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16
1316회. 마족이면 구워 먹고, 인간이면 날로 씹어 먹겠다
아직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어렵기만 한 하워드 솔론 남작은 파비안의 말을 극구 부인했다.
자신은 ‘라고아 백작과 쿰이 싸운 것 같다’는 파비안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리오는 그런 하워드를 힐끔 보기만 할 뿐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까지 혼자 떠든 꼴이 된 파비안도 입을 다물었다.
대화가 시들해지자 엘리오는 다시 선두로 자리를 옮겨 갔다.
엘리오가 저만큼 멀어지자 파비안이 하워드를 쏘아보았다.
“하워드.”
“예?”
“배신자.”
“제가요?”
“너도 쿰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고 했잖아.”
“그야 걸음걸이가 갑자기 거칠어졌으니까 그런 거지요.”
“라고아 경과 대화를 나눈 직후 그랬으면 라고아 경이 속을 긁은 거지. 솔직히 너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아니야? 기사의 명예를 걸고 답해 봐.”
“생각은 그랬는지 몰라도 그걸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너, 라고아 경이 무섭냐?”
“무섭다기보다는 대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형님이 이상한 겁니다.”
“그건 내가 라고아 경과 같은 영지군 생활을 해서 그래. 내가 기수(旗手)를 할 때 라고아 경이 우리 소대에 일반 기사로 들어왔거든. 물론 두각을 나타내 금방 중대장까지 올라가셨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내 지위가 라고아 경보다 높았다고.”
“아!”
하워드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과거사를 알고 나니 파비안의 격의 없는 언행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그날 밤.
엘리오 일행의 야영지 분위기는 지금까지와 달리 무거웠다.
내일이면 드디어 켄티우스 분지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어비스에 온 이유는 우샤스 운드라를 죽이기 위함이다.
문제는 우샤스 운드라와의 결투가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태양신 카마 데비아스가 혼자였던 반면 우샤스 운드라는 ―그를 위해 봉사하는― 마족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파이어 스톤이 뿜어내는 불길을 응시하던 크레아가 문득 물었다.
“마족들이 우샤스 운드라를 도와 라고아 경을 공격할까요?”
딱히 누군가에게 던진 질문이 아니라 혼잣말에 가까운 소리였다.
다들 서로의 얼굴만 볼 뿐 시원하게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오마르 백작이 운을 뗐다.
“마족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모르지만,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둘 방법은…… 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 향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족들에게 그 싸움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면 된다.”
“어떤 것이라 하심은?”
“그것이 신들의 전쟁임을 안다면 감히 끼어들지 못할 것이다.”
“신들의 전쟁요?”
크레아는 무심코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그의 검술이 신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사실이나, 그건 어디까지나 상투적인 표현이다.
그녀는 진짜 신들의 싸움을 본 적이 없기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라르바 오마르 백작이 라고아 백작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마족들이 감히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 주십시오. 그럼 마족들도 섣불리 끼어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엘리오는 단번에 오마르 백작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강호에서도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종종 그랬던 기억이 났다.
“알겠습니다. 제가 누군지 확실하게 보여 주겠습니다.”
그런 광오 한 말을 듣고도 잠잠한 파비안에게 하워드가 속삭였다.
“형님,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어. 내가 생각해도 그 방법이 가장 잘 먹힐 것 같아. 역시 오마르 백작님은 수완이 남다르시다니까.”
“불난 데 기름을 끼얹는 건 아니고요?”
“물론 파장은 커지겠지만, 그걸 보고도 그 싸움에 끼려는 마족은 없을 거야. 그럼 된 거지.”
“사티로스가 안타르 신의 종이라고 했잖습니까?”
“어.”
“그렇다면 안타르 신이 우샤스 운드라의 신전을 짓게 한 거잖습니까?”
“설마 안타르 신이 끼어들까 봐 그래?”
“혹시나 해서요.”
“네가 아직 라고아 경이 제대로 싸우는 걸 못 봐서 그래. 그걸 본다면 다른 신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을 거야.”
“악신(惡神)도요?”
하워드가 샤이틴을 거론하자 파비안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악신 샤이틴은 마나 프트라스와 대척점에 있는 신이다.
창조신에 맞먹는 힘을 가진 악의 근원.
그 악신 샤이틴에 대해서는 파비안이라 해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파비안의 침묵이 길어지자 크레아가 말했다.
“오라버니, 설마 악신 샤이틴이 이런 사소한 싸움에 끼어들겠어요? 그래도 마나 프트라스와 맞먹는 신인데. 노는 물이 다르잖아요.”
“그런가.”
하워드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악신 샤이틴이 관심 둘 일은 아닌 것 같아서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크게 보면 사소한 분쟁에 악신 샤이틴이 끼어들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워드와 크레아는 애써 긍정적인 면을 생각했다.
그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다음 날.
선두에서 걸어가던 쿰의 걸음이 느려지더니 결국 멈춰 섰다.
엘리오는 급히 주변을 살폈지만 마족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쿰의 어깨로 폴짝 뛰어오른 엘리오가 가볍게 발을 구르며 말했다.
“어이, 쿰. 왜 얼어 있어?”
그러자 쿰이 한 아름이나 되는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저 계곡을 지나면 켄티우스 분지다.”
“다 왔네?”
“계곡을 지나야 하는데…… 그러자면 다른 마족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신전으로 가려면 다른 마족들과 시비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쿰이 그럴 수 있겠냐는 눈으로 인간을 보았다.
엘리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가 알았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너희가 인간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안 된다.”
쿰은 속으로 ‘나와 함께 있는 동안은 절대 안 된다’고 중얼거렸다.
“어쩌라고?”
“얼굴을 가려라. 그러면 부라퀴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에이, 그런 게 필요하면 진작에 얘기해 주지. 이제 와서 그러면 어떻게 해?”
“마족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젠장. 로브가 있기는 한데……. 숫자가 맞을지 모르겠네.”
북부의 기사들에게 로브는 강추위를 피하기 위한 필수품이다.
히르헤라 주둔지에서 선물받은 로브를 떠올린 엘리오는 마하담을 뒤졌다.
역시나 탈탈 털었지만 세 벌이 전부다.
일행에게 돌아간 엘리오가 로브를 내놓으며 쿰의 말을 전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세 벌뿐이라……. 당장 로브 같은 걸 만들 수는 없겠죠?”
그러자 크레아가 손을 번쩍 쳐들었다.
“라고아 경, 로브라면 저에게도 한 벌 있어요. 용병 시절에 종종 사용했거든요.”
“그럼 하나만 더 있으면 되겠네요.”
하지만 크레아가 가진 로브를 끝으로 더는 나오지 않았다.
엘리오는 일단 로브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라고아 경은 어쩌시고요?”
크레아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엘리오가 무덤덤한 어조로 답했다.
“나는 마족들과 말이 통하니까 괜찮아요. 전에도 얼굴 안 가리고 다녔는데요 뭐.”
그가 말한 전이란 타메이온에 들어갔던 때를 의미한다.
“아…… 부디 조심하세요.”
말을 마친 크레아는 로브를 푹 뒤집어썼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라고아 백작을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이 얼굴을 가리자 쿰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엘리오는 묻지도 않고 쿰의 어깨에 뛰어올라 팔짱을 끼고 섰다.
쿰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쫓아내지는 않았다.
말해 봐야 그가 들어줄 리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계곡에 접어든 쿰과 엘리오 일행은 얼마 못 가 마족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나무 그늘에서 쉬던 사프족들이 엘리오 일행을 발견하고는 뭐라고 떠들어 댔다.
그래도 엘리오 일행은 묵묵히 쿰의 뒤꿈치만 보고 걸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사프족 전사 십여 명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도마뱀 머리를 한 마족들이 접근하자 엘리오가 소리쳤다.
“어이! 도마뱀들!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기웃거려?”
사프족 전사 하나가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는 부라퀴족 낙오자들이냐! 조금 전에 발리족이 지나갔다. 발리족에게 잡아먹히고 싶지 않으면 우리 쪽으로 와라!”
“꺼져! 기간타스와 함께 있는 거 안 보여?”
“기간타스 하나를 믿는 거냐? 우리는 사백 명이나 된다.”
“꺼지라고 했다. 어이, 쿰. 뭐 해? 침이라도 뱉어 주지 않고.”
쿰이 입을 우물거리자 사프족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지금은 신전을 지으러 왔지 다른 마족과 싸우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프족이 물러가자, 타 종족의 언어를 모르는 쿰이 물었다.
“사프족이 뭐라고 하더냐?”
“발리족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자기들과 함께 가야 한다는데?”
“교활한 놈들. 동족도 잡아먹는 놈들이니 믿지마라.”
“사프족이 동족을 먹어?”
“그놈들은 사냥에 실패하면 약한 놈을 잡아먹기도 한다.”
“어우. 징그러운 놈들이네.”
엘리오가 몸을 부르르 떨 때 쿰이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켄티우스 분지에서 돌아갈 것이다. 나와 함께 있는 동안은 마족들과 시비를 일으키지 마라.”
“알았어. 걱정하지 마. 사프족도 우리를 부라퀴족인 줄 알잖아.”
쿰은 인간들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로브를 푹 뒤집어쓰니 진짜 부라퀴족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신기하군.”
“뭐가?”
“인간과 부라퀴족은 너무 닮았다. 인간이 마나가 아니라 카오스를 받아들이면 원래 부라퀴족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흐흐. 부라퀴족들도 구별을 못 하더라고.”
엘리오는 자신이 타메이온에서 마족 군주가 된 것을 떠올리고 히죽 웃었다.
부라퀴족들조차 자신을 군주로 여겼으니 다른 마족이 구별 못 하는 것도 당연하다.
사프족과 만난 이후로 쿰의 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인간을 부라퀴족인 척 꾸민 게 의외로 잘 먹히니 그런 것이다.
쿰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자 엘리오가 한마디 했다.
“쿰! 조금 천천히 가자고. 우리 앞에 발리족이 있다고 했어. 발리족은 사프족처럼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야.”
여자들의 눈치와 집착이 어디 보통이던가.
엘리오는 여성체로만 구성된 발리족과 가급적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라. 부라퀴족도 너희를 동족이라 생각할 테니까. 나의 지혜를 믿어라.”
단순 무식한 기간타스에게 ‘나의 지혜를 믿으라’는 말을 듣다니!
엘리오는 쿰을 힐끔 쳐다보았다.
고작 ‘얼굴을 가리라’는 꾀를 냈다고 지혜 운운하니 기가 막힌다.
기간타스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결국 계곡을 빠져나간 쿰과 엘리오 일행은 곧바로 발리족과 맞닥뜨리게 됐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니까.’
수백 명의 여자들이 작정한 듯 쿰과 엘리오 일행에게 다가왔다.
십여 명과 수백 명은 느낌부터가 다르다.
중위 마족인 쿰도 발리족들에게 둘러싸이자 어깨를 움츠렸다.
하위 마족 수백 명이 중위 마족 하나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닌 까닭이다.
발리족 족장이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여기서 왜 새콤한 인간의 냄새가 나지?”
뜨끔한 엘리오가 쿰의 귓가에 속삭였다.
“야, 큰일 났다. 저 마족이 인간의 냄새가 난단다. 냄새로 인간을 구별할 수 있냐?”
“모른다.”
제 딴에는 작게 말한다고 했지만 쿰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발리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발리족 족장이 기간타스의 어깨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남성체에게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마족이면 구워 먹고, 인간이면 날로 씹어 먹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