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198
1198회. 끝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이 애써 무덤덤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사실 에스카토스 4세와 북부 왕국 대귀족들은 그가 제국의 편에서 북부 왕국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오십 년 전 제국 전쟁에서 군신(軍神)이라 불리던― 하네스 크나우프 대공의 재림이라 말하기도 했다.
엘리오가 뻘쭘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 그게 벌써 에스카토스 왕국까지 알려졌어요?”
사실 엘리오의 봉작 소식은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제국과 왕국에 전파됐지만, 정작 당사자만 그걸 모르고 있었다.
“제국에서 에스카토스는 물론 북부 왕국 전체에 마법 통신으로 공지를 했소. 제국에서 북부 왕국 전체에 마법 통신을 보낸 건 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소. 그래서 ‘제국이 선전포고를 하는 줄 알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소.”
“하하하! 선전포고? 그건 좀 심했네요. 제국이 남부 왕국들과 전쟁 중인데 무슨 정신으로 북부 왕국에 선전포고를 한다고…….”
엘리오는 ‘그럴 일은 없다’고 장담하려다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아직 전쟁에 대한 제국 대귀족들의 분위기를 모르는 것도 있지만, 황태자에 대해 알고 나니 뭐라 단언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대륙 전체를 손에 쥐려는 제국인들의 야심을 생각하면, 그것이 쓸데없는 걱정만은 아니오. 그러다 보니 라고아 백작의 작위 소식을 접하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작위를 받은 건, 북부 대귀족들의 염려와 달리 확전을 막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엘리오는 최근 제국에서 있었던 일련의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제가 크나우프 대공가를 꺾을 경우 북부 왕국들이 남부 왕국과 손잡고 전쟁에 뛰어들 수도 있겠다 싶어서, 제국에 봉작을 요청했던 겁니다. 그런데 북부 왕국에서는 거꾸로 생각을 하셨다니 인생 참 묘하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이 되물었다.
“그런데 말이오. 그 반대의 일이 생길 가능성은 없겠소?”
“반대요?”
“라고아 백작이 제국의 작위를 받았으니……. 제국에서 마음 놓고 북부를 침공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하는 말이오.”
“에이, 남부 왕국과 전쟁하는 것도 수월해 보이지 않던데 북부 왕국까지 침공할까요?”
“제국이 남부에서 고전 중이라는 게 사실이오?”
“제국과 남부 왕국 사이에 전쟁이 난 이유는 알고 계신가요?”
“어비스에서 마도 시대의 전략 병기인 강철 골렘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남부 왕국들이 그걸 독식하려고 대수림의 출입을 통제하다 생긴 일이라 들었소.”
“맞아요. 그런데 최근 제국군이 남부 전선에서 고전 중인 것 같더라고요. 오마르 백작님은 남부 왕국들이 그 강철 골렘을 사용한 것 같다고 생각하시더라고요? 저번에 백작님이 그러셨죠?”
엘리오가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국군이 남부에서 고전한다면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순간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흐음! 강철 골렘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소. 강철 골렘 한 기가 한 사람의 소드마스터와 맞먹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 정도로 강한가요?”
“마력총이나 마력포로는 강철 골렘의 외피를 뚫지 못하오. 외피를 파괴하려면 같은 자리를 쉬지 않고 타격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되오. 소드마스터가 가까이 붙어 마나 블레이드로 같은 자리를 수차례 베면 그제야 외피가 파괴되는데……. 그때까지 강철 골렘이 가만히 기다려 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강철 골렘이 근처에 있으면 소드마스터의 접근이 불가능하니 가히 무적이라 할 수 있소.”
“대단하네요. 여하튼 제 생각은 그래요. 지금 제국이 남부 전선에서 고전하고 있으니 북부 왕국에 눈을 돌리지 못할 거예요.”
“라고아 백작의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오. 그게 사실이라면 북부 왕국들도 대수림으로 모험가들을 보내려 할 텐데, 남부 왕들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소.”
“남부 왕국들이 독식할 생각이면 출입을 막겠죠? 아니면 제국과의 전쟁에 동참하라는 조건을 걸 수도 있겠고.”
“그냥 열어 줄 가능성은 없다고 보시오?”
“후작님이라면 그걸 혼자 먹겠다고 제국과 전쟁까지 벌인 마당에 공짜로 나눠 주겠어요?”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럴 리가 있나.’
그렇다면 이제 북부 왕국의 대귀족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격변하는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강철 골렘을 손에 넣어야 한다.
전통적인 혈맹인 남부 왕국들과 손잡고 제국과 싸우려 할까?
아니면 제국과 함께 강제로 대수림으로 밀고 들어가려 할까?
‘그 전에 제국에서 북부 왕국이 끼어드는 것을 허락이나 할지 모르겠군.’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수림의 문제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다음 날.
클로드 베르나르도 후작 일행은 비공정을 타고 피에스트라를 떠났다.
기사들로 가득하던 바닷바람 태번에 다시 일반인 손님이 들어왔다.
날씨가 추워지자 엘리오 일행은 바닷바람 태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히르헤라에 비하면 봄날씨라고 하지만 밖은 얼음이 얼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데스 항구에서 달리 갈 만한 명소가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엘리오 일행은 아침부터 창가 자리를 꿰차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셀리에게 맥주나 안주를 시키는 게 전부였다.
오후에도 그러자 보다 못한 셀리가 안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디 안 나가세요?”
그러자 파비안이 기름기 줄줄 흐르는 얼굴로 되물었다.
“갈 데는 있고?”
“해변에 가서 파도라도 구경하세요.”
“배 타고 나가면 지겹게 보는데 뭘 또 보러 가?”
“아니면 등대를 구경하러 가시든지요. 하데스 항의 등대는 제국에서도 유명해요.”
“항구에 들어올 때마다 질리게 본다.”
“멀리서 보는 거랑 가까이서 보는 게 같은 줄 아세요? 가까이서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창가 자리를 맡아 줄 거냐?”
“그건 못 해요. 누가 앉겠다는 걸 저 같은 일개 점원이 어떻게 막아요?”
“그럼 안 간다. 안 가실 거죠? 백작님들?”
엘리오와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마력범선에서도 등대를 세밀하게 볼 수 있기에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불편하기 마련이다.
엘리오는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가면서도 끝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마치 석상처럼 보였다.
몸살 난 사람처럼 꿈틀거리는 엘리오에게 파비안이 한마디 했다.
“힘들면 방에 가서 좀 누웠다가 오십쇼.”
“뭘 했다고 힘들어?”
“아픈 사람처럼 가만히 안 계시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번에 다친 등 때문에 그런가? 등 좀 봐 줘 봐.”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등을 내보였다.
“멀쩡합니다. 불에 데인 것처럼 마력탄 박혔던 흉터만 남았습니다.”
“그래?”
엘리오는 다시 옷을 갖춰 입더니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아! 지겹다. 지겨워. 내가 카마 데비아스(천자마) 이 개자식을 만나면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곧 만나게 되실 겁니다. 지난번에도 한 달이 지나서 녹색 섬을 발견했잖습니까? 이번 항해에 다시 나타날 겁니다.”
“그렇겠지? 그때도 한 달쯤 됐었지?”
“예, 그런데 세이렌과 폭풍우에 대한 대비도 세워야 하지 않습니까?”
“다 세워 놨다.”
“그런데 왜 저는 모릅니까? 오마르 백작님은 아십니까?”
파비안이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도 모르네. 라고아 경, 우리가 알면 안 되는 일입니까?”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질문에 엘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알아도 돼요. 별거 없어요. 녹색 섬이 나타나면 토르누비스로 날아가 볼 생각입니다. 마력범선으로는 안 될 것 같더라고요.”
그러자 파비안이 끼어들었다.
“혼자서 가시게요? 오마르 백작님과 저도 데리고 가 주십쇼. 지금까지 같이 개고생을 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혼자만 가시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마르 백작님?”
“파비안 남작의 말대롭니다. 저와 파비안 남작도 데리고 가 주십시오.”
엘리오가 애매한 눈으로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을 보았다.
“데리고 가는 건 문제가 아닌데…….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그래요. 카마 데비아스가 본신의 힘을 완전히 되찾았다면, 저에게도 쉬운 상대가 아니거든요.”
그러자 파비안이 시원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 나 봐야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그게 무서워서 명색이 기사가 천공성을 눈앞에 두고도 안 간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습니다. 오마르 백작님과 저를 데리고 가 주십쇼.”
엘리오가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물었다.
“난 말씀드렸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고. 그래도 저와 함께 가실 겁니까?”
“파비안 남작의 말처럼 라고아 경만 보내면 남은 평생을 후회할 것 같습니다. 끝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까지 그렇게 말하자 엘리오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이세계의 기사들에게 천공성은 목숨을 걸어도 될 만한 모험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녹색 섬이 보이거나, 기상이변이 확실시되면…… 바로 제 옆으로 오십쇼. 토르누비스로 날아갈 테니까요. 파비안 너도. 뭉그적거리면 두고 간다.”
“예.”
파비안이 씩씩하게 답했다.
폭풍우 속을 날아갈 때도 같은 마음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다음 날 아침.
엘리오 일행은 다시 마력범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선원들도 이번 항해는 느낌이 오는지 제법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겨울 바다의 느낌은 가을과 또 다르다.
한낮에도 차갑고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상쾌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인지 뱃머리에 모여 있는 엘리오 일행의 표정도 어딘가 음울했다.
뱃머리에 부딪치는 파도를 보던 파비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겨울 바다에 빠지면 얼어 죽겠죠?”
엘리오가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왜 빠질 생각을 해?”
“풍랑이 거세다 보면 빠질 수도 있죠. 지난번에도 선원 하나가 빠지지 않았습니까?”
때마침 측면을 때린 파도에 마력범선이 한차례 요동쳤다.
상체가 흔들리자 파비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어이쿠! 이번에는 시작부터 만만치가 않네요?”
“그러게. 날씨가 어째 수상하다. 이럴 때 기상이변까지 겹치면……. 돌아가시겠는데?”
“재수 없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빈말이라도 그런 말씀은 좀 삼가해 주십쇼.”
파비안이 불안한 눈으로 사방팔방을 살폈다.
전과 달리 거센 바람에 파도의 출렁거림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타실에 콕 박혀 있던 알트헬름 선장이 뱃머리로 급히 다가왔다.
“나으리님들, 바람이 조금씩 강해지고 있습니다. 마의 해역을 잠시 벗어났다가, 바람의 기세가 꺾인 뒤에 다시 와도 되겠습니까?”
“그, 그러는 게 낫겠죠? 백작님, 어떻게 할까요?”
파비안은 오랜만에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 같으면 대범한 척하겠는데 살벌한 겨울 바다를 보니 간이 쪼그라들었다.
아니, 무엇보다 느낌이 싸했다.
여기에 기상이변까지 겹치면 누구 하나 반드시 죽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