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84
1184회. 저의 대전사가 되어 주실 수 있나요?
분하고 원통한 일이지만 이상하게 벤젤은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어젯밤 기사단장이 ‘후작의 여자가 되어 달라’고 애원한 이후로, 계속 그랬다.
묵묵히 듣고 있던 엘리오가 벤젤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너무도 담담해서다.
그런데 그녀의 눈빛은 담담함을 넘어 메말라 있었다.
뭐랄까.
생기가 빠져나간, 비경(秘境)의 사막에서 본 마른 풀을 보는 느낌이다.
차라리 조금 전의 까칠하던 때가 더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수평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형 동생 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
하물며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오히려 크나우프 후작에게 가라고 등이나 떠밀지 않으면 다행이다.
“벤젤 경은 크나우프 후작님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의 말이 나왔지만 벤젤은 상처받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으니 상처받을 일도 없었다.
의외인 것은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기사로 대해 준다는 점이다.
모두가 자신을 한 사람의 ‘평민’ 여자로 여기고 있는 이때에 말이다.
그래서인지 말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제가 되고 싶은 것은 기사지, 대귀족의 애인이 아니에요. 그리고 크나우프 후작님은 죄송하지만 제 취향도 아니고요.”
“크크큿!”
엘리오는 취향이 아니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한마디 말로 그녀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벤젤이 다르게 보였다.
아직은 평민에 불과한 기사가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과 같은 이의 구애를 거부하다니!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웃음에 벤젤은 처음으로 상처를 입었다.
그녀는 그가 다른 귀족들처럼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했다.
“알아요. 제가 주제넘는 소리를 했어요. 기사단장님의 말씀처럼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게 맞겠죠.”
“그런데 왜 거절했습니까?”
“기사니까요. 칼로 명예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기사가, 창부처럼 살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엘리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고 아니고를 떠나서 싫은 사람과 억지로 살을 부대낄 이유는 없었다.
벤젤이 의아한 눈으로 엘리로 라고아 자작을 보았다.
크나우프 후작과 형 동생 하는 사람이 자신의 말에 동감을 표하다니?
친부인 기사단장조차도 크나우프 후작에게 가라고 등을 떠미는 마당에?
“반대하지 않으시나요?”
“반대해야 합니까?”
“자작님은 크나우프 후작님과 친하시잖아요.”
“친해도 생각하는 바가 다를 수 있습니다. 크나우프 후작님과 나는 한 몸이 아닙니다.”
“그래도 결국…”
벤젤은 말끝을 흐렸다.
‘크나우프 후작님 편에 설 거잖아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그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마음에 달린 일인 까닭이다.
한계를 느낀 그녀는 다시 수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특무대가 자신의 일로 기사단장까지 협박할 줄은 몰랐다.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다.
이 세상에 크나우프 후작의 구애를 거절한 여기사는 존재할 수가 없다.
크나우프 후작에게 몸을 주든지, 자살을 하든지 해야 끝날 일이었다.
그녀는 후자에 마음이 쏠렸다.
윌리엄과 깁슨 캐넌 씨까지 죽게 해 놓고 후작의 여자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 죽자.’
막 결심을 굳힌 그녀의 귓가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싸워요.”
벤젤은 처음에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기사라면 싸우라고요.”
벤젤이 황당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았다.
이제 겨우 마나 유저가 된 자신에게 소드마스터에 맞서 싸우라니?
“마나 유저에 불과한 저에게 지금 싸우라고 하신 건가요?”
“나보다 강한 상대하고는 안 싸울 거예요? 기사라면서요?”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시네요. 네, 물론 저도 싸우고 싶죠. 하지만 저는 특무대의 말단 기사조차 감당할 수 없어요. 그런 저에게 크나우프 후작님과 싸우라고 하는 건…… 희롱하는 소리밖에 안 돼요.”
“대전사 제도가 있잖아요.”
“하아! 대전사 좋죠. 하지만 세상에 어느 누가 나 같은 빈털터리 평민 기사를 위해 크나우프 후작님과 싸워 주겠어요? 자작님이라면 하시겠어요?”
“정중히 요청해 보세요.”
“요청하면요? 싸워 주실 거냐고요?”
벤젤이 이를 악물고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노려보았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의 동생.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과 싸운다는 것은 곧 크나우프 대공가와의 싸움을 의미한다.
기사라면 누구도 크나우프 대공가를 적으로 돌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건 북부 귀족들 식의 희롱일까?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눈빛이 맑았다.
이번에는 엘리오가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벤젤 경은 아직 정중하게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벤젤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에 균열이 갔다.
문득 ‘어쩌면 이 젊은 북부의 귀족에게 정말 자신을 도울 마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도덕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 정도의 자비심은 가질 수 있을 터였다.
순간 벤젤의 가슴이 ‘두근’ 하고 뛰었다.
죽어 있던 눈동자에도 찰나지간에 생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신만이 크나우프 후작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동정이나 연민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아무리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소드마스터라 해도 크나우프 대공가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
자칫 죄 없는 북부 귀족들까지 비명횡사를 당할 수 있었다.
크나우프 후작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양심에 찔린 그녀는 도와 달라고 적극적으로 말하지 못했다.
갈등하는 벤젤의 귓가에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합니다.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하늘도 도울 수 없어요.”
머뭇거리던 벤젤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떤 기사도 크나우프 대공가에 맞설 수는 없어요. 고작 나 하나 때문에 너무 큰 희생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누가 큰 희생이래요? 나는 희생이라고 생각되면 나서지도 않아요. 내 신조는 ‘도울 여력이 되면 돕는다’입니다.”
그 말에 벤젤은 부담을 내려놓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님. 저의 대전사가 되어 주실 수 있나요? 싸워야 할 상대가 크나우프 후작님이라, 거절하셔도 원망하지는 않겠습니다.”
엘리오가 답했다.
“벤젤 경의 대전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크나우프 후작님께 정당한 결투를 신청하십시오. 그럼 이만.”
말을 마친 엘리오가 돌아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뜻밖의 대답에 눈을 끔뻑이던 벤젤이 그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왜죠?”
왔던 길을 돌아가던 엘리오가 우뚝 멈춰 섰다.
벤젤이 확인하듯 물었다.
“동정심으로 그러시는 건가요?”
엘리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기사가 기사를 위해 싸우겠다는 데, 잘못됐습니까?”
“그러니까, 왜요! 상대는 크나우프 후작님이라고요!”
“내 고향에서 협객(knight errant)들은 원래 그럽니다.”
***
벤젤과 헤어져 바닷바람 태번으로 돌아온 엘리오는 따로 쉬고 있던 파비안과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조금 전에 우연히 벤젤 경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항해를 나간 동안에 많은 일들이 있었더군요.”
엘리오가 서두를 떼자 파비안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혀! 그 일이 결국 자작님 귀에까지 들어갔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파비안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저도 어젯밤에 들었는데 크나우프 후작님이 벤젤 경에게 흑심을 품고 구애를 했답니다. 그걸 거절하자 벤젤 경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걸고넘어져…… 교수대로 보냈고요. 항구에 있는 교수대에서 두 명이 처형당했답니다.”
“으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나우프 후작이 호색한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라고아 경의 앞에서 그런 짓을 벌이다니……. 라고아 경을 너무 쉽게 생각했군.’
그가 본 엘리오 라고아 자작은 정의로운 기사였다.
마족과의 전쟁에서 앞장서 싸운 것은 물론, 대륙의 평화를 위해 태양신까지 죽이겠다고 찾아 다니고 있을 정도다.
북부의 대귀족들에게 가차 없이 칼을 휘둘렀지만, 평민인 마부에게는 존대를 사용하던, 그야말로 종잡기 어려운 귀족이다.
그런 그가 벤젤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면 결과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그래서 벤젤 경에게 대전사를 구해 맞서라고 했습니다.”
엘리오의 말에 파비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작님이 대전사로 나서 주기로 하신 모양입니다?”
“어, 맞아.”
“마의 해역은 어쩌시고요?”
“불의를 보고 침묵하는 것은 그 불의에 동참하는 것과 같다. 천공성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잠깐 시간 내서 도울 생각이다.”
“하아! 자작님.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을 박살 내면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크나우프 대공가는 왕국 하나와 맞먹는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나우프 대공가가 태양신을 죽일 수 있어?”
“꿈도 못 꾸죠.”
“나는 태양신을 죽일 사람이야. 어디다 비교를 해?”
“비교가 아니라……. 자칫 크나우프 대공가가 들고일어나면 항해를 하는 데 지장이 올 수도 있어서 드린 말씀입니다.”
“내 눈앞의 불의를 외면하고 세상을 구한다? 나는 그런 거 못 한다.”
“빨리 고향에 돌아가셔야지요.”
“고향에 돌아가서 이럴걸, 저럴걸, 후회하고 싶지 않다.”
“에혀! 알겠습니다. 자작님 고집을 누가 꺾겠습니까.”
파비안은 탄식했지만 의외로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담담했다.
“파비안 남작,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남부 왕국과 전쟁 중이라 크나우프 대공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네. 황궁에서도 싸움이 커지는 걸 원치 않을 테고.”
“그래 주면 고맙지만……. 크나우프 대공이 그냥 덮고 넘어가 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엘리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걱정도 팔자다. 그냥 안 넘어가면? 눈 까뒤집고 덤비면 처맞는 거지. 아니면 깝치지 못하게 팔을 잘라 버릴까?”
그렇지 않아도 이세계 귀족들에게 반감이 많은 엘리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작님. 그러다가 제국이 작정하고 덤비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제발 진정 좀 하십쇼. 예전에는 안 그러시더니 요즘 왜 그러십니까?”
“제국이 작정하고 덤비면? 제국이 망하는 거지. 내가 아주 싹 쓸어버릴 거야. 쌍놈의 새끼들. 귀족을 죄다 노예로 만들어 버리면 정신 좀 차리려나?”
흥분한 엘리오의 음성이 점점 높아졌다.
사실 ‘왕들의 하늘’에서 큰 전쟁을 벌인 바 있던 엘리오는 제국이 두렵지 않았다.
그의 말에 기겁을 한 파비안은 주변 눈치를 살피느라 어쩔 줄 몰라 했다.
“백작님, 자작님 좀 말려 보십쇼.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나겠습니다.”
발언의 수위가 점점 올라가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급히 진화에 나섰다.
“제국 차원에서 싸움을 걸 일은 없을 겁니다. 라고아 경을 건드리면 북부 왕국들이 들고일어날 테니까요. 크나우프 후작과의 싸움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그럴 겁니다. 암요. 그래야지요. 남부 왕국과의 전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여기 일에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