못하고 가둔 거라고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목이라도 밟아 죽였을 텐데!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내가 잘못한 거예요. 그때 그놈을 죽였어야 했어요!”
“…….”
백승호는 장탄식과 함께 눈을 감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딸의 말을 들으니 마냥 탓하기도 어려웠다.
‘복수에 나선 연적하’와 ‘그때 죽였어야 했다’는 딸 모두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가주로써 딸의 잘못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도 없는 노릇.
눈을 뜬 백승호가 나직이 말했다.
“더는 선조의 위패를 볼 면목이 없구나. 백가장에서 나가라. 백가장이 얼마나 더 오래갈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 너를 위한 자리는 없다.”
“아빠…….”
백미주가 멍한 눈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남편에게는 배신당하고, 공들여 키운 자식들은 컸다고 다 떠났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의지하던 부모까지 자신을 내치니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다.
그날 오후, 백가장의 문을 열고 한 여자가 나왔다.
백미주였다.
한참 동안 문 앞에 서 있던 그녀는 북풍에 등이 떠밀려 비칠비칠 걸어갔다.
그녀가 가는 방향은 낙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