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97
1297회. 꿈을 꾸는 것 같아
날이 밝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하워드 솔론 남작과 크레아, 타인록이 천막 정리에 나섰다.
파비안도 이른바 ‘바윗길 장원[石徑莊]’의 일원이라는 연대 의식 때문인지 구경만 하지 않고 슬그머니 정리를 거들었다.
엘리오가 정리된 천막과 간이 침상 등을 마하담(공간 창고)에 넣으며 말했다.
“파비안 철들었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키지 않은 일을 하니 하는 말이다. 정리 정돈이 네 담당은 아니잖아.”
“같은 바윗길 장원 식구로서 거들어 준 겁니다. 형님 아우 하면서 남들 일하는 거 구경만 하는 것도 꼴불견이니까요.”
“나 욕하는 거 아니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스승에게 일을 시키는 제자들은 없습니다.”
“야아! 너 사람이 달라 보인다. ‘철들자 망령’이라는 말이 있는데……. 망령 안 들려면 머리 많이 써야겠다.”
“악담하지 마십쇼.”
“악담은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 같은 거지. ‘철들자 망령’은 속담이야.”
“그런 속담 들어 본 적 없습니다.”
“어, 우리 고향에 있어.”
“라고아 경의 고향은 대체 어떤 곳입니까?”
“무슨 소리야?”
“가끔씩 말씀하시는 거 보면 좀 별로인 것 같아서요.”
“사람 사는 곳이야 어디든 비슷하지. 이곳과 별로 다를 것도 없어.”
“이곳에는 라고아 경이 말씀하신 그런 악의가 담긴 속담은 없습니다.”
“그게 왜 악의야? 상대방이 망령 들까 봐 걱정해 주는 거지.”
“듣는 입장에서 조롱과 비꼼이 느껴집니다.”
“그건 네 속이 꼬여서 그런 거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숙영지 정리가 끝났다.
짐을 마하담에 담자마자 엘리오는 미련 없이 루나 마일러스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런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행동에 파비안이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아니 멀쩡한 사람 속을 왜 꼬였다고 하시지?”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크레아가 한마디 했다.
“그 괴상한 속담에 관해서는 저도 오라버니 편이에요. 라고아 백작님의 고향이 좀 무서운 곳인가 봐요.”
“그렇지? 뭔가 묘하게 사람을 비꼬는 속담이라니까. 그런데 그걸 걱정해 주는 거란다.”
“절대 아니죠.”
공감 능력이 뛰어난 크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그건 걱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크레아에 이어 하워드 솔론 남작까지 대화에 끼어들자 엘리오가 소리쳤다.
“파비안! 출발 안 하고 뭐 해! 여기서 점심까지 먹으려고 그래? 도로 자리 펼까?”
“아닙니다! 갑니다! 가요! 하여튼 본인이 불리한 것 같으면 말도 못 하게 하신다니까.”
이윽고 타인록과 파비안이 걸음을 빨리해 선두로 치고 나갔다.
산을 내려가는 곳곳에 광산이 있었다.
산 윗부분은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폐쇄된 광산이 많았다.
폐쇄된 광산 대부분은 무엇에 의해 파괴된 흔적이 역력했다.
어쩌다 해골 골짜기에서 빠져나온 마물들에게 당한 것이리라.
폐쇄된 광산을 지나던 엘리오가 중얼거렸다.
“마물 웨이브를 생각하면 위쪽이 온전한 게 이해가 안 되네. 왜 아래만 박살이 났지?”
루나 마일러스가 산세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건 아마 해골 골짜기 때문일 거야.”
“그게 어때서요?”
“해골 골짜기는 에브리마 평원으로 연결되어 있을 거야. 마물들은 골짜기를 통해 이동했을 테고.”
“그렇겠죠?”
엘리오가 애매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것과 페트라 산의 광산이 온전한 게 무슨 상관이라고?
순간 루나 마일러스가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왜요?”
“쉽게 답을 얻으려 하지 말고 너도 생각을 좀 해 봐. 파비안 경에게만 머리를 쓰라 하지 말고.”
“누님, 저도 쓸 때는 써요. 지금도 머리를 굴리고 있잖아요. 머리 좋은 누님을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요.”
“아이고, 그러셔? 그럼 내가 이용당해 줘야겠네? 페트라 산은 해골 골짜기와 만나지만, 통하지는 않을 거야. 마물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이니까……. 이 산 아래에서 해골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형태려나?”
“아! 그러니까 우리가 해골 골짜기 위에 있다는 거죠?”
“맞아. 아마도 길은 곧 끊어지고 해골 골짜기라고 불리는 절벽이 나타날 거야. 마물조차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험한.”
“그렇게 말하니까 이해가 되네요. 절벽이네, 절벽이야.”
엘리오는 자신이 알아낸 것처럼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절벽을 타고 오르는 마물이 있겠지만 그건 극소수리라.
그리고 그 극소수의 마물에게도 파괴될 정도로 광산 개발의 주체는 약했을 것이다.
용병 길드가 아니라 용병단에 의해 개발되던 광산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오늘 본 광산들은 용병단이나 모험가 집단에서 개발하거나, 개발했던 거겠죠?”
“규모를 보면 그럴 거야. 왕국이나 길드 단위라고 보기에는 작고 초라했으니까.”
“그래도 열심히만 하면 큰돈을 벌 것 같지 않아요? 페르돔 광산의 그 마나석 광맥을 생각해 보세요. 땅속에서 그냥 퍼 담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만큼 깊숙이 땅을 파고 들어갈 걸 생각해 봐. 평범한 용병이나 모험가가 그런 일을 하려고 할까?”
“광부를 고용하면 되잖아요.”
“툼스톤에 고용할 광부가 없잖아. 처음부터 광부를 모집해 함께 움직이지 않는 이상, 광산 개발은 힘들어. 광부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데리고 다니는 용병과 모험가를 본 적 있니?”
“없죠.”
“용병과 모험가는 장사꾼들이 아니라 전사야. 돈도 충분하지 않고. 그래서 잡부나 광부, 채집꾼에게 줄 돈을 아껴 자신이 직접 하려고 하지.”
“하지만 그건 잘 안 되잖아요. 결국 모험가든 용병단이든 규모가 커야 제대로 된 광산 개발이 이루어진다는 소리네요?”
“맞아. 우리가 본 폐쇄된 광산들이 그렇지 못한 결과물들이고.”
“돈이 돈을 버는 건 이세계도 마찬가지네요.”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니까.”
엘리오가 씁쓰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의 사람들은 알까?
상계에서도 열심히 일해야 배를 곯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앞서가던 파비안 큰 소리로 외쳤다.
“길이 끊어졌습니다! 절벽이에요!”
잠시 후 엘리오 일행은 파비안과 타인록의 주위에 모였다.
과연! 산 아래까지 계속될 것 같던 길이, 마치 칼로 자른 듯 뚝 끊어졌다.
낭떠러지 아래로 북쪽을 향해 협곡이 길게 뻗어 있었다.
해골 골짜기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엘리오가 파비안을 향해 말했다.
“이거 내려가는 것도 일이겠는데?”
“밧줄 하나만 아래로 드리우면 내려가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마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부 소드 비기너 이상은 되니까요.”
“그래? 이 정도는 너한테 쉽다 이거지?”
“저야 당연하죠. 크레아, 너는 어떠냐? 밧줄 하나면 내려갈 수 있겠지?”
“네, 이런 건 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가능할 것 같아요.”
“들으셨죠? 가능하답니다. 우리야 크레아만 가능하면 다 가능합니다. 아, 성녀님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파비안이 성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엘리오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성녀 누님은 걱정하지 마. 정 안 되면 내가 토르누비스(운종술)로 모셔도 되니까.”
“아! 그게 있었군요. 저희도 그냥 토르누비스로 내려가면 안 됩니까?”
“여러 사람 태우는 건 자신 없다. 어비스에서 영기 쓰는 게 자유롭지가 않아서. 도중에 구름이 흩어지면 어쩔 거야? 추락해도 살아날 자신 있어?”
“없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생각이 바뀌네요. 이제는 라고아 경이 구름에 타라고 해도 제 쪽에서 사양하겠습니다.”
“그래야 파비안이지. 사람이 일관성 있어.”
엘리오는 토르누비스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파비안에게 말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영기를 퍼트리는 게 뜻대로 안 되다 보니 운종술도 불안했던 것이다.
엘리오는 마하담에서 밧줄을 꺼내 내놓았다.
파비안과 하워드 솔론 남작이 굵은 나무에 밧줄을 묶어 아래로 늘어트렸다.
엘리오가 허공답보의 경신술로 밧줄 아래를 확인한 후 되돌아왔다.
“야! 밧줄이 반의 반도 못 간다. 두 번 더 이 짓을 해야겠다.”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리던 파비안이 물었다.
“두 번이나 더 해야 한다고요? 중간에 사람들이 발 디딜 곳은 있습니까?”
“내가 누구냐? 벌써 만들어 놓고 왔다.”
“잘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파비안이 밧줄을 잡고 아래로 사라졌다.
잠시 후 타인록, 하워드 솔론 남작, 크레아, 성기사 알메트 하레브가 차례로 내려갔다.
10분쯤 후 묶여 있던 밧줄이 흔들리자 엘리오가 말했다.
“다 내려갔나 보네요. 누님은 잠깐 이곳에서 쉬고 계세요. 사람들이 계곡 바닥에 도착하면, 제가 올라와서 토르누비스로 모시고 갈게요.”
“구름이 흩어질 수도 있다면서?”
“그때는 제가 안고 가면 되죠. 누님 한 명 안고 내려가는 건 일도 아니에요.”
“그래 그럼. 나는 이곳에서 경치를 보면서 쉬고 있을게.”
“곧 올게요. 얼마 안 걸릴 거예요.”
밧줄을 풀어 손에 쥔 엘리오는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홀로 남겨진 루나 마일러스는 가까운 나무 그늘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녀가 살짝 지루함을 느낄 즈음, 엘리오가 솟구쳐 올라왔다.
“누님!”
“왔니?”
“혼자서 심심했죠?”
“괜찮아. 오래 걸린 것도 아닌데 뭐. 절벽 아래쪽은 어때? 위험해 보이진 않고?”
“웨이브 직후라 좀 찜찜했는데 마물은커녕 야수도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 그렇게 울창한 계곡에 야수까지 안 보인다는 건 좀 이상하구나.”
“웨이브 때 마물들에게 잡아먹혔나 보죠.”
“그런가.”
얼핏 들으니 그럴듯한지라 그녀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사이 엘리오가 운종술로 구름을 불러냈다.
영기로 만들어진 새하얀 구름이 절벽 끝 한 지점에 뭉쳤다.
엘리오가 루나 마일러스의 손을 잡고 구름 위로 올라섰다.
두 사람을 태운 구름이 부드럽게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너와 이렇게 내려가니 꿈을 꾸는 것 같아.”
“지금이 꿈이면 좋겠어요?”
“그야 당연하지. 석경장에서 눈을 떴을 때 내 옆에 너와 지안이가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
엘리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빈말이라도 그런 날이 올 거라 말해 주고 싶었지만, 너무 뻔한 거짓말이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사이 어느덧 골짜기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오는 안타까운 마음에 루나 마일러스를 와락 껴안았다.
루나 마일러스가 말없이 그의 등을 다독였다.
구름이 완전히 지면에 내려앉았지만 엘리오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성기사 알메트 하레브가 보다 못해 헛기침을 터뜨렸다.
“험! 험!”
그제야 엘리오는 품에 안고 있던 루나 마일러스를 놓아주었다.
곧이어 땅에 내려와 있던 하얀 구름이 마치 안개처럼 스르륵 흩어졌다.
뻘쭘한 얼굴로 서 있던 파비안이 광대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했다.
“마침내 해골 골짜기에 오셨군요! 성녀님!”
그러자 루나 마일러스가 빙긋 웃으며 화답하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렇게 어색함을 타파한 파비안은 타인록과 함께 다시 선두로 나섰다.
하워드 솔론 남작과 크레아, 엘리오와 루나 마일러스, 라르바 오마르 백작과 성기사 알메트 하레브가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