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84
1384회. 취한 척하는 겁니까? 취한 겁니까?
아리에트 알바노와 청년을 본 순간 엘리오는 파비안 대신해 자신이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쯧!’
파비안과 아리에트 알바노는 이런 면에서 닮은 것도 같다.
엘리오가 묘한 안타까움에 혀를 찰 때, 청년이 삐딱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비켜라.”
자연스러운 반말에 엘리오는 청년의 아래위를 훑었다.
고급진 질감의 옷감과 롱소드 퍼멀(손잡이 끝)에 박힌 커다란 보석을 보니 대귀족의 자제 같았다.
‘하기야 그 정도 되니 아리에트 양과 술을 마셨겠지.’
바르도스를 비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고급 접대부’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바르도스들은 귀족들의 말 상대가 되어 주고 그 대가로 용돈을 받았으니까.
아리에트 양과 이 청년의 관계도 그런 식일 터였다.
“나에게 한 말이냐?”
엘리오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다.
청년의 고압적인 말투는 그에게 도발과도 같았다.
비슷한 또래의 남자가 당차게 나오자 청년, 하이머 키브테레는 눈을 찌푸렸다.
“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너는 내가 누군지 알아?”
상대가 자신의 말을 따라 하자 하이머 키브테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래도 병신을 만난 것 같다.
이런 놈을 상대하다 아리에트 양이 술에서 깨기라도 하면 자신만 손해다.
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낸 그는 상대의 얼굴을 향해 가볍게 튕겼다.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뜻이다.
툭. 땡그렁.
엘리오의 이마에 부딪친 은화가 바닥에 떨어졌다.
“뭐 하냐? 지금? 나 친 거냐?”
엘리오가 살벌한 눈으로 청년을 노려보았다.
예상과 달리 일이 꼬이자 하이머 키브테레는 서둘러 자신을 밝혔다.
“나는 키브테레 백작가의 대공자인 하이머 키브테레다. 지금 물러가면 없던 일로 해 주겠다. 어쩌겠느냐?”
“제국법에 백작가의 대공자면 아무나 막 쳐도 된다고 써 있냐?”
“술값에 보태라고 돈을 준 것이니 오해하지 마라. 그런데 너는 누구기에 나에게 그처럼 하대를 하느냐?”
사실 백작가의 대공자라고 하지만 귀족일 뿐, 작위는 아직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작위 계승을 염두에 두고 알아서 섬겼다.
그랬기에 지금 하이머 키브테레의 비위는 적잖게 상한 상태였다.
옆에 아리에트 알바노만 없었다면 진즉에 폭발했을 것이다.
그때 술이 조금 깼는지 아리에트 알바노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말했다.
“어? 라고아 백작님?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저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하이머 키브테레는 아리에트에게서 슬며시 손을 떼며 확인하듯 물었다.
“지금 백작이라고 했소?”
“예……. 북부의 영웅이시고,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이신 엘리오 라고아 백작님이시잖아요. 그렇죠? 백작님?”
엘리오는 대답 대신 하이머 키브테레를 노려보았다.
“아리에트 양의 술에 약을 탔느냐?”
깜짝 놀란 하이머 키브테레는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와인을 많이 마셔서 저러는 겁니다. 저는 약은 손대 본 적도 없습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위세를 부리던 그는 어느새 순한 양으로 변해 있었다.
“나라에 전쟁이 났는데 바르도스를 옆에 끼고 술이나 처마시다니. 내일까지 입대하지 않으면 나를 모욕한 죄로 키브테레 백작가에 결투를 신청하겠다. 어찌하겠느냐?”
“이, 입대하겠습니다.”
“내일 확인해 볼 것이다. 이 자리를 모면할 생각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면…….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가 봐라.”
“예, 예…….”
허리 숙여 인사하고 떠나는 하이머 키브테레의 어깨가 축 처졌다.
엘리오는 아리에트 알바노를 가까운 자리에 앉혔다.
아리에트 알바노는 술에서 깨기 위해 손바닥으로 자기 얼굴을 연신 때려 댔다.
그런 그녀를 묵묵히 응시하던 엘리오가 입을 열었다.
“취한 척하는 겁니까? 취한 겁니까?”
순간 아리에트 알바노는 동작을 멈췄다.
엘리오의 말이 이어졌다.
“백작가 대공자로 갈아타려 했는데 방해를 한 것이라면 미안하게 됐습니다. 파비안도 그쪽과 비슷한 놈이라 새삼스럽지는 않습니다.”
“하아! 제가 이상하게 보일 거라는 건 아는데요. 오늘은 정말 홧김에 술을 좀 많이 마셨어요.”
“나에게 변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만 물읍시다. 율리아나 레올라 후작이 아리에트 양을 후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외부와 인연을 끊고 삽니다. 레올라 후작도 그랬고요.”
“…….”
“레올라 후작의 외부 활동은 대부분 아리에트 양과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공연을 관람한다거나 함께 식사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게 문제가 되나요?”
“전혀요. 소피아 남작을 죽인 게 레올라 후작이라는 건 알고 있죠? 나는 지금 달아난 레올라 후작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은 후작이 갈 만한 곳을 알고 있습니까?”
“몰라요.”
아리에트 알바노는 설사 알아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레올라 후작이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런 후작을 어떻게 배신한단 말인가!
“후작의 고향이나, 특별히 언급한 장소라도…….”
라고아 백작의 기대 어린 눈빛에 아리에트 알바노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레올라 후작은 친모보다 더 자신에게 잘 대해 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그녀가 친모였으면 하는 상상을 한 적도 있다.
“후작님은 단 한 번도 고향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어요.”
하지만 가 보고 싶다던 장소는 있다.
“특별히 언급한 곳은요?”
“없어요.”
아리에트의 얼굴을 응시하던 엘리오가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마검사라는 건 알고 있죠?”
“저에게 정신 마법이라도 사용하실 건가요?”
그러자 엘리오는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제가 그렇게 웃긴 이야기를 했나요?”
“가끔 나쁜 놈들을 잡아서 뭔가를 물어보면 꼭 저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압니까?”
“…….”
“감출 게 있는 사람들은 항상 ‘정신 마법을 사용할 거냐?’고 묻더라고요. 재밌지 않습니까?”
“정신 마법은 후유증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그래서 극악한 범죄자들에게나 사용하죠.”
“저는 범죄자가 아니에요.”
아리에트 알바노가 술이 완전히 깬 얼굴로 항변했다.
취한 척을 했든, 취했든, 지금 그녀가 처한 상황은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 정신 마법에는 후유증이 없으니까.”
“제가 파비안 남작과 결별하지 않았다면,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겠죠?”
상대로 하여금 죄책감이 들게 만드는 발언이다.
하지만 엘리오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파비안이 나에게 뭔가를 숨긴다면 그에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럴 만큼 내 정신 마법은 안전합니다.”
순간 아리에트 알바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무리 백작님이라도 그런 장담은 하지 마세요. 신이 아닌 이상,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녀는 위기에 몰린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웠다.
이제는 레올라 후작에 대한 의리보다 자신의 정신이 더 걱정됐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스스로 말해 봐요. 당신이 감추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
아리에트 알바노의 눈빛이 흔들렸다.
성격 급한 엘리오는 속이 탔지만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잠시 후 아리에트 알바노가 입을 열었다.
“후작님은 메기스투스 님처럼 고대의 마법 실험실을 가지고 싶어 하셨어요.”
“메기스투스요?”
“그분은 타불라 마탑의 아크 메이지예요. 그가 고대의 마법 실험실을 발견해 연구실로 사용한다면서 부러워하셨어요. 그런 건 연금술사에게 과분하다고.”
“그래서 고대의 마법 실험실을 찾았나요?”
“그럴 리가요. 마탑주쯤 되면 자유로이 밖으로 돌아다닐 수도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고대의 마법 실험실을 찾겠어요. 단지 그 비슷한 뭔가를 구하셨어요.”
“비슷한 거요?”
“마법사가 주인이던 오래된 고성이라 들었어요.”
“그건 어디에 있죠?”
“아펜델 산에 있다는 것만 알아요.”
“아펜델 산요?”
“제도 북구를 벗어나 처음 나오는 산이 아펜델 산이에요.”
엘리오는 아리에트 알바노를 응시했다.
체념한 얼굴이지만 눈빛은 조금 전과 달리 흔들림이 없었다.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감사합니다.”
“저어, 혹시라도 그곳에서 레올라 후작님을 만나게 되면……. 정신 마법으로 알아냈다고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엘리오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법(言法) 수련자에게 거짓말을 해 달라니?
‘파비안과 비슷한 줄 알았더니…… 더한 여자였군.’
막 몸을 돌리려던 엘리오가 말했다.
“레올라 후작과 나는 그런 말을 나눌 사이가 아닙니다.”
물론 레올라 후작이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 가르쳐 줄 의향은 있다.
엘리오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고 칼리오페를 떠났다.
페르모사 에스텔라로 돌아간 엘리오는 일 층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파비안이 내려왔나 싶어 확인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전망 좋은 창가 자리에 파비안이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간 엘리오는 그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일 싸구려 방에 묵으면서 너무 좋은 자리 차지하고 있는 거 아니냐?”
“하루에 일 실버나 내는데 이렇게라도 뽑아 먹어야죠. 가셨던 일은 잘됐습니까?”
“어.”
엘리오는 대충 대답하고 점원을 불러 식사를 주문했다.
“후작과 끈끈한 사이던데 순순히 가르쳐 주던가요?”
“정신 마법을 쓴다니까 알아서 술술 말해 주더라.”
“후후.”
그 장면이 눈에 떠오른 파비안은 유쾌하게 웃었다.
정신 마법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눈치가 빠른 아리에트 양이라면 당하기 전에 자발적으로 털어놓았을 게다.
엘리오는 굳이 칼리오페에서 본 것을 말하지 않았다.
하이머 키브테레와 아리에트 양의 관계를 모르기도 하거니와 파비안의 추억을 지켜 주고 싶어서다.
“내일은 나하고 같이 후작을 찾으러 가자.”
“어디에 있답니까?”
“아펜델 산이라고…… 북부를 나가서 처음 보이는 산이란다.”
“산으로 들어갔다고요?”
“그곳에 있는 고성을 따로 구해 두었던 모양이야.”
엘리오는 아리에트 양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마법사의 고성이라니…… 신비하네요.”
“마탑에도 자기 방이 있을 텐데 무슨 욕심인지 모르겠다.”
“마법사의 시커먼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총동원령에 대한 이야기는 좀 있냐?”
“남부 전선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사상자가 많이 나와 조만간 총동원령을 내릴 것 같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짜 대혼란 아니냐?”
“혼란의 선봉장을 찾는 게 더 어려워질 것 같지 않습니까?”
“아, 진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엘리오가 투덜거렸다.
갑자기 타나토스가 튀어나오면서 모든 게 엉망이 됐다.
“며칠 전에 타나토스를 만든 마공학자도 만나 보셨다고 하셨죠?”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대체 누굴까요? 아르테늄도 아니고, 타나토스도 아니면……”
“연금술사나 마공학자가 아니면 제국의 대귀족이나 황실, 영향력 있는 왕들을 조사해 봐야 하나?”
“하지만 아직 마탑 쪽을 다 조사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그러는 동안 점원이 음식을 내왔다.
엘리오와 파비안은 한동안 조용히 식사에 열중했다.
식사 후 습관처럼 차를 마시던 파비안이 문득 중얼거렸다.
“세상이 이처럼 급변하고, 전쟁이 점점 커져 간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엑시티움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그걸 만든 마공학자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오십 년 전의 일이니 지금은 다 늙어 죽지 않았을까? 전신이라 불리던 카이저 크나우프 대공도 늙어 죽었는데.”
자기가 말하고도 확신이 서지 않는지 엘리오는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