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04
1204회. 고요한 어둠의 신령스러운 주문[靑冥神呪]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다가간 파비안이 속삭이듯 물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제 생각해 보려고.”
예상 밖의 말에 카마 데비아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기다리다 지친 내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그렇게 단순 무식한 사람인 줄 알아? 나 그런 사람 아니야.”
“그렇다면 빨리 방법을 생각해 내거라.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흔쾌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구나.”
“알았으니까 보채지 마.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니까.”
엘리오는 팔짱까지 끼고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은 호위하듯 엘리오의 좌우편에 섰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엘리오는 그럴듯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갔다.
마침내 하늘이 어둠에 잠겼다.
하릴없이 바닥에 앉아 있던 카마 데비아스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어둠 속에 있던 천공성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어둠이 물러가자 칙칙하던 내성 앞마당 분위기도 조금 쾌적해졌다.
우두커니 앉아 있던 카마 데비아스가 엘리오 라고아를 힐끔 보았다.
지금까지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그냥 해 본 말은 아닌 것 같다.
‘정말 내가 흔쾌히 죽음을 맞이할 방법이 있다고?’
고뇌에 찬 그를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그때 문득 인간들의 ―집요하기까지 하던― 질문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희는 북부의 히르헤라에서 흑마법사를 조종한 인물을 쫓고 있습니다. 마그눔 오프스로 알려진 그는 흑마법사들에게 천공성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카마 데비아스께서 그 마그눔 오프스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인간들은 처음부터 자신이 마그눔 오프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 했다.
하는 짓이 가소로워서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북부에서 벌인 마그눔 오프스의 짓을 생각하면 확실히 그는 죽어 마땅한 자다.
마나 프트라스가 세운 스쿠툼(빙벽)을 파괴했다는 것은 즉, 인간 세계를 고대의 암흑시대로 되돌리겠다는 시도인 까닭이다.
카마 데비아스가 가까이 있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물었다.
“인간이여, 너는 흑마법사들의 말을 믿느냐?”
“모든 것은 아니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
“천공성은 라고아 경이 찾기 전까지 그 실체마저도 불분명한 곳이었습니다. 흑마법사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즉흥적으로 입에 올릴 만한 단어가 아닙니다. 마그눔 오프스에게는 당연한 일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인간에게 너무도 의외의 장소라 오히려 믿음이 갔다는 소리구나?”
“그렇습니다. 천공성을 입에 올린 것은 마그눔 오프스의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수천 년간 인간이 찾지 못했으니 안심했을 겁니다. 라고아 경이 아니었다면 모든 게 그의 뜻대로 되었겠지요.”
“하지만 천공성이 부유한 이래 이곳을 찾아온 인간은 너희가 처음이다. 그것은 나의 신성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꼬르륵.
파비안의 배에서 엄숙한 분위기를 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라고아 백작님, 저녁 식사는 어떻게…….”
라르바 오마르 백작도 엘리오 라고아 백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장 천공성을 떠날 게 아니라면 뭐라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엘리오가 마하담(공간 창고)에서 에너지 볼 한 주먹을 꺼내 파비안에게 건넸다.
“이게 언제 적 에너지 볼입니까? 상하지 않았을까요?”
“마하담은 시간이 멈춘 곳이라 괜찮아. 아무렴 내가 상한 걸 먹자고 꺼냈겠냐?”
“아, 예. 그런데 언제까지 이곳에 계실 겁니까?”
“좋은 생각이 날 때까지.”
“기약이 없다는 말씀이시네요?”
“어, 왜? 셀리 양과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했어?”
“제가 셀리는 왜 만납니까?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겁니다.”
“그래, 아무 여자에게나 껄떡대지 마. 세나 경 잃기 싫으면.”
“아, 진짜 그만 좀 하십쇼. 세나 경의 오빠래도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내가 세나 경 오빠면 네 다리는 벌써 여러 번 부러졌지.”
엘리오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자 파비안은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는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세 개의 에너지 볼을 건넨 뒤 카마 데비아스를 힐끔 보았다.
“신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
“아, 예.”
파비안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에너지 볼을 입에 털어 넣고 씹었다.
에너지 볼 특유의 달착지근 하면서도 텁텁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하아! 여기까지 와서 에너지 볼을 먹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러자 엘리오가 에너지 볼을 씹으며 말했다.
“먹을 게 있다는 것에 감사해라. 이거라도 없었으면 쫄쫄 굶었을 테니까.”
“이런 걸 먹는 사람은 북부의 기사들밖에 없을 겁니다.”
“내 고향의 에너지 볼은 이보다 맛과 질이 떨어진다. 그래도 없어서 못 먹는다.”
“설마요.”
파비안이 황당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에너지 볼은 버리는 음식 재료를 가지고 만드는데 없어서 못 먹다니?
“진짜라니까.”
엘리오가 눈을 부라렸다.
오룡궁에서 수련하던 때 먹었던 벽곡단에 비하면 에너지 볼은 훌륭한 음식이었다.
그러다 문득 적선 수행 하던 날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만 그때 태청도관의 능지 선인도 자기가 한 일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퇴마의식을 하던 능지 선인은 삼청전에서 경을 외웠는데, 눈 떠 보니 자소각에 있었다고 했다. 그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난동을 부렸다고 하던가.
그가 그렇게 된 배후에는 귀신이 아닌 수라마존이 있었지만, 중요한 건 그가 끝까지 자신이 벌인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엘리오는 카마 데비아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리오 라고아와 눈이 마주치자 카마 데비아스가 물었다.
“생각이 났느냐?”
“어.”
순간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도 하던 동작을 멈추고 엘리오를 주목했다.
정말 태양신이 흔쾌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말해 보거라.”
카마 데비아스는 마치 남의 일을 구경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내 생각에는 말이지. 그쪽의 몸속에 뒤틀린 욕망이 숨어 있는 것 같아.”
“그건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구나.”
“물론 이게 다가 아니야. 마그눔 오프스는 천공성으로 간다고 했는데, 그쪽은 우리가 인간들 중에 천공성을 찾아온 최초의 사람이라고 했지. 그건 사실일 거야. 왜냐? 마그눔 오프스는 인간이 아니니까.”
“…….”
카마 데비아스가 눈을 찌푸렸다.
또 마그눔 오프스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누군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듣기만 해도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때 파비안이 불쑥 끼어들었다.
“라고아 백작님, 마그눔 오프스가 인간이 아니면 누굽니까?”
“내 생각에 마그눔 오프스는 카마 데비아스 같아. 틀림없이 그럴 거야.”
그러자 카마 데비아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마그눔 오프스가 아니며, 그자가 한 짓도 너희에게 들었다.”
“아니시라는데요?”
파비안이 힐난의 눈초리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쏘아보았다.
“고향에서 자기가 한 짓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수도자를 만나 본 적이 있다. 그는 귀신에 들리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한 일을 알지 못했지.”
카마 데비아스가 황당한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를 보았다.
“태양신인 나를 인간과 같다고 생각하느냐?”
“천만에. 그쪽은 태양신이지만, 뒤틀린 욕망도 평범한 존재는 아니었거든. 뒤틀린 욕망도 다른 세계에서는 신으로 군림했다고. 그러니 가능한 이야기라고 보는데.”
그 말에는 카마 데비아스도 반박하지 못했다.
뒤틀린 욕망이 신적 존재라면 못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추론인지라 한마디 툭 내뱉었다.
“이제는 나를 미친 신으로 만들어 버리는군.”
하지만 엘리오는 물러서지 않았다.
“말했잖아. 수도자가 귀신 들린 게 아니었다고. 미치지 않고도 얼마든지 본체를 장악할 수가 있더라고.”
“그러니까 네 말은, 뒤틀린 욕망이 내 몸을 장악해서 마그눔 오프스 행세를 했다는 것이냐?”
“맞아. 어차피 그쪽은 기억하지 못하니까. 천공성에 달력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그쪽은 시간이 지난 줄도 모르고 지내 왔겠지.”
“끙! 네 말대로 그렇게 됐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너의 추측일 뿐이잖느냐? 내가 천공성 밖으로 나갔었다는 증거가 있느냐?”
“증거라면 그쪽의 감추어진 기억 속에 있겠지.”
“그런 추측만으로는 흔쾌히 나의 죽음에 동의할 수 없다.”
“알아.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 내가 ‘고요한 어둠의 신령스러운 주문[靑冥神呪]’을 가르쳐 줄게.”
“고요한 어둠의 신령스러운 주문?”
“그쪽의 마음을 나에게 의탁하는 주문이야. 이걸 외우면 그쪽이 몸을 빼앗기더라도, 내가 그쪽이 기억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어.”
카마 데비아스는 단번에 엘리오 라고아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내 정신의 주도권을 너에게 넘기는 주문인 모양이군.”
“맞아. 고약한 주문이지. 엉뚱한 곳에 쓰면 큰일이 날 거야.”
사실 청명신주는 ‘왕들의 하늘’에서 광명진천이 엘리오의 정신을 장악하기 위해 가르쳐 준 사악한 기술이었다.
“허락하겠다.”
카마 데비아스는 선선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싸움에 패한 순간 이미 죽은 목숨인데 까짓 정신을 못 줄까.
엘리오는 전음으로 카마 데비아스에게 청명신주를 알려 주었다.
카마 데비아스는 태양신답게 엘리오 라고아가 알려 주는 ‘고요한 어둠의 신령스러운 주문’을 단숨에 외웠다.
광명진천은 엘리오에게 엿새를 암송하라 했지만 카마 데비아스는 단 한 번의 암송만으로 지극한 경지에 도달했다.
곧이어 엘리오와 카마 데비아스 사이에 묘한 친밀감이 형성됐다.
마치 혈육과 같은 관계라고나 할까?
본래 청명신주는 사악한 주문이지만 엘리오가 가진 측은지심으로 그렇게 변모한 것이다.
자연히 카마 데비아스를 보는 엘리오의 눈빛이 변했다.
그것은 측은지심이나 연민보다 더 강렬하고 끈끈한 정이었다.
엘리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시종일관 무덤덤하던 카마 데비아스의 눈에 따스한 감정이 깃들었다.
이윽고 카마 데비아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엘리오 라고아, 너는 정말 신기한 인간이구나. 하지만 아직 흔쾌히 죽을 정도는 아니다.”
“걱정하지 마.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오가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좀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이제 곧 마그눔 오프스를 불러낼 생각이거든요.”
그 말에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은 황급히 카마 데비아스와 거리를 벌렸다.
카마 데비아스의 앞에 우뚝 선 엘리오가 언법(言法)을 사용해 크게 외쳤다.
“빈 들판의 아들(공야자)과 늙지 않는 푸름(청불노)의 제자, 남쪽 하늘 연못(연남천)의 이름으로 명한다. 카마 데비아스의 속에 잠들어 있는 마그눔 오프스여! 깨어나 모습을 드러내라!”
휘이이잉―.
어디선가 불어온 겨울바람이 천공성 안뜰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