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82
1282회. 웨이브(Wave)
바탈리온 부대장 막사.
의자에 앉은 페론 칼라일 후작이 맞은편 빈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지.”
“예.”
바탈리온 부대장 크라노 바넥 자작이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 앉았다.
“황태자 전하께 들었다. 라티움 공국 출신이라고?”
“예.”
크라노 바넥 자작의 짧은 답변에 페론 칼라일 후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바넥 자작이 인간관계에 서투르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아랫사람이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이 그러고 있어서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황태자 전하의 눈에 들었지?’
대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하는 황태자를 생각하면 놀람을 넘어 불가사의할 정도다.
“황태자 전하와는 언제부터 알게 되었느냐? 아, 다른 뜻은 없다. 황태자 전하 주변 귀족들은 다 아는데 너는 본 적이 없어서.”
“두 달 전에 황태자 전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두 달?”
페론 칼라일 후작이 황당한 눈으로 바넥 자작을 보았다.
그러나 바넥 자작은 묻는 말에만 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캐묻기 전에는 답하지 않을 분위기다.
문득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는 황태자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인 것은 알아야지.’
정보 수집과 친분은 다르다.
조금 더 상대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페론 칼라일 후작이 다시 말했다.
“그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느냐?”
“주로 마탑의 의뢰를 받았습니다.”
“어느 마탑?”
“마탑과 관계된 것은 비밀 유지 맹약을 했기에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알고 계시느냐?”
“예.”
“흐음.”
페론 칼라일 후작이 애매한 눈으로 바넥 자작을 보았다.
몰락한 귀족이 마탑의 일을 돕는 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정도로 근본 없는 귀족에게 엑시티움을 맡기다니?
황태자의 선택이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남 일인 듯 무덤덤한 바넥 자작의 얼굴을 보니 은근 불쾌했다.
‘기사가 마법사와 비밀 유지 맹약까지 할 정도면 떳떳한 일은 아니었나 보군.’
마법사들은 자기들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한다.
선을 크게 넘으면 흑마법사가 되지만, 평범한 마법사도 인간성과는 담을 쌓고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마법사를 뱀이라고 부를까.
마법사와 비밀 유지 맹약까지 할 정도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으리라.
바넥 자작에 대한 관심을 미련 없이 털어 버린 페론 칼라일 후작은 몇 가지 당부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비스.
개척 지역 에브리마 평원.
정오경.
걸어가던 타인록에게 갑자기 측면에서 사자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순간 타인록은 멈칫거림 없이 자연스럽게 롱소드를 뽑아 휘둘렀다.
커어―!
비명과 함께 옆구리를 길게 베인 사자가 다시 덤벼들 것처럼 몸을 틀었다.
그러나 타인록이 빨랐다.
오히려 사자에게 성큼 다가간 그가 롱소드로 사자의 몸통을 찌른 것이다.
크헝―!
묵직한 비명과 함께 사자가 옆으로 넘어갔다.
심장이 찔렸는지 절명한 사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롱소드를 갈무리한 타인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걸어갔다.
메르데프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사자를 힐끔거렸다.
“왜 그러나?”
“가죽이라도 벗겨 가면 어떨까 싶어서요.”
“가죽을 짊어지고 갈 힘은 있고?”
“아…….”
타인록의 지적에 메르데프는 아쉬움을 떨쳐 냈다.
마차도 없는데 사자 가죽을 짊어지고 다닐 수는 없었다.
“용병들은 가죽을 챙기나?”
“당연하지요. 고기도 먹습니다.”
“고기는 괜찮겠군.”
타인록은 뒤늦게 고기 생각이 났는지 뒤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하워드 솔론 남작이 달라붙어 고기를 발라내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시킨 것 같았다.
메르데프와 타인록은 솔론 남작이 도축을 마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점심은 사자 고기 구이와 사자 고기로 끓인 스튜였다.
사자 한 마리에서 얻은 고기로 아홉 명이 배부르게 먹었다.
사람들은 툼스톤에서 구매한 식재료보다 싱싱한 사자 고기가 더 맛있다고 호평했다.
“라고아 경은 어떠셨습니까? 입맛에 좀 맞으셨습니까?”
파비안의 물음에 엘리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괜찮았어. 씹는 맛이 있더라.”
“사자를 좀 사냥할까요?”
“그럴 시간 없다. 아까처럼 덤비는 것들이나 잡으면서 가자.”
“식재료는 많이 남았습니까?”
식재료가 부족하다면 바로 사자 사냥을 가자고 할 기세다.
“내가 부족하게 챙기는 거 봤냐?”
“아뇨.”
“어비스에서 반년은 먹고살 수 있으니까 안심해라.”
“하아! 라고아 경은 준비성이 좋아도 너무 좋은 게 문젭니다.”
파비안은 사자 사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엘리오를 탓했다.
“내 준비성 아니었으면 너는 진즉에 굶어 죽었어. 어디서 감사는 못 하고 지적질이야.”
“물론 감사는 하는데, 앞으로는 현지 조달도 좀 생각하십쇼. 사자 고기 맛있게 드셨잖습니까. 매일 같은 음식만 먹으니까 좀 물려서 그럽니다.”
“응, 알았어. 너는 물린다니까 빼 줄게. 현지 조달해서 먹어.”
“아닙니다. 제가 배가 불러서 말이 헛 나왔습니다. 용서해 주십쇼.”
파비안은 버티지 못하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엘리오 일행이 다시 움직이기 위해 자리를 정리할 때다.
좌측에서 일단의 무리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일곱 대의 마차와 삼십여 명의 무장한 남녀. 중형급 모험가 집단이나 용병단이다.
잠시 후 마차와 삼십여 명의 남녀가 엘리오 일행 앞에서 멈춰 섰다.
곧이어 선두에 있던 남자와 여자가 엘리오 일행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사십 대 남자가 먼저 엘리오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자기소개도 아닌 그저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에 파비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비스가 아니더라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곳에서 타인에게 다가갈 때면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예의였다.
파비안이 그의 앞으로 다가가며 화답했다.
“안녕하십니까.”
파비안의 즉각적인 반응에 사십 대 남자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사십 대 남자, 티토는 망하기 일보 직전인 그룹과 교류할 마음이 없었다.
“페트라 산을 넘어오는 마물이 늘어났습니다. 본격적인 웨이브(Wave)의 전조 현상인데, 동쪽으로 피신하든지, 하루라도 빨리 엑소도로 가는 게 좋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쪽은 안 피합니까?”
그러자 티토와 함께 온 이십 대 여자, 일루나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우리 용병단은 마물을 잡기 위해 잠깐 에브리마 평원으로 나온 거예요. 아드리아 왕국의 마물 퇴치 의뢰를 받았거든요.”
“그런 의뢰도 있습니까?”
“후후, 어비스에 처음이신가 봐요?”
파비안은 허우대가 멀쩡한 기사라 평소 아가씨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미련 없이 돌아선 티토와 달리 일루나는 파비안과의 대화를 이어 갔다.
“예.”
“아드리아 왕국의 광산에 모여든 마물들을 우리가 에브리마 평원으로…….”
순간 티토가 그녀를 나무랐다.
“일루나, 말이 많구나.”
“아…….”
뒤늦게 일루나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곧이어 티토와 일루나가 일행에게 돌아갔다.
이윽고 마차와 용병단이 멀어져 가자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말했다.
“웨이브가 마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소리지?”
“예, 미개척 지대에서 페트라 산으로 마물들이 많이 넘어온 모양입니다. 그중에 한 무리가 아드리아 왕국의 광산에 접근했고, 그 마물들을 저 용병단이 에브리마 평원으로 유인했다는 소리 같습니다.”
“에브리마 평원에 있는 사람들은 어쩌라고?”
“잡으라는 거죠.”
“그래도 돼?”
파비안이 대답을 망설이자 메르데프가 슬쩍 끼어들었다.
“누가 알면 욕먹을 짓이긴 하지만……. 어차피 마물들은 페트라 산을 지나 에브리마 평원까지 진출하니까요. 에브리마 평원이 마물들의 종착지라 다들 신경 안 씁니다.”
“어쨌든 저 용병단은 나만 안 죽으면 된다는 심보네?”
“이곳에서는 다 저렇습니다. 그래도 워낙 모험가와 용병 들이 많아서……. 어지간한 건 다 잡습니다.”
“숫자가 적으면 못 잡잖아.”
“그런 사람들은 동쪽으로 피신을 갑니다. 거기서 새로 모임을 조직해 다시 중앙으로 진출하고……. 그걸 죽을 때까지 반복합니다.”
“힘들게 사네들.”
“그래도 땅바닥에 황금이 널려 있는 거 보셨잖습니까? 바깥세상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죠. 인생 역전의 기회가 어비스에 있어서 나가질 못합니다.”
“저 용병들은 마물을 평원에 떨궈 놓고 페트라 산으로 돌아가겠네?”
“그럴 겁니다.”
“대단하다.”
엘리오는 용병단의 잔머리에 혀를 내둘렀다.
엘리오가 더 묻지 않자 메르데프와 타인록은 다시 선두로 나섰다.
묵묵히 걷던 엘리오가 문득 루나 마일러스에게 말했다.
“누님은 절대 신성력 쓰지 마세요.”
“응?”
“마물과 싸우다 누가 다쳐도 절대 신성력을 쓰면 안 돼요. 그냥 약 발라서 치료하게 두세요.”
“그럴게.”
“내가 조금 다쳐도 그냥 둬요. 금방 나을 테니까. 알았죠?”
“그래, 꼭 그렇게 할게. 걱정하지 마.”
루나 마일러스 역시 신성력의 부작용을 알기에 쓸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생각하는 것조차 단순하게 하려고 노력 중이다.
왠지 초월적인 지능이 여신과의 합일을 가속화하는 것 같아서다.
그녀는 엘리오가 우샤스 운드라를 찾을 때까지 만이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엘리오 일행은 방향 수정 없이 서북쪽을 향해 계속 전진했다.
그 과정에서 피신하는 모험가와 용병 들을 많이 만났다.
웨이브라고 하더니 에브리마 평원 전체가 휩쓸린 것 같았다.
동쪽으로 피신하는 모험가와 용병 들은 대부분 소수였기에 엘리오 일행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엘리오 일행은 아홉 명에 불과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타인록의 거대한 덩치와 평균을 넘어선 라르바 오마르 백작의 떡 벌어진 체구, 거기에 성기사 알메트 하레브의 범접하기 어려운 기도까지!
그 세 사람을 보면 아름다운 미녀들로 달아올랐던 마음도 순식간에 식었다.
하지만 그건 피신할 정도로 세력이 약한 모험가와 용병 들에게나 통했다.
“멈추시오!”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 셋이 엘리오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엘리오 일행이 하나 둘 세 사내의 앞에 모여들었다.
사내 중 하나가 턱을 빳빳히 세우고 말했다.
“웨이브가 시작됐소! 이곳은 우리 델리카탈룸 용병단이 지키고 있소. 마물을 퇴치할 때까지 우리의 보호를 받으시오.”
사내가 점령군 행세를 하자 파비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그쪽 용병단의 보호를 받지 않겠다면 어쩔 거요?”
“원활한 마물 퇴치를 위해 임시로 당신들을 구금해 둘 것이오.”
“아니, 웨이브 앞에서 힘을 합쳐 싸우자는 게 아니라 구금한다고? 그게 무슨 헛소리요? 당신들 용병단에 모험가를 구금할 권리가 있소?”
그러자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권리? 어비스에서는 힘이 곧 법임을 모르느냐? 우리가 보호해 줄 테니 너희는 얌전히 보호를 받으면 된다. 거절은 없다.”
말과 함께 사내가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자, 사십여 명의 용병들이 엘리오 일행을 둥그렇게 에워쌌다.
파비안이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리를 보호해 주겠다는 거야? 강도질을 하겠다는 거야?”
그러자 사내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지시에 순순히 따르면 보호해 주겠지만, 저항하면 광산에 노예로 팔아 버릴 것이다. 선택해라. 보호를 받겠느냐? 노예가 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