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91
1391회. 아직도 너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엘리오는 즉시 품에서 블랙 비드를 꺼내 보았다.
역시나 약한 진동과 함께 검은 구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타불라 마탑에서처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신호가 오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엘리오는 사칼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즉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 자리에서 구룡번신을 펼칠 수도 있었지만 어비스 출입구가 너무 가까워 지상으로 올라가기로 한 것이다.
노천 광산 위로 올라간 엘리오는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어비스의 출입구가 ―마치 초자연적인 재앙의 근원처럼― 불길하게 느껴졌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고개를 젓던 엘리오는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
론디니움 제국.
수도 페트로폴리스 중구.
이른 아침.
타불라 마탑 앞으로 한 청년이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남부 어비스에서 사라졌던 엘리오였다.
엘리오는 타불라 마탑을 힐끔 올려다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비스를 찾아갈 때처럼 엉뚱한 곳에 떨어지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돌아오는 길은 한 번에 제대로 찾아왔다.
‘어두울 때 출발해서 그랬나?’
차이는 낮과 어두움밖에 없으니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어비스 때문에 어둠이 찾아왔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어비스 안에서는 아예 구룡번신을 사용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때보다는 덜하지만 뭔가 방해를 받은 게 틀림없다.
원인을 파악하니 그제야 마음에 남아 있던 찜찜함이 사라졌다.
생각을 정리한 엘리오는 입구를 지나쳐 타불라 마탑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는 1층의 안내인을 앞세우고 마공학 연구소로 향했다.
마공학 연구소.
마공학자이자 5서클 메이지인 카비 크레이저 백작은 대세의 흐름을 잘 타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랜드 마스터이자 제국의 골칫거리인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맞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탑주조차 그를 피해 달아날 정도인데 맞서긴 왜 맞선단 말인가.
대신에 그가 선택한 방법은 적극적인 협조였다.
그는 메기스투스가 방문하자마자 은밀히 블랙 비드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행여나 라고아 백작이 오기 전에 메기스투스가 돌아가겠다고 하면 어쩌나 속으로 조바심을 냈다.
지금까지 메기스투스는 소울 스톤만 넘기면 바로 떠나곤 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메기스투스는 들고 온 짐을 내려놓고 연구소를 나가려 했다.
다급해진 카비 크레이저 백작은 그를 불러 세우고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오. 개인 연구는 잘되어 가오?”
“그럭저럭요.”
메기스투스는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마공학자로 아크 메이지의 경지에 올랐지만, 자신의 마법 경지를 감추어 자작에 불과했다.
그러니 백작인 연구소장 앞에서 공손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기스투스의 마법 경지를 알 리 없는 카비 크레이저 백작이 태평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요즘 마탑들이 엑시티움과 마력총으로 보기 드문 호황기를 맞이했소. 그럴수록 안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오. 괜찮다 싶은 연구가 있으면 미리 언질을 좀 주시오.”
“그러지요.”
“참, 요즘 아도브 마탑에서 타나토스라는 물건을 만들었소. 우리가 개발한 엑시티움과 비슷하다는데 타나토스에 대해 아시오?”
“압니다. 루비도늄이 주재료인 엑시티움과 달리 타나토스는 노블륨을 사용했더군요.”
“노블륨을 사용한 것만으로 최초 개발자의 권리를 비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전체적으로 엑시티움과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것도 사실입니다.”
“개발자 중 한 명인 경이 이의를 제기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기나긴 싸움 끝에 어쩌면 우리가 이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실익이 없습니다. 이미 제작법이 왕국에 알려졌으니 마공학자들을 섭외해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왠지 손해를 보는 느낌이라…….”
말하면서 카비 크레이저 백작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15분 전에 연락을 보냈으니 지금쯤 올 때가 됐는데…….’
그런 연구소장의 속도 모르고 메기스투스는 열변을 늘어놓았다.
“타나토스로 인해 이익을 보면 봤지 손해는 없습니다. 타나토스가 등장한 덕분에 엑시티움의 생산에 탄력이 붙었잖습니까? 게다가 제국만 엑시티움을 가지고 있었다면 언젠가 다시 사장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타나토스로 인해 앞으로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메기스투스는 50년 전에 엑시티움이 사장되었던 게 뼈아팠던지 그때의 일을 거론했다.
그때 마공학 연구소의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었다.
그를 발견한 카비 크레이저 백작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연구소장이 누군가를 반갑게 쳐다보자 메기스투스도 시선을 돌렸다.
순간 엘리오와 메기스투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곧이어 메기스투스의 입에서 무거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흐음…….”
카비 크레이저 백작은 짐짓 놀라는 체하며 말했다.
“라고아 백작님이 오셨구려. 내 잠시 인사를 하러 가 봐야겠소.”
메기스투스는 카비 크레이저 백작이 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자신에게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엘리오가 천천히 메기스투스에게 다가갔다.
카비 크레이저 백작은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엘리오였다.
“메기스투스, 마공학자로는 아크 메이지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마법은 5서클을 겨우 넘겼다고 하더니……. 마구스(7서클 대마법사), 아니 마그눔 오프스(Magnum opus) 정도 되려나? 대단하군.”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카비 크레이저 백작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마구스? 마그눔 오프스?’
마구스는 7서클 대마법사를 의미하고, 마그눔 오프스는 궁극의 경지를 뜻한다.
자신과 같은 5서클 마법사라고 생각한 메기스투스가 그런 존재였다니!
그건 놀람을 넘어서 충격이었다.
메기스투스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군. 라고아 백작이라고 했나? 그대가 요즘 이름이 쟁쟁한 그랜드 마스터 엘리오 라고아 백작인가?”
“그래. 그게 나다. 라고아는 연못을, 엘리오는 붉은 노을을 뜻하지. 나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텐데? 아, 또 다른 자아가 내면에 숨어 있다면 모를 수도 있으려나?”
엘리오의 의미심장한 말에 메기스투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전에 우리가 만난 적이 있느냐?”
“만났었냐고? 만난 정도가 아니지. 기억하려나 모르겠는데 ‘왕들의 하늘’에서 너는 내 손에 죽었다고.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순간 메기스투스가 흠칫 놀란 눈으로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엘리오 라고아……. 그래, 이제야 네가 누군지 알겠다. 흐흐흐. 하하하핫!”
메기스투스가 미친 사람처럼 쉬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멈추자 늙은 마공학자 메기스투스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아름다운 존재가 나타났다.
그를 본 엘리오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메기스투스는 역시나 금사, 이 세계의 신인 우샤스 운드라였다.
문득 엘리오가 물었다.
“카마 데비아스는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더라고. 나중에야 그의 속에 또 다른 인격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았지. 그런데 너는 어떻게 바로 나를 알아볼 수 있지?”
“카마 데비아스는 겁쟁이라 천자마가 그의 의식 위로 올라가지 못한 걸 게다. 하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본래의 나와 합일할 수 있었다.”
“우샤스 운드라도 너처럼 음흉한 구석이 많았나 보네?”
“우리는 그렇다 치고, 너는 어떻게 이 세계의 그 몸과 합일할 수 있었던 것이냐? 그랜드 마스터의 몸을 차지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우샤스 운드라는 엘리오도 자신들처럼 영혼이 넘어온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너희들처럼 남의 신체에 기생하지 않아. 이 몸은 너희를 죽이기 위해 천문(天門)을 열고 직접 넘어오셨다고.”
“거짓말하지 마라. 네가 운 좋게 천문을 열었다 해도 이곳에 오기란 불가능하다. 우주에 무수히 많은 차원이 존재하는데 무슨 수로…….”
“마나 프트라스가 안내를 해 줬거든.”
“마나 프트라스……. 그 욕심 많은 신이 분수에 맞지 않는 큰일을 벌였군.”
우샤스 운드라는 자신이 모시던 창조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비난했다.
“어이, 마나 프트라스는 그쪽이 얼마 전까지 모시던 신 아냐? 배신했다고 바로 욕하면 안 되지.”
“그가 진정한 창조신이라면 내가 왜 비난하겠나? 마나 프트라스는 약탈자들이 남겨 놓은 잔상에 불과하다.”
“반만 동의할게. 그런데 네가 말한 약탈자들에게 탈탈 털린 신이 샤이틴이잖아. 나도 그 정도는 안다고.”
“뭔가 잘못 알고 있군. 마나 프트라스는 관리자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샤이틴님은 진정한 창조신이시지.”
“마음대로 떠들어. 어차피 나는 신들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나는 단지 타락한 너를 없애기만 하면 돼.”
말과 함께 엘리오가 공허의 검을 꺼내 들었다.
타불라 마탑이 제국 수도에 있음을 생각하면 아찔한 행동이다.
그러자 우샤스 운드라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면서 정작 너는 신들의 문제에 가장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아, 몰라. 그냥 너만 없애고 깔끔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나를 없앤다고 네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금방이라도 우샤스 운드라를 향해 짓쳐들어 갈 것 같던 엘리오가 멈칫했다.
“당연하지. 마나 프트라스는 약속을 지킬 거야. 지키지 않으면 내 손으로 마나 프트라스의 세계를 짓밟아 버릴 거거든.”
“내가 말하지 않았나? 욕심만 많은 신이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했다고. 네가 나를 죽인다면 너는 영원히 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설명해 봐.”
엘리오는 공허의 검 끝을 바닥으로 내렸다.
우샤스 운드라와 싸우는 일은 대화를 끝낸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마나 프트라스는 창조신이 아니라 고대 티탄족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너도 티탄족이 샤이틴님의 세계를 침략해 왔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구질구질한 잡소리 때려치우고 본론만 말해.”
“나는 우연한 기회에 티탄족이 남긴 타브레트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됐지.”
“비밀?”
“티탄족은 단지 침략자가 아니라 초고도 문명의 끝에 도달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 창조와 파괴까지도. 찬란한 진화의 끝에서 그들은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됐다. 신마저도 초월한 자신들의 존재가 우연의 산물인지, 아니면 누군가 만든 것인지 알고 싶어 했다고 할까.”
“나와 전혀 상관없는 얘기군. 이걸 내가 계속 들어 줘야 할 이유가 있나?”
“상관이 있으니 들어라. 우주를 떠돌던 티탄족의 눈에 이 세계가 들어왔다. 정확히는 이 세계에서 창조신의 존재를 발견한 거지. 그래서 그들은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 이 세계를 찾아왔다. 하지만 곧 알게 됐지. 자신들이 찾던 존재가 샤이틴님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마나 프트라스라는 관리자를 남기고 떠난 것이다.”
“듣고 보니 대단한 비밀도 아니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 과정에서 나는 태고신 샤이틴님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게 뭐?”
엘리오가 뚱한 얼굴로 우샤스 운드라를 보았다.
듣고 보니 자기가 마나 프트라스를 배신한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다.
“인간들의 전쟁이 ‘혼돈의 씨앗’이라면, 신적 존재인 나의 죽음은 ‘혼돈의 열매’다. 내가 죽으면 그로 인해 발생한 혼돈의 힘이…… ‘검은 태양’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그것이 샤이틴님과 내가 맺은 ‘소멸의 맹약’이다. 내가 ‘혼돈의 선봉장’으로 불리고, 마족들이 나를 추앙하는 이유지.”
“검은 태양? 설마 어비스를 말하는 건가?”
“제법이구나. 검은 태양이 떠오르면 마나 프트라스는 잠들고, 이 세계는 태고의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다. 마나 프트라스에게는 그 변화를 막을 힘이 없다. 아직도 너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