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83
1183회. 잠시 어리석은 생각을 했어요
셀리가 사라진 뒤에도 파비안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벤젤을 압박하기 위해 기사와 항구 관리 책임자를 교수형시키다니?
물론 대귀족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북부 귀족들이 항구에 돌아올 걸 알면서 교수대를 치우지 않은 건 의외다.
그건 ‘북부 귀족들이 봐도 상관없다’는 걸 의미했다.
북부 귀족들이 ‘관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거나, 아니면 ‘북부 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리라.
전자라면 다행이지만 후자라면 일이 상당히 꼬이게 된다.
“그러면 안 되는데…….”
제국에서 크나우프 대공가와 싸운다는 건 자살행위와도 같았다.
걱정과 달리 파비안의 표정은 절망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때문이다.
파비안은 바닷바람 태번으로 걸음을 옮겼다.
본래 자리로 돌아간 파비안은 창가 쪽을 슬쩍 살폈다.
크나우프 후작과 엘리오 라고아 자작의 관계는 꽤나 친밀해 보였다.
저것만 봐서는 벤젤의 문제로 틀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엘리오 라고아 자작에게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크나우프 대공가의 위상을 생각하면 못 들은 척하는 게 맞다.
게다가 크나우프 후작의 여자 문제에 북부 귀족들이 나서는 것도 이상하다.
무엇보다 벤젤과 북부 귀족들은 오가다 만난 사이일 뿐이다.
“아휴! 모르겠다.”
파비안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취기가 살짝 돌 즈음 엘리오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빈자리에 앉았다.
파비안이 불콰한 얼굴로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며 물었다.
“벌써 끝나셨습니까?”
“시작도 안 했다.”
“그런데 후작님이 놔주시던가요?”
파비안이 창가 자리를 돌아보았다.
언제 갔는지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과 케이사 콜드월 백작은 보이지 않았다.
“형님은 특무대 참모와 영주의 기사단장이 크게 싸운다는 소리를 듣고 나갔다.”
“특무대 참모와 영주의 기사단장이 싸운다고요? 기사단장의 간덩이가 부었네요?”
“붓긴 뭐가 부어? 둘 다 자작이라던데 싸울 수도 있지.”
“감찰부 자작은 백작도 못 건드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백작님?”
그러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국 감찰부의 자작 정도 되면 대귀족들도 눈치를 봅니다. 기사단장이 잘못한 게 맞습니다. 더구나 특무대를 크나우프 후작이 이끌고 있는 상황이면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까딱하면 영주의 목까지 날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 영주가 알아서 기겠지만요.”
“휘유! 그 정도야? 특무대의 서슬이 대단하네?”
엘리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영주와 영주의 기사단장인데 감찰부에 비비지도 못한다니!
하기야 생각해 보니 황실 고수들이 강호에 나와도 그와 비슷했던 것 같다.
파비안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기사단장 정도 되면 알아서 기었을 텐데……. 왜 싸움이 났을까요?”
엘리오도 라르바 오마르 백작도 내막을 알지 못하는지라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세 사람은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맥주와 안주를 즐겼다. 항구에서 하루 쉬기로 했으니 확실히 쉬려는 것이다.
***
항구 외곽의 선술집.
난장판이 된 실내 중앙에 두 기사가 서로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보리스 기사단장 카밀로 쿠스만 자작과 특무대 참모 콜린 메스칼 자작이다.
서로 치고받던 두 사람은 잡아먹을 듯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때 문을 열고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과 케이사 콜드월 백작이 들어왔다.
카밀로 쿠스만 자작과 콜린 메스칼 자작은 급히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에게 허리를 숙였다.
“후작 각하.”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인사를 받지 않고 마치 담장처럼 길게 가로놓여진 테이블로 다가가 주문을 했다.
“네로조이스 한 잔.”
“예, 예.”
네로조이스는 선술집에서 파는 증류주 중에 가장 비싼 술이다.
선술집 주인은 황급히 투명한 유리잔에 네로조이스를 가득 따라 두 손으로 크나우프 후작에게 바쳤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독하기로 소문난 네로조이스를 입안에 털어 넣고 꿀꺽 삼킨 뒤,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왜 싸웠나?”
그러자 콜린 메스칼 자작이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별일 아닙니다. 함께 술을 마시다가 취중에 잠깐 실수를 한 것뿐입니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의 시선이 기사단장에게로 향했다.
“쿠스만 자작도 저 말에 동의하나?”
“예. 술에 취해서 그만…….”
“특무대와 기사단이 같은 지역에 있으니 부딪칠 일도 많을 거다. 그럴수록 지휘관들이 모범을 보여야지. 다음에 이런 일이 또 발생하면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벌하겠다. 참모는 특무대장을 따라가고, 쿠스만 자작은 남아라.”
“예.”
콜린 메스칼 자작이 꾸벅 인사를 한 후에 특무대 대장 케이사 콜드월 백작과 함께 나갔다.
홀로 남은 카밀로 쿠스만 자작에게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손을 까딱였다.
카밀로 쿠스만 자작이 급히 탁자로 다가갔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탁자 너머 선술집 주인을 향해 돌아섰다.
“네로조이스 두 잔을 두고 나가거라.”
“예.”
선술집 주인 젝은 네로조이스 두 잔을 탁자에 올려 두고 밖으로 나갔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술잔 하나를 카밀로 쿠스만 자작 앞으로 밀었다.
“마시게.”
“황송합니다.”
카밀로 쿠스만 자작은 두 손으로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술잔을 기울일 때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말했다.
“특무대 참모와 주먹다짐이라니, 그 아비에 그 딸이로군.”
“쿨럭! 쿨럭!”
깜짝 놀란 카밀로 쿠스만 자작은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했다.
“뭘 그렇게 놀라나?”
“아, 알고 계셨습니까?”
카밀로 쿠스만 자작은 크나우프 후작의 눈치를 살폈다.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답했다.
“벤젤과 경의 관계를 말하는 거라면 그렇네.”
“용서해 주십시오. 의도적으로 감춘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네. 영주만 알고 있는 것 같더군. 맞나?”
“그렇습니다.”
“경은 나와 벤젤이 사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습니다.”
“벤젤의 고집은 누굴 닮은 건가?”
“송구합니다. 영주님은 저를 닮았다고 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경도 알겠지만 대귀족이 되면 말이야. 사생활이라는 게 없어져. 사소한 언행까지도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이 되지.”
“예.”
“벤젤과 나의 관계도 정치적일 수밖에 없어. 크나우프 대공가의 자리를 탐내는 대귀족들이 그렇게 만들고야 말 걸세.”
“…….”
카밀로 쿠스만 자작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국에는 크나우프 대공가만 있는 게 아니다.
자신들이 크나우프 대공가 못지않다고 생각하는 명문가들도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경에게는 미리 사과하겠네. 미안하게 됐어.”
“예?”
카밀로 쿠스만 자작이 눈을 끔뻑였다.
그는 왜 크나우프 후작이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이 설명하듯 말했다.
“나는 이 싸움에서 지면 안 되네. 무슨 일이 있어도 벤젤을 취해야 해. 벤젤이 너무 완강하게 거부해서……. 어쩌면 경의 목숨을 걸고 협박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네.”
순간 카밀로 쿠스만 자작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정치적이라고 말한 것은 명분에 불과했다.
“후작 각하. 저는 진심으로 후작 각하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착각하지 말게. 나에게는 벤젤을 압박할 효과적인 수단이 필요할 뿐이야. 경이 벤젤에게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네.”
“…….”
카밀로 쿠스만 자작은 황망한 얼굴로 크나우프 후작을 보았다.
특무대가 왜 아직도 교수대를 철수하지 않는지 의아했는데, 설마 자신을 매달려고 남겨 두었던 것일까?
“후후! 놀라기는, 농담일세. 아무리 내가 막나간다 해도, 설마하니 좋아하는 여자의 아버지를 교수형에 처하겠나?”
“그, 그러실 리가 없지요.”
“벤젤을 설득하게.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고슬링 크나우프 후작은 네로조이스를 한입에 털어 넣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엘리오는 느긋하게 바닷가 산책에 나섰다.
해변을 따라 한참 걷던 그가 멈칫했다.
저 멀리 절벽 끝에 한 여자가 ―마치 투신이라도 할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응? 벤젤?”
그녀의 표정이 너무 절박해 보여 엘리오는 저도 모르게 절벽으로 다가갔다.
“뛰어내리기 좋은 날씨죠?”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벤젤은 천천히 돌아섰다.
북부 귀족인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머쓱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번졌다.
“그런 날씨도 있습니까?”
“없으면 말고요. 항구에 기사단이 있던데, 함께 있지 않고 왜 혼자 여기 있어요? 기사단에서 따돌림 같은 거 당합니까?”
벤젤은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물끄러미 보았다.
알고 비웃는 걸까? 아니면 정말 모르고 묻는 걸까?
그와 크나우프 후작의 긴밀한 관계를 떠올린 그녀는 전자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비꼬지 마시고, 하실 말씀이 있으면 그냥 하십쇼.”
어딘지 차가운 그녀의 말투에 엘리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름 신경이 쓰여서 한 소리에 왜 저렇게 발끈하는지 모르겠다.
“벤젤 경은 원래 그렇게 성격이 까칠합니까?”
“원래 그러냐고요? 천만에요. 대귀족이 내 몸을 원합니다. 그걸 거절했더니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죽이고 있습니다. 자작님 같으면 어떨 거 같으십니까?”
“그건 누구 이야기예요?”
“그야 당연히 제 이야기죠.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그러자 엘리오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모르니까 묻죠. 진짜 의심 많으시네.”
엘리오 라고아 자작이 정말 모르는 것처럼 보이자 벤젤은 급히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요즘 너무 나쁜 일들이 계속돼서 제가 조금 성급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산책하다가 아는 사람이 투신자살할 것 같은 얼굴로 서 있길래 와 봤습니다. 몸을 달라는 건 뭐고, 사람들을 죽인다는 건 또 뭡니까?”
벤젤은 고개를 들어 엘리오 라고아 자작을 보았다.
혹시나 하는 희망이 싹텄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이내 눈 녹듯 사라졌다.
상대가 크나우프 후작과 형 동생 하는 북부의 귀족인 까닭이다.
엘리오 라고아 자작과 크나우프 후작의 관계를 떠올린 그녀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기다리던 엘리오가 다시 물었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엘리오의 채근에 굳게 닫혀 있던 벤젤의 입술이 열렸다.
“얼마 전 크나우프 후작님의 구애를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특무대가 동료 기사에게 시비를 걸고는, 그를 체포하더군요. 그리고 크나우프 후작님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을 교수형시키겠다고…….”
벤젤은 담담하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기사 서임을 받은 윌리엄과 항구 관리 책임자인 깁슨 캐넌이 교수형당했다’는 말에 엘리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젯밤에는 기사단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것 같으니 제발 살려 달라고. 후작님의 여자가 되어 달라고 애걸복걸하시더군요. 그래서 ‘내가 죽으면 끝나지 않을까?’ 하고 잠시 어리석은 생각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