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81
1381회. 라고아 백작 각하께서 북부 왕국군을 이끌어 주십시오
뒤늦게 오스번 칼로스 자작을 본 파비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작님.”
에스카토스 왕국의 남작인 파비안에게 궁정 마법사인 오스번 칼로스 자작은 상당히 어려운 인물이었다.
오스번 칼로스 자작은 파비안에게 고개를 까딱인 후 다시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눈을 맞췄다.
엘리오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스번 칼로스 자작과의 오랜 인연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는 잘 지냈습니다. 앉으시지요.”
엘리오의 말에 파비안은 슬쩍 옆으로 비켜 자리를 내주었다.
이윽고 오스번 칼로스 자작이 앉자 엘리오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히르헤라의 상황은 좀 어떤가요? 제국에 있으니 북부 소식을 통 알 수가 없네요.”
“빙벽은 완전히 복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르헤라 주둔지의 병사들도 대부분 영지로 돌아갔지요. 지금은 한 개 중대 병력만 남아서 주둔지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병사들이 사라져서 주둔지 마을 상인들만 죽겠다고 난리입니다.”
“아……. 결국 그렇게 됐구나.”
엘리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히르헤라 주둔지는 언제고 쇠퇴할 줄 알았다.
균열 때문에 영지병들이 모여들면서 갑작스럽게 도시가 만들어졌지만, 솔직히 히르헤라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못 된다.
균열이 사라지면서 북부 왕국의 군대가 돌아갔으니 도시도 곧 몰락할 터였다.
위기가 찾아와야 도시가 발전한다니 믿지 못할 현실이다.
문득 오스번 칼로스 자작이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을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클라우드 남작. 세라 경을 기억하나?”
“예?”
“팬텀 기사단의 총사 세라 로어 경 말이네.”
“예, 당연히 기억하지요.”
그러자 오스번 칼로스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남작이 전역할 때 영지로 내려보냈는데, 얼마 전 다시 팬텀 기사단으로 돌아왔다네.”
“…….”
“이유가 뭔지 안 궁금한가?”
“왜 돌아갔답니까?”
“남작과 연락이 닿지 않아서 돌아왔다는군. 영지에 있어서 남작과 연락이 안 되는 것 같다나? 틀린 말은 아니지. 왕궁에 와서 나를 통해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됐으니까. 받게. 그녀가 보내는 편지일세.”
오스번 칼로스 자작이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파비안에게 건넸다.
파비안이 머쓱한 얼굴로 편지를 받았다.
그런 파비안을 본 오스번 칼로스 자작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세라 경은 남작과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던데……. 남작의 표정을 보니 그런 건 아니었나 보군. 혹시 세라 경의 일방적인 구애였다면 내가 중간에서 우스운 일을 했구먼.”
지나치게 자조적인 말에 엘리오는 오스번 칼로스 자작을 힐끔 보았다.
궁정 마법사에게 편지를 맡길 정도면 많이 친해진 상태리라.
그렇다면 지금 저 말은 파비안의 태도를 돌려서 책망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파비안을 대신해 엘리오가 나섰다.
“히르헤라에 있을 때 둘이 사귄 것 맞습니다. 제가 옆에서 다 봤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후회하던 참입니다.”
궁정 마법사 오스번 칼로스 자작이 너스레를 떨었다.
내친김에 엘리오는 진실을 다 까 버렸다.
“파비안 남작이 좀 바람기가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미모의 여자만 보면 껄떡대고 그랬습니다. 세라 경도 자기를 잊었을 테니 괜찮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저런. 세라 경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거 어쩐다.”
엘리오와 오스번 칼로스 자작의 시선이 파비안을 향했다.
조개처럼 꾹 다물고 있던 파비안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세라 경에게 답장을 쓰겠습니다. 칼로스 자작님께서 한번 더 수고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오스번 칼로스 자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 정도 일이야 어려울 것도 없지.”
파비안의 일이 마무리되자 엘리오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에스카토스 왕국의 궁정 마법사님께서 이곳까지 어쩐 일이 십니까? 설마 연애편지를 전하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닐 테고.”
“실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뵀습니다만…….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저희 방으로 올라가시지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비밀스러운 이야기인지 오스번 칼로스 자작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엘리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말소리가 나가지 않게 차단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가능하지만, 남들이 이상하게 여길까 봐 방으로 가자고 한 것입니다.”
“아! 그러시다면 방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오스번 칼로스 자작의 말에 엘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이 층의 숙소로 올라간 엘리오는 영기로 소리를 차단했다.
“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랜드 마스터의 장담에 오스번 칼로스 자작은 망설임 없이 운을 뗐다.
“먼저 에스카토스 4세 전하께서 엘리오 라고아 경의 작위를 백작으로 승작하셨다는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작위에 걸맞게 추가로 히르헤라를 영지로 하사하셨습니다. 이제 백작님의 영지는 면적만으로 보면 베르나르도 후작님보다 크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물론 쓸모없는 땅이 더 많지만요.”
엘리오는 멀뚱멀뚱 오스번 칼로스 후작을 보기만 했다.
어차피 그에게 작위니 영토니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 다 두고 갈 것을 욕심내 뭐하겠나 말이다.
“물론 라고아 백작 각하께서는 작위와 영토에 욕심이 없으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왕궁 안팎에서 에스카토스의 영웅에게 제국보다 낮은 작위를 준 것에 대한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죠?”
엘리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오스번 칼로스 자작을 보았다.
세상에 공짜가 있을 리 있나.
아니나 다를까?
“제국군과 충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황태자와 대립각을 세우고 계시다는 것도요. 사실입니까?”
“맞습니다. 어쩌다 황태자가 아끼는 군단 하나를 박살 냈거든요.”
“황태자는 덱스터 프레이저 2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사람입니다. 그를 대신할 만한 인물이 황가에 없을뿐더러, 대귀족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으니 즉위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황태자와 적이 되셨으니……. 제국에서 받으신 작위도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오스번 칼로스 자작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상관없어요. 내가 먼저 제국에 작위를 반납하겠다고 했는데요 뭐.”
“그런 일이 있으셨습니까?”
오스번 칼로스 자작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랜드 마스터를 제국에 뺏기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 반대라니 좋은 것이다.
“내가 뭐만 하면 반란이니 뭐니 물고 늘어지잖아요. 그래서 이제부터 제국 백작 안 하고 북부 귀족만 할 테니까 작위 가져가라고 했죠.”
“잘하셨습니다. 이참에 제국 작위를 반납해 버리십시오.”
“그 말 하러 오셨어요?”
“제국과 북부 왕국과의 관계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진짜요?”
엘리오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남부 왕국들과 전쟁 중인 제국이 왜 북부 왕국까지 건드린단 말인가?
“얼마 전 북부 왕국들이 평화를 중재하려 제국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결과적으로 거절당하고 돌아왔지요. 제국은 남부 왕국들과 종전할 뜻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남부 왕국의 완전한 점령입니다.”
“어비스가 아니라…… 남부 왕국이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북부 왕국들도 처음에는 어비스가 목적인 줄 알았습니다만…….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저들의 목적은 남부 왕가를 없애고 공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남부 왕국 다음은 북부 왕국이겠지요. 그래서 북부 왕국들도 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제국과 전쟁을 할 생각인가요?”
엘리오가 눈을 찌푸렸다.
남부 왕국에 이어 북부 왕국까지 전쟁에 뛰어들면 전란이 대륙 전체를 휩쓸게 된다.
그것은 제국과 남부 왕국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야말로 대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남부 왕국이 멸망하면 그다음은 북부 왕국의 차례가 될 테니까요. 북부 왕국들은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제국군의 전력이 흩어진 지금 해야 하는 게 맞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미 결론을 내렸다고요?”
“그렇습니다. 하여 백작 각하께서 북부 왕국군을 이끌어 주십사 요청드리기 위해 제가 왔습니다.”
“아니…… 지금까지 잘 참았는데 왜…….”
엘리오는 마음이 무거웠다.
북부 왕국의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갑자기 전쟁이라니!
“제국의 목적을 모른다면 모를까? 알면서 어리석게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엘리오는 반박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북부 왕국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왕가를 없애고 제국이 다스리겠다는데 가만히 있으면 바보일 것이다.
“에스카토스 왕국과 북부 왕국의 미래를 위해 라고아 백작 각하께서 북부 왕국군을 이끌어 주십시오.”
궁정 마법사 오스번 칼로스가 뜨거운 눈으로 엘리오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그가 제도까지 내려온 것은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엘리오가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 저는 이 전쟁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왜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균열의 배후를 쫓고 있다는 것은 아시죠?”
“예.”
“균열의 배후를 쫓던 중에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균열과 지금의 전쟁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의 목적요?”
“이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려는 존재가 있습니다. 균열도 전쟁도 그래서 만든 겁니다.”
“그 존재가 누굽니까? 이 세상을 혼란에 빠트려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요?”
“악신 샤이틴입니다. 이 세계를 마나 프트라스 이전의 상태로 돌리려는 겁니다.”
그 말에 오스번 칼로스 자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나 프트라스가 이 세계를 만들었는데 이전의 상태는 또 뭐란 말인가?
엘리오는 마족 신 안타르에게 들은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나는 ‘혼란의 선봉장’인 우샤스 운드라를 없애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생각입니다. 내가 전쟁에 참여해 봐야 혼란만 커질 겁니다.”
“백작 각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자가 마족의 신이라면……. 그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따져 봐야 하지 않습니까? 거짓 정보로 백작 각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마족의 신이 거짓말한 게 아니라면…… 세계가 멸망으로 치달을 겁니다. 게다가 ‘혼란의 선봉장’을 없애는 게 나의 사명이기도 하고요.”
오스번 칼로스 자작이 다소 황당한 얼굴로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하다 하다 이제는 사명이란다.
‘표정을 보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닌데…….’
북부 왕국으로 모셔 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틀린 것 같다.
“백작 각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아쉽지만 사명이 그러시다니 양보를 해야겠지요. 저로서는 백작 각하께서 우리 에스카토스 왕국과 백성들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릴 뿐입니다.”
“저 역시도 에스카토스 왕국과의 인연을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오스번 칼로스 자작이 파비안 클라우드 남작을 돌아보았다.
“나는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이네. 답장은 그때까지 준비해 주게.”
“예.”
오스번 칼로스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엘리오가 물었다.
“지난번에는 베르나르도 후작님이 오셨는데, 후작님은 잘 계시죠?”
“잘 계십니다. 이번에는 후작님이 군대를 개편하느라 바쁘기도 하지만……. 제국에 얼굴이 알려져 있어 모두가 만류했습니다. 그에 비해 마법사는 하는 일이 없고, 요즘은 딱히 주목을 받지 않아 오가는 게 수월합니다. 하하.”
어딘지 허탈한 웃음에 엘리오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