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55
1255회. 사람은 혼자서 못 삽니다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사제인 하미쉬와 시쉬트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웃었다.
두 여사제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이시카로 가는 길이 위험천만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들의 옆에 그랜드 마스터인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포효가 들렸다.
평소 같으면 소리의 실체를 추측하느라 바빴겠지만 두 여사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파비안과 노닥거리던 엘리오가 문득 여사제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사제님, 신탁을 받았다고 했잖아요? 그럼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의 얼굴도 봤나요?”
잠시 그날의 일을 회상하던 하미쉬가 시쉬트에게 물었다.
“백작님이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의 얼굴을 보았느냐고 묻는구나. 너는 보았느냐?”
“네, 성화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우셨어요. 성화는 그분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십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했어요.”
하미쉬가 뒤쪽을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답니다.”
“하미쉬 사제님은 못 보셨어요?”
“저는 십 년도 전의 일이라 성화를 보면서 기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이번에도 신탁을 받았잖아요.”
“시쉬트 사제가 주로 받았고 저는 살짝 곁들인 정도라서요. 얼굴을 바라볼 겨를이 없었답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기억이 나겠죠?”
“당연하지요. 지금도 성화를 볼 때면 아련하게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의 얼굴이 떠오르는걸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세요?”
“신의 얼굴이라니 궁금해서요.”
그러자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시쉬트가 끼어들었다.
“사제들이 신과 만났다고 하면 많이들 놀라시더라고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어떻게 만나냐?’고 의심하는 사람도 많아요.”
“아, 저는 의심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실은 저도 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말에 두 여사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로 고개를 돌렸다.
인간이 신을 만났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수천 명이나 되는 신전의 사제들 중에서도 한두 명만 그런 축복을 받는다.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의 사도이니 샤스트라 파라크티님을 만난 것일까?
젊은 시쉬트 사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물었다.
“백작님께서 어떤 신을 만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구천현녀를 말하려던 엘리오는 설명하기가 난감해 태양신을 팔기로 했다.
“태양신이라 불리는 카마 데비아스요.”
“어머! 그분은 정말 성화처럼 생기셨던가요?”
“제가 성화를 안 봐서, 파비안, 태양신의 성화를 본 적 있냐?”
“북부인들은 마나 프트라스 외에는 잘 모릅니다.”
“성화를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잘생기긴 했더라고요.”
“그분과는 어떤 대화를 나누셨나요?”
시쉬트는 사제답게 태양신의 외형보다 내면에 관심을 보였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요.”
엘리오는 대충 얼버무렸다.
실제로 태양신보다 그 속에 깃든 천자마와 더 많은 대화를 해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시쉬트는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대답을 꺼려 하자 더 묻지 않았다.
갈수록 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마치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난 것처럼 도로는 풀에 뒤덮여 있었다.
풀 더미를 넘을 때마다 마차는 ‘덜컹’거렸고, 도로로 침범한 나뭇가지가 마차에 부딪칠 때마다 연신 ‘드드득!’ 소리가 났다.
그래도 워낙 도로 폭이 넓었던 탓에 마차가 다니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정오를 넘겨 마차는 하늘이 보이는 곳에 잠시 멈춰 섰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기 위해서다.
두 명의 마부가 부지런히 주변을 돌아다니며 요리 준비를 했다.
이윽고 성기사들과 사제, 엘리오 일행까지 여덟 명이 한곳에 모여 요리를 나눠 먹었다.
사제들이 변변찮은 음식에 미안해했지만 엘리오는 만족했다.
정체불명의 요리가 히르헤라에서 챙겨 온 ‘에너지 볼’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식사 후 사제들은 엘리오 일행에게 ―샤스트라 파라크티 신전의 사제들이 즐겨 마시는― 차를 대접했다.
엘리오는 사제들이 준 차가 강호에서 마시던 것과 비슷해서 속으로 깜짝 놀랐다.
차를 마시는 귀족들을 보며 하미쉬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신전의 차가 입맛에 맞는지 모르겠네요.”
말과 함께 그녀는 귀족들의 안색을 살폈다.
신전의 차는 제국 귀족들도 접하기 어려운 것이라 북부의 귀족들에게 맞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역시나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은 ‘이게 뭐지?’ 하는 얼굴이다.
그때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깊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좋네요. 고향에서 마시던 차맛과 비슷해서 마음에 듭니다.”
“그러시군요. 입맛에 맞으신다면 한 상자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신전의 차는 돈 주고도 구할 수 없으니 큰 선물이었다.
“감사합니다. 언제라도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별말씀을요.”
하미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작 신전의 차 한 상자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관계를 맺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차를 마신 뒤 사제와 성기사, 엘리오 일행은 다시 마차로 돌아갔다.
한 시간쯤 달리자 도로변에 ‘이시카’라는 낡은 이정표가 나타났다.
그때부터 야수가 도로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마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기사들이 마부석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부분의 야수들은 마차를 피했지만, 어쩌다 성질 고약한 놈들은 마부석을 덮쳤다.
그럴 때마다 성기사들이 칼집째 롱소드를 휘둘러 야수들을 떨쳐 냈다.
어떤 야수들은 마차를 몸통으로 들이박거나, 발톱 세운 앞발을 창문으로 넣기도 했다.
창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엘리오와 파비안은 그럴 때마다 롱소드로 야수의 앞발을 밀쳐 냈다.
칼집째로 야수의 앞발을 찍어 내던 파비안이 탄성을 내질렀다.
“야아, 이거 완전 야수 밭인데요?”
“그러게. 사람이 떠난 자리를 야수가 차지한 모양이네.”
“사람이 다시 들어가 자리 잡기 어렵겠는데요? 페로무로스처럼 강철 벽이라도 세운다면 모를까? 어디 무서워서 살겠습니까?”
“그래도 사람이 떠나니까 나무와 풀 무성한 거 봐라.”
“그러게요. 이 정도면 그냥 미개척지입니다. 대수림에 접했다고 하더니 지독하네요. 대수림은 이보다 더할 거 아닙니까?”
뒤늦게 대수림의 위험을 떠올린 파비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남부 왕국이 제국의 모험가와 용병을 막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엘리오는 혀를 내둘렀다.
대수림에 인접해도 이 정도인데 어비스는 오죽할까!
“아직은 야수밖에 없어서 다행입니다. 여기에 마수라도 출현하면 진짜 골치 아프겠습니다.”
파비안의 말에 시쉬트 사제가 설명하듯 말했다.
“마수는 좀처럼 대수림을 벗어나지 않아요. 마수들이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면 인간의 군대가 토벌에 나설 수도 있거든요.”
“그 정도로 머리가 좋습니까?”
“지능이 뛰어난 마수는 사람만큼이나 머리를 잘 쓴답니다.”
“하기야.”
파비안은 타메이온에서 만났던 마수들을 떠올렸다.
마수든 마물이든 상위 개체로 올라갈수록 머리가 좋았다.
심지어 어떤 마물들은 언어를 사용해 의사소통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성기사 세 분만으로 이시카의 신전에 가는 건 위험하지 않습니까?”
“이시카가 버려진 도시지만 대수림과는 거리가 있어서 괜찮아요. 성기사님들이 마수는 몇 마리가 덤벼도 상대할 수 있거든요.”
“마물은요?”
“마물은 대수림을 벗어나지 않으니 괜찮아요. 지금까지 이시카에서 마물을 목격한 사람은 없어요. 그랬다면 더 많은 성기사들과 움직였을 거예요.”
“아하.”
파비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몰려든 야수를 보고 사제들이 위험하다 생각했는데, 자신이 어리석었다.
같은 소드 익스퍼트라도 성기사가 훨씬 강하다.
그런 성기사가 셋이나 있으니 소드마스터와 동행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정도 전력이면 마수가 아니라 마물이 와도 물리칠 수 있을 터였다.
이시카에 가까울수록 도로 사정은 더 나빴다.
이전까지 도로 뒤에 깔린 판석 틈새로 자라던 풀이 문제였다면, 이시카부터는 나무뿌리가 판석을 집어삼킨 곳이 많았다.
나무뿌리로 도로가 파손된 탓에 마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했다.
굶주린 야수들의 출현이 더욱 빈번해졌다.
사두마차 두 대가 만들어 내는 소음에 이시카의 야수들이 죄다 몰려온 것 같았다.
그래도 마부석의 성기사들은 엘리오 일행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사실 소드 익스퍼트들에게 야수를 상대하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에 불과하다.
하물며 신의 축복까지 받은 성기사들에게 야수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야수의 숫자가 비약적으로 늘어나자 성기사들은 칼집에서 롱소드를 뽑았다.
지금까지처럼 칼집째 휘둘러 살상을 피하면 좋겠지만, 겁먹은 네 마리 말과 마부를 보호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 시간 후.
두 대의 신전 마차가 오래전 야수들에게 점령당한 이시카로 진입했다.
도시를 잇는 도로보다 도시의 상황이 더 좋았다.
풀숲에 둘러싸인 외부 도로와 달리 도시 내부가 건축물과 판석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가꾸지 않은 정원과 가까운 숲에서 뻗어 나온 뿌리와 줄기에 점령당한 곳을 제외하면, 도시 내부의 상황은 양호한 편이었다.
따각. 따각.
드드드드―!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조용한 도시에 울려 퍼졌다.
창밖으로 몰락한 도시를 구경하던 엘리오가 중얼거렸다.
“와, 나 이런 거 처음 본다. 저게 다 빈집이라는 거잖아?”
파비안이 엘리오 쪽으로 난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보며 말했다.
“왜요? 아까우십니까?”
“저렇게 큰 건물을 버리고 떠나다니……. 나라면 절대 못 그럴 거 같은데.”
“사람은 혼자서 못 삽니다. 남들 다 떠나면 어쩔 수 없이 떠나야죠. 라고아 경도 말만 그렇게 하시지, 막상 닥치면 떠날 겁니다.”
“저 건물이 내 거면 난 절대 안 떠난대도. 저걸 어떻게 버리고 가냐?”
“아무도 살지 않는 도시에 혼자 남아 뭐하시게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건축물도 그냥 똥이나 마찬가지라니까요.”
“사람들이 이걸 왜 다 버리고 떠났지? 이해가 안 되네.”
“고집부리지 마십쇼. 못 살겠으니 떠났겠죠. 살만 한데 떠났겠습니까?”
어딘지 시큰둥한 파비안의 말에 엘리오는 반박하지 못했다.
맞다.
이거 저거 다 떠나서 살 수 없으니 떠난 것이리라.
한두 사람도 아니고 한 도시가 사라질 정도면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터였다.
마차는 이시카의 중심부로 계속 나아갔다.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신전이 이시카 중심부에 있었던 모양이다.
‘응?’
이시카의 중심으로 갈수록 엘리오는 묘하게 가슴이 설렜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전신으로 휘몰아쳐 왔다.
가슴이 먹먹하고,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깜짝 놀란 엘리오는 암암리에 구천여일진경(九天如一眞經)의 구결을 되뇌었다.
자신도 모르게 수면제나, 미약, 혹은 그 비슷한 뭔가에 노출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단전에서 일어난 구천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을 한 바퀴 돌았다.
그제야 널뛰던 가슴이 진정됐다.
조심스럽게 도로를 달리던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멈춰 섰다.
엘리오는 마차에서 내리기에 앞서 창문으로 잊혀진 신전을 살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크룰리에서 보았던 마나 프트라스의 신전과 비슷했다.
차이점이라면 신전 주변 바닥에 깔린 기하학적인 문양의 석판과 ―과거에는 아름다웠을― 연못이다.
파란 하늘이 담긴 연못은 마치 타원형 거울을 바닥에 눕혀 놓은 것 같았다.
신전이라 그런지 하미쉬 사제와 시쉬트 사제가 누구보다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리려던 엘리오는 또다시 밀려오는 기이한 감정에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