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58
1258회. 주의를 주어야 할까요?
넋 나간 얼굴로 남궁연의 말을 듣던 연적하가 확인하듯 물었다.
“누님이 강물이라면 샤스트라 파라크티는 바다 같은 거네요? 강물의 기억까지도 집어삼키는 바다. 맞죠?”
“그래.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슬퍼하지도, 노여워하지도 마. 나는 잠시나마 우리가 함께할 수 있게 해 준 걸 감사하고 있어. 샤스트라 파라크티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야.”
연적하는 속으로 ‘나는 고맙지 않다’고 했다.
그거야말로 병 주고 약 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약도 어디 그냥 약인가?
남궁연으로 살아갈 시간이 정해져 있는, 그야말로 극약과도 같았다.
“돌이킬 수 없는 거죠?”
“응.”
“알았어요. 남은 일 년을 알차게 살아 보자고요. 이곳에서의 일 년이 강호에서 수십 년 산 세월과 같으니 손해는 아닐 거예요.”
단순히 시간만 비교하면 틀린 말도 아닌지라 남궁연은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너를 찾아오기를 백번 잘한 것 같다.”
지안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남궁연은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연적하가 남궁연에게 반지를 건넸다.
“참, 이 아티팩트는 이제 누님에게 필요할 것 같네요. 저는 어느 정도 말이 통해서.”
“그래, 고마워. 잘 쓸게.”
남궁연은 반지를 받자마자 손가락에 껴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걸 사용하려면 각인 과정을 거쳐야 해요. 나중에 마법사를 만나면 해 달라고 할게요.”
“각인은 없어도 될 거야. 그래도 신의 몸이잖아.”
그녀가 반지를 끼자 연적하는 대뜸 대륙 공용어로 말했다.
“누님 이름은 뭐로 할 거예요? 샤스트라 파라크티로 부르기는 좀 그렇잖아요?”
“루나 마일러스. 내 이름인 ‘남쪽 집 고운이’가 이세계 말로 루나 마일러스야. 어머, 이게 이런 식으로 통역이 되는구나! 재밌는 물건이네.”
“아티팩트는 이세계에서도 귀한 물건이에요. 저도 왕국의 궁정 마법사에게 선물로 받은 거예요. 이곳에서 제 이름은 엘리오 라고아예요.”
“엘리오 라고아. 좋은 느낌이다. 엘리오라고 부르면 되겠지? 너도 나를 루나라고 불러. 통역 아티팩트도 꼈겠다, 저 사람들과 인사할 시간이 온 것 같네.”
남궁연, 루나 마일러스가 신전 중앙에 서 있는 사제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적하는 둘만의 대화가 중단된 게 아쉬웠지만 남궁연의 말대로 이젠 현실로 돌아갈 때였다.
이윽고 엘리오와 루나 마일러스가 여사제들에게 다가갔다.
여사제들은 육화한 샤스트라 파라크티가 다가오자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신탁을 받은 하미쉬입니다.”
“시, 시쉬트예요.”
루나 마일러스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샤스트라 파라크티다. 하지만 그 이름으로 부르면 피곤해질 테지. 세상에 머무는 동안 나를 성녀 루나 마일러스라고 부르도록 해라.”
“예.”
하미쉬와 시쉬트의 머리가 더 아래로 내려갔다.
육화한 여신이 세상에 머무르겠다니!
대륙에 샤스트라 파라크티의 신전이 세워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하미쉬 사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신, 아니 성녀님. 앞으로의 계획을 여쭤봐도 될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이라면 대신전에는 언제쯤 방문하실지만이라도…….”
“엘리오의 모험에 동참할 생각이다. 대신전에는 방문할 생각이 없구나.”
“아, 예…….”
하미쉬는 감히 더 묻지 못했다.
잠시 후 성녀와 여사제들, 그리고 엘리오가 신전 밖으로 나갔다.
성기사들과 라르바 오마르 백작, 파비안이 의아한 눈으로 초월적인 미모의 여자를 힐끔거리자 하미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분은 샤스트라 파라크티 여신께서 임명하신 성녀, 루나 마일러스 님이십니다. 성기사들은 성녀님께 예의를 표하도록 하세요.”
사제의 말에 성기사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와서 인사를 올렸다.
“알메트 하레브입니다.”
“타메누크입니다.”
“셈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루나 마일러스의 시선이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파비안, 솔론 남작 일행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엘리오가 나섰다.
“성녀님, 이쪽은 제 일행입니다. 베일럼 왕국의 기사인 라르바 오마르 백작, 제 가신인 파비안 남작, 그리고 오가다 만나 지금은 저를 시중드는 솔론 남작, 나머지 두 사람은 솔론 남작과 함께 다니는 사람들이니 몰라도 됩니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간결한 소개가 끝나자 한 사람씩 성녀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숙였다.
“베일럼의 라르바 오마르 백작입니다.”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워드 솔론 남작입니다.”
타인록과 크레아는 감히 나서지 못하고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눈치만 살폈다.
루나 마일러스가 그런 두 사람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크레아입니다.”
“타인록입니다.”
마지막 소개까지 끝나자 루나 마일러스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샤스트라 파라크티 교단의 성녀 루나 마일러스예요. 여러분의 앞날에 행복한 일이 가득하길 바라요.”
그녀의 축사가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 머리 위로 신성력이 쏟아져 내렸다.
자잘한 내외상과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지고, 모두의 눈빛이 생기로 반짝였다.
처음으로 받아 본 성녀의 축복에 성기사와 사제 들은 감동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엘리오 일행과 솔론 남작 일행 역시 기적 같은 변화에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후 성기사들을 필두로 사람들은 다시 신전 입구로 이동했다.
성녀와 뒤처져 걷던 엘리오가 슬쩍 물었다.
“아까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아까 뭐?”
“누님, 아니, 성녀님이 인사를 하니까 갑자기 하늘에서 빛줄기가 쏟아져 내리더니, 여행으로 쌓여 있던 피로가 확 풀렸어요.”
“그랬어? 나는 그냥 좋은 말을 한 것뿐인데. 샤스트라 파라크티가 축복을 내렸나 보네.”
“성녀님이 한 게 아니라 샤스트라 파라크티가 한 일이었어요?”
“응. 나에게 그런 재주가 있겠니?”
“없죠. 신기한 몸이네요.”
엘리오가 루나 마일러스를 힐끔거렸다.
신이 인간 세상에 육화(肉化)한 것도 놀랍지만, 의도하지 않고도 신성력을 쏟아 내다니!
“왜 자꾸 봐?”
“보면 안 돼요?”
엘리오가 짓궂은 얼굴로 되묻자 루나 마일러스는 못 들은 척 시선을 돌렸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오묘하다.
루나 마일러스가 외면하자 엘리오는 괜히 더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앞서가던 시쉬트 사제가 하미쉬 사제에게 속삭였다.
“사제님, 백작님의 행동이 조금 지나친 것 같은데…… 주의를 주어야 할까요?”
성녀는 교단에서 신 다음으로 높은 자리다.
아무리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그랜드 마스터라 해도 성녀에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자 하미쉬 사제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성녀님의 신성력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성녀님이 싫었으면 진즉에 뭐라고 했을 거예요. 저건 두 분이……. 험, 험, 끼어들지 마세요.”
“설마? 헙!”
시쉬트 사제가 놀란 얼굴로 제 입을 막았다.
지금까지 신과 인간의 사랑은 신화와 전설 속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다.
하미쉬 사제의 말을 듣고 관찰해 보니 과연!
발갛게 상기된 성녀님의 표정은 사랑에 빠진 여자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 뒤로 시쉬트 사제는 의식적으로 성녀와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거리를 두었다.
***
버려진 고대 도시 이시카에서 여사제들과 성기사 둘(타메누크와 셈)은 북쪽으로, 성녀와 엘리오 일행은 남쪽으로 갈라졌다.
성기사들의 수장 알메트 하레브는 성녀를 따라갔다.
말로는 성녀를 호위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은 샤스트라 파라크티 교단의 연락책이었다.
그렇게 해서 어비스로 가는 엘리오 일행에 성녀와 성기사가 추가됐다.
여사제들이 떨어져 나간 뒤로 엘리오는 한층 더 노골적으로 루나 마일러스에게 지분거렸다.
그러나 루나 마일러스는 엘리오를 받아 주지 않았다.
항상 그와 함께 있었지만, 막상 엘리오가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슬그머니 회피했다.
여럿이 함께 있을 때는 물론이고, 어쩌다 둘만 따로 있을 때도 그랬다.
대수림 초입의 마을 리베라.
석양 무렵.
여덟 명의 남녀가 마을로 들어섰다.
이시카를 떠나 대수림으로 향하는 엘리오 일행이다.
한때 발전했던 도시 이시카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황폐해졌지만, 정작 인접한 대수림 초입의 마을은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리베라의 뜻은 ‘늑대잡이’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리베라 주민들은 대수림으로 가려고 모여든 모험가와 용병의 뒤치다꺼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활기찬 마을 모습에 파비안이 혀를 내둘렀다.
“와아! 사람 몇 없는 마을일 줄 알았는데, 과장 좀 보태서 제도 저리 가라네요!”
성녀와 성기사가 합류한 뒤 파비안은 솔론 남작과 크레아와 같이 다녔다.
같은 작위에, 나이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검술 경지마저도 막상막하라 서로 잘 맞았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은 성기사 알메트 하레브와 다녔다.
두 사람 다 근엄한 성격이다 보니 함께 다니는 게 편했던 것이다.
유독 타인록만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다녔다.
사실 야인 출신의 뛰어난 검사인 그에게 어울릴 만한 상대는 없었다.
솔론 남작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요. 이시카를 보고 난 뒤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이군요.”
그러자 크레아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대수림으로 가는 사람 참 많네요. 저들 중에 강도로 돌변할 사람들도 있겠죠?”
스탄 용병단에 크게 데인 그녀는 무심코 목 어림을 매만졌다.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흉터가 잠들어 있던 용병의 감각을 자극했다.
‘개자식들. 내 손으로 죽였어야 하는데.’
자신도 용병 출신이지만, 용병으로 보이는 사내들과 눈만 마주쳐도 이가 갈린다.
물물 교환과 판매로 시끌벅적하던 마을 중앙의 공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크레아만 해도 길을 가다가 한 번쯤 돌아볼 정도의 미녀인데, 루나 마일러스는 그야말로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존재다.
그렇지 않아도 아름다운 남궁연을 샤스트라 파라크티가 신성력으로 재창조한 터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몇몇 성질 급한 용병들이 성녀를 향해 몰려갔다.
영주가 없는 대수림은 약육강식의 세계라 그들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순간 성기사 알메트 하레브가 성녀의 앞을 막아서며 마나를 방출했다.
휘리리링―!
유형화된 마나의 바람이 흥분한 용병들을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상대가 강자임을 직감한 용병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멈춰 섰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제 손으로 찍어 먹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용병들 세계에서 ‘도살자’라 불리는 슈레이거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슈레이거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중년의 기사에게 다가갔다.
그의 목적은 간단했다.
시비를 일으켜 눈 돌아가게 아름다운 여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여자의 환심을 살 테고, 아니라도 손해 볼 일은 없다.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못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어이, 여기가 당신 땅도 아닌데 왜 길을 막고 있지?”
용병 티를 팍팍 내는 사내에게 성기사 알메트 하레브가 차분하게 말했다.
“길이 이렇게 넓은데 누가 막았다는 것인가? 그대로 가면 내가 섬기는 분과 부딪칠 수 있으니, 옆으로 돌아서 가라.”
“이런 씨벌! 당신 나 알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어디서 하라 마라 명령질이야?”
슈레이거가 언성을 높이자 흩어져 있던 그의 일행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