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6
116회. 세상 쉽게 살려고 하지 마
창인문의 이대제자 진설하는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인지 해맑은 외모만큼이나 행동에도 구김이 없었다.
평소에도 그녀는 초면의 어색함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런 그녀의 성격은 생애 처음 녹림도를 만난 자리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녀는 마치 정의맹의 사람에게 하듯 연적하를 대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그녀의 입에서는 스스럼없이 ‘연 소협’, ‘심 노선배’ 소리가 나왔다.
이어진 가벼운 술자리에서는 연적하의 어깨를 툭툭 치며 ‘깔깔’ 웃기도 했다.
그녀의 적극적인 활동에 힘입어 설차수와 유근식도 조금씩 말수를 늘려 나갔다.
술자리가 끝날 때쯤 두 사람은 처음의 어색함을 거의 떨쳐 낼 수 있었다.
“……그때 그 남자가 말하는 거예요. ‘당신과 천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당신이오.’ 꺄악! 어때요? 멋지지 않아요? 난 그런 남자가 좋더라.”
퍽.퍽.퍽.
반쯤 취한 그녀가 달아오른 얼굴로 연적하의 어깨와 등을 두들겼다.
연적하가 곤혹스러운 눈으로 설차수와 유근식을 보았다.
설차수가 황급히 진설하에게 신호를 보냈다.
“진 사매, 취한 것 같은데 이제 그만 가자. 응?”
설차수가 엉거주춤 일어났지만 진설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어머, 무슨 소리예요. 저는 몇 잔 마시지도 않았단 말이에요.”
진설하가 억울하다는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연적하가 그새 낙지처럼 팔에 달라 붙은 진설하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저어, 진 소저, 오늘은 이쯤에서 쉬지요? 내일 먼 길을 가야 하니까.”
연적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진설하를 거칠게 다루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한채연의 뻔뻔함과 하소백의 순수함이 느껴져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가 여자를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악의를 가졌거나, 자신과 별 관계가 없는 사람에 한해서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연적하라도 진설하처럼 격의 없이 다가와 편안하게 행동하는 여자를 밀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는 동행인이기도 했다.
심통은 진설하가 마음에 드는지 ‘흐흐’ 하고 웃기만 할 뿐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내일 먼 길을 가야 한다’는 말에 그제야 진설하가 아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적하의 완곡한 거부에 바로 반응한 걸 보면 취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설차수와 유근식이 진설하를 데리고 사라지자 연적하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이게 뭐라고 힘들지? 다음에는 밥만 먹자.”
“그래도 싫어하시는 것같이 보이진 않았습니다. 제가 잘못 본 겁니까?”
“싫어할 이유는 없잖아. 사람은 좋은 것 같던데.”
“흐흐, 그렇군요. 제가 봐도 공자님과 잘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통하긴 뭐가 통해? 그냥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진 소저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랬다면 벌써 제가 쫓아냈을 겁니다요.”
“거봐. 나도 딱 그 정도라니까.”
“그보다는 조금 더 나가신 것 같던데요? 다정하게 팔짱까지 끼시고서…….”
“심 노인, 말은 바로 해. 내가 팔을 빼앗겼던 거야. 전에 십두마병 아줌마보다 무서웠다고. 등에 땀난 거 보여 줘? 장난 아니었다니까.”
연적하는 오해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시답지 않은 말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계단을 통해 한 남자가 올라왔다.
그동안 호기심으로 몇몇 손님들이 칠 층까지 올라오곤 해서 두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직 한창 장사를 할 시간인지라 또 누가 왔으려니 한 것이다.
칠 층에 올라간 연무백은 이내 연적하를 알아보았다.
청년의 앳된 얼굴에 십사 년 전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노인과 연적하의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때 심통이 차갑게 말했다.
“웬 놈이냐? 더 다가오면 모가지를 잘라 버리겠다.”
살기등등한 그 말에 연무백은 흠칫 놀라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빈말이 아니라는 듯 노인에게서 강력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무백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저는 연무백이라 합니다. 총순찰……님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심통이 눈을 부릅뜨고 연무백을 쏘아보았다.
“흥! 어디서 애송이 놈이. 우리 공자님이 아무나 다 만나 주시는 줄…….”
“심 노인, 다른 데서 한잔하고 있어.”
“예.”
심통은 두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끝으로 이동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연무백이 연적하의 앞에 앉았다.
연적하가 연무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연씨들이 찾아올 줄은 알고 있었다.
삼장불립 같은 큰일이 터졌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으리라.
며칠 전 백미주를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녀와 마주쳤을 때는 화가 나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었는데, 연무백을 보니 옛날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연무백과 연승백 그리고 연설주는 놀이를 핑계로 무던히도 자신을 괴롭혔다.
그때마다 녹림에서나 사용할 법한 욕은 기본이었다.
명가의 어린아이들이 어디서 그런 욕을 배웠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그렇게 연적하가 회상에 잠겨 있을 때 연무백이 머리를 숙였다.
“미안하다.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나이였다고 하나, 너무 큰 죄를 지었다. 지금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이번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너를 만나 사죄하고 싶었다.”
“세상 쉽게 살려고 하지 마. 온갖 나쁜 짓은 다 해 놓고 미안하다는 말이면 다야?”
“…….”
연무백은 씁쓰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맞는 말이다.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만약 연적하가 남이었다면 연씨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나마 혈육이라고 목숨을 끊지 않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용서해 달라는 게 뻔뻔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아버지를 생각해서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다오.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 수 있겠니?”
연적하는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고통스러운 표정과 진솔한 고백에서 연무백의 진심이 느껴졌다.
몇 마디 말만으로도 그가 제법 괜찮은 어른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큰어머니의 와룡장에서 내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고 있겠지?”
연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어머니와 연씨 늙은이들과 백가장 무사들, 그들의 주인인 백가장주, 큰어머니의 와룡장 재건을 도운 양가장주에게 가서 전해. 내 앞에 석고대죄 하면 용서해 줄지도 모르겠다고.”
“…….”
그제야 연무백은 양가장이 삼장에 포함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세운 와룡장에 돈을 댄 것으로 복수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아! 말은 전하겠다만 그분들이 그렇게 해 줄지는 모르겠구나.”
그러자 연적하가 피식 웃었다.
“쫄딱 망하고 싶다면야 무슨 짓인들 못 할까. 마지막 기회니까 잘 살려 보라고 해. 그나마도 내일부터는 쉽지 않을 거야. 내가 좀 바쁠 예정이거든.”
“……다른 길은 없겠느냐?”
“후후후. 무백 형. 나를 너무 물로 보는 것 같은데. 나 쉬운 사람 아니야. 만약 형이 내 입장이었다면 이보다 더 심했을 것 같은데. 아니야?”
꿰뚫어 보는 듯한 연적하의 눈빛에 연무백은 슬쩍 시선을 외면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만약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복수할 힘까지 있다면…….
“알겠다. 너의 말을 전해 보마.”
자리에서 일어선 연무백에게 연적하가 지나가듯 말했다.
“나도 들은 소리가 있는데, 너무 와룡장에 연연하지 마. 자식들의 인생이라는 것도 있잖아.”
“…….”
연무백은 연적하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얼핏 이해하지 못했다.
단 한 순간도 자신이 와룡장의 가주라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다. 어머니가 와룡장을 쥐고 흔들 때조차도 그랬다. 와룡장의 주인은 나라고.
***
백가장.
갑작스러운 와룡장주 연무백의 요청으로 백가장주, 양가장주가 한자리에 모였다. 백가장이 삼장의 중간에 있어 이곳으로 정한 것이었다.
“그래, 연 가주. 우리를 왜 보자고 했는가? 정의맹이나 녹림 쪽에서 들어온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는가?”
무천검 백승호는 상대가 외손자이지만 반말을 하지 않았다.
이 자리가 삼장이 모인 공적인 자리임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연무백이 굳은 눈으로 백승호와 이화신창 양주환을 바라보았다.
‘삼장의 앞날을 위해서 숨길 수는 없다.’
비록 가족의 치부이지만 계속 덮으려 했다가는 망할 판이니 망설여서는 안 된다.
“이런 말씀까지는 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더 이상 묻어 둘 수가 없게 되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들 연적하라는 사람이 왜 삼장을 괴롭히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지요. 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연무백은 과거 백미주가 연무룡의 사망 후에 한 일을 털어놓았다. 연적하가 배다른 동생이란 것부터, 과거 백미주가 한 짓을 말이다.
“……연적하는 창고에서 선조가 남긴 기연을 얻었다고 합니다. 십 년 후에 그는 창고에서 탈출을 했습니다. 제가 와룡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생긴 일이지요. 그 뒤로 녹림에 투신해서 오늘과 같은 일을 벌인 것입니다.”
“…….”
백승호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딸이 한 짓으로 인해 이렇게 됐다는 데서 수치심을 느낀 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양주환이 기막힌 얼굴로 물었다.
“허면, 양가장은 무슨 죄가 있다고?”
“궁장의 와룡장을 재건하는 데 양가장이 도운 것 때문이라고……. 죄송합니다.”
“그런 일을 왜 나에게 진즉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니 낙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지? 그와 같은 은원이 있는 줄 알았다면 내가 돈을 냈겠는가! 와룡장과 백가장 때문에 나까지 이게 무슨 꼴인가!”
양주환이 억울하다는 듯 연무백을 나무랐다.
백승호는 울컥했지만 딸을 잘못 둔 죄로 참아야 했다.
“흐음!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는지는 알았네. 이 일을 풀 방법도 알고 있는가?”
“조금 전에 연적하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관계자 모두가 자신의 앞에 석고대죄하면 용서해 줄지도 모르겠다고…….”
대번에 백승호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제 놈에게 머리를 조아리라 이건가.”
양주환 역시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양가장은 싸우다 죽을지언정 녹림도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 없네.”
“하지만 장인어른, 잘못은 이쪽에서 한 게 분명하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정확하게 말해서 잘못은 사돈댁이 했지. 나는 측은지심을 발휘해 사위를 도운 죄밖에 없어. 그만한 일로 머리 숙여 사죄하면 무림 동도들이 우리를 비웃을 걸세.”
양주환의 말도 맞는지라 연무백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양 가주와 마찬가지요.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있거늘, 왜 내가 와룡장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해 머리를 숙여야 한단 말이오. 양 가주, 그렇지 않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와룡장의 일로 왜 우리까지 피해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거야말로 녹림을 등에 업고 저지르는 패악이 아니면 뭡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무백이 조심스럽게 백승호에게 말했다.
“백 가주님, 아니, 외할아버지,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적하를 창고에 가두고 십 년간 감시한 자들이 백가장 무사들입니다. 할아버님이 뭐라고 하시든 백가장은 이 일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건……. 끙!”
백승호는 달리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때다 싶어 양주환이 한마디 했다.
“사위도 알다시피 양가장은 죄가 없지 않은가? 연적하를 잘 좀 설득해 보시게.”
“장인어른, 그는 어머니가 다시 세운 와룡장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걸 도운 사람들에게도 화가 난 상태고요. 그는 무도한 자가 아니니, 장인어른께서 조금만 숙여 주시면 무탈하게 넘어갈 겁니다.”
“죄가 없는데 어찌 머리를 숙이라 말하는가! 그것도 녹림도에게! 힘이 없어도 양가장은 정파의 명가일세. 다시는 그런 소리 입 밖에 꺼내지도 말게.”
“두 분 어르신.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내일이면 그나마도 기회가 사라집니다. 연적하가 정주에 있을 때 삼장불립을 취소시켜야 합니다.”
연무백은 답답했다.
어머니에게는 아직 말도 꺼내지 못했다. 보나 마나 펄펄 뛰실 게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쉬울 거라 생각한 백가장과 양가장도 만만치 않았다.
끝내 백승호와 양주환은 머리 숙이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파의 명숙인 그들은 ‘녹림도에게 굴복하느니 죽겠다’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