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03
1203회. 나도 기회를 줄까 하는데, 어때?
강호에서는 초식의 경지를 벗어난 검사라도 손에 익은 초식을 애용한다.
그건 엘리오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그는 구천구검이나 천산검영 같은 초식을 즐겨 사용했다.
진검강 수백 개를 생성해 날려야 할 상황이라면 차라리 천산검영의 초식을 한번 사용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이기어검을 썼다가 카마 데비아스에게 검을 빼앗긴 지금, 엘리오는 근거리까지 접근해 구천구검의 행지무강(行之無疆)을 사용했다.
행지무강은 ‘행함에 경계가 없다’는 이름 그대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막힌 적이 없었기에 믿고 꺼내 든 것이다.
쉬이익―!
천둔검이 여느 때처럼 쾌속하게 나아갔다.
행지무강을 사용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면전에 이른 만큼 태양신 카마 데비아스도 막아 내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카마 데비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만으로 천둔검을 잡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엘리오가 자신보다 약한 상대와 싸울 때 보여 주던 모습이었다.
한순간 엘리오는 그의 적들이 그랬던 것처럼 멈칫했다.
뒤이어 카마 데비아스가 손을 휘저었다.
무형의 파동에 직격당한 엘리오가 또다시 나뭇잎처럼 날아갔다.
콰앙―!
거대한 폭발음이 뒤를 이었다.
두 번이나 카마 데비아스의 공격에 맞은 엘리오는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깜짝 놀란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이 엘리오에게 달려갔다.
“라고아 경!”
“라고아 백작님!”
그러나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이 도착하기 전에 엘리오가 꿈틀거리더니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윽고 엘리오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후아! 엄청나군. 이건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카마 데비아스, ‘왕들의 하늘’에서 큰소리칠 만했다.”
“아니, 놀란 것은 내 쪽이다. 지금까지 나에게 너만큼 가까이 접근한 인간은 없었다. 인정하지. 너의 검술은 인간 중에 최고다. 천공성에 찾아온 기념으로 너의 무례를 용서해 줄 테니 그만 돌아가라. 알량한 재주를 믿고 다시 덤비면 이번에는 목숨을 취할 것이다.”
그러자 엘리오가 기이한 눈으로 카마 데비아스를 보았다.
죽일 수도 있음에도 용서해 주겠단다.
‘확실히 왕들의 하늘에서 본 천자마와는 다르구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타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지금껏 봐 왔던 어떤 신들보다 멀쩡했다.
다시 한번 ‘타락하지 않은 그를 죽여도 되는가?’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그의 망설임을 오해한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이 끼어들었다.
“라고아 경,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도 태양신에게는 닿지 않을 겁니다. 그만하시지요.”
“오마르 백작님 말씀이 맞습니다. 상대는 태양신입니다. 라고아 백작님이 신이 아닌데 어떻게 그를 이기겠습니까? 여기서 더 하면 진짜 죽을 겁니다. 고향에 있는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아, 이건 아닌가.”
파비안이 당황한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
뒤늦게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가려면 태양신을 죽여야 한다’던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말이 떠오른 탓이다.
그런 파비안을 보며 엘리오가 푸들푸들 웃었다.
“푸흐흐! 파비안, 웃기지 마라. 웃을 때마다 속이 뒤틀려 죽겠다.”
“여하튼 이제 그만하십쇼. 태양신은 마족 군주와 격이 다른 존재입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마나 프트라스님도 그렇지, 왜 인간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받았다. 아니, 어찌 보면 거래였는지도.”
구천현녀의 보증으로 봉인됐던 영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됐고, 고마운 마음에 구천현녀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거래가 맞으리라.
“그게 뭐든 불가능한 겁니다. 부탁이든, 거래든 불가능한 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누가 그래? 불가능하다고.”
엘리오가 카마 데비아스를 향해 돌아섰다.
인간들의 대화를 듣던 카마 데비아스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어리석구나 인간이여. 두 번의 기회는 없으니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해라.”
“어이, 한 번쯤은 ‘신이 인간에게 왜 그런 부탁을 했을까?’도 생각해 봐야 되는 거 아냐?”
엘리오가 카마 데비아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카마 데비아스는 잠깐 관심을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인간에게 자신을 죽일 방법이 존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문득 카마 데비아스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치이이익―!
뭔가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카마 데비아스와 엘리오 사이에 검게 그을린 선이 그어졌다.
“엘리오 라고아, 그 선을 넘으면 죽는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자비다.”
엘리오의 입가에 씁쓰름한 미소가 걸렸다.
카마 데비아스는 이 순간에도 자신을 살리려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마음이 넓은 신이란 말인가!
그런 신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여야 하는 자신의 사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씨발, 나도 나쁜 놈이었구나.’
엘리오는 철이 든 이후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비난했다.
지금까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신의 욕망이 드러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와룡장의 창고를 탈출한 뒤로 자신의 밑바닥을 보기는 처음이다.
이윽고 그의 발이 검게 그을린 선을 넘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보던 카마 데비아스가 손을 휘저었다.
쿠웅―!
묵직한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파장이 엘리오를 향해 밀려갔다.
엘리오는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다.
이세계 신의 힘에 정면으로 맞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우웅―!
반투명한 파란색 강기막이 엘리오의 전신을 에워쌌다.
꽈광―!
귀청을 찢는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땅이 길게 패이며 엘리오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가소롭다는 얼굴로 다시 손을 쓰려던 카마 데비아스가 멈칫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하늘 위에 거대한 검이 한 자루 떠 있었다.
‘저건 또 뭐지?’
천공성에 그늘이 생길 정도로 거대한 검이라니!
카마 데비아스는 반사적으로 엘리오 라고아를 살폈다.
그의 손에는 예의 그 물질도 비물질도 아닌 검이 들려 있었다.
그때 하늘의 검 끝이 천천히 아래로 기우는가 싶더니, 이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순간 카마 데비아스의 얼굴에 냉소가 어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천공성에 틀어박혀 지내는 동안 인간들에게 얕보인 모양이다.
마지막 경고마저도 무시하고 칼을 들이미는 걸 보니 말이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뒤이어 검 끝이 엘리오 라고아의 머리 위로 향하게 공간을 뒤틀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공간을 아무리 뒤틀어도 검의 방향이 바뀌지 않았다.
쓰아아아―.
칼로 부드러운 뭔가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칼 끝을 노려보던 카마 데비아스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헉!’
그것은 저 거대한 검이 공간을 가르는 소리였다.
놀랍게도 정체 모를 검은 공간을 가르며 자신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그건 불가능해!”
화를 참지 못해 파르르 떨던 카마 데비아스가 두 손을 하늘로 내뻗었다.
거대한 마력장이 하늘을 덮었다.
공간이 찢기자 시간을 조작하는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사실 조금 전 그가 엘리오의 천둔검을 손가락만으로 제압한 것도 시간 조작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한순간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던 거대한 검이 멈췄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섬뜩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던 카마 데비아스의 입이 체면 불고하고 쩍 벌어졌다.
하늘에 멈춰 선 검과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검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공간을 뒤틀어 보았지만 역시나!
거대한 검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유유히 공간을 찢어발겼다.
별수 없이 카마 데비아스는 한 손을 돌려 뒤쪽으로 뻗었다.
시간을 조작하자 그제야 검이 멈췄다.
카마 데비아스는 자신의 ―양손을 우스꽝스럽게 뻗은― 자세가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거대한 검이 미쳐 날뛸 것 같았다.
솔직히 시간을 잡아 두기에도 벅찬 상태였다.
물론 뜻만으로도 시공을 조작할 수 있지만, 기이하게 저 검들만은 신체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한편 엘리오는 카마 데비아스가 옴짝달싹 못 한다고 생각해 다시 천둔검을 휘둘렀다.
슈아아악―!
반월형의 오라 블레이드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카마 데비아스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카마 데비아스는 순순히 당하지 않았다.
그의 지척에 이른 반월형 오라 블레이드가 돌연 방향을 틀어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에게 날아간 것이다.
갑자기 오라 블레이드가 날아들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반사적으로 마나 블레이드를 일으켜 막아 냈다.
꽈광―!
묵직한 폭발음과 함께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뒤로 밀렸다.
엘리오는 그제야 자신의 공격이 카마 데비아스에게 먹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한계인지도 몰랐다.
구천검령 외에는 카마 데비아스를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카마 데비아스가 자신의 도발에도 무덤덤하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의 눈에는 자신이 하찮게 보였을 것이다.
바닥으로 떨어진 자신의 존재감에 화가 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카마 데비아스를 노려보던 엘리오는 구천검령을 하나 더 불러냈다.
‘이것으로 끝이다. 카마 데비아스.’
하늘의 중심에서 거대한 검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한편 카마 데비아스는 머리 위에서 뭔가 느껴지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미증유의 힘을 가진 거대한 검이 눈에 들어왔다.
‘아아! 안 돼!’
어찌나 놀랐던지 카마 데비아스의 집중력이 흔들렸다.
두 자루 구천검령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뒤늦게 카마 데비아스가 두 손을 다시 뻗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이전만큼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던 탓에 구천검령의 제압에 실패한 것이다.
겨우 잡아 두었던 거대한 두 자루 검마저 다시 쾌속하게 움직였다.
쓰아아아―!
최후를 직감한 카마 데비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을 기다리는 카마 데비아스의 귓가로 엘리오 라고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쪽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기회를 줄까 하는데, 어때?”
카마 데비아스가 천천히 눈을 뗐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거대한 세 자루 검은 보이지 않았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직 인간의 의도를 알지 못한 카마 데비아스는 섣불리 답하지 않았다.
역시나 이어지는 엘리오 라고아의 말은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좋아하지는 마. 살려 주겠다는 소리가 아니니까.”
“뻔뻔하군. 그러고도 기회라고 말할 수 있나?”
“그쪽이 죽음을 흔쾌히 받아들이게끔 해 주겠다는 소리야. 분한 마음으로 죽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낫지 않겠어?”
“내가 죽음을 흔쾌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나?”
“오늘 보여 준 그쪽의 모습이 진짜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해.”
엘리오 라고아의 진심 어린 눈빛을 본 카마 데비아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군. 좋다.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마. 내가 기쁜 마음으로 죽을 수 있게 만들어 보아라.”
카마 데비아스가 저항하지 않겠다는 듯 두 손을 축 늘어트렸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카마 데비아스와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카마 데비아스에게 한 말의 뜻을 두고 고민했지만, 솔직히 짐작도 가지 않았다.
태양신 카마 데비아스가 죽음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해 주겠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