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393
1393회.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똑똑히 기억해 두어라
엘리오는 희미한 의식 속에 구천검령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서 움직이라고? 그대의 의식을 일깨운 것은 우리다.
―고작 앱솔루트 파워 킬 워드에 몸의 통제를 빼앗기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
―불멸의 힘, 텔레마를…….
귀에 익은 단어가 나오자 엘리오는 무심코 ‘텔레마’를 따라 읊조렸다.
텔레마는 고대어로 ‘의지’를 뜻한다.
마치 잠에 취한 듯 몽롱하던 의식이 한순간 명료해졌다.
죽음의 저주를 극복하자 멈춰 있던 심장과 폐가 다시 움직였다.
“하아! 하아! 하아!”
엘리오는 밀렸던 숨을 격하게 들이마셨다.
반신이라 해도 육체의 굴레는 어쩔 수 없어서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다.
호흡이 달았다.
“하아!”
날숨을 길게 내뱉은 엘리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최고라니까.”
한편 우샤스 운드라는 9서클 마법마저 깨지자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한낱 인간 따위로 그래야 한다는 게 어처구니없을 뿐이다.
소멸의 맹약은 어느 일방의 헌신이 아니다.
예컨대 ―마나 프트라스의 추종자였던― 자신도 샤이틴의 권능을 쓸 수 있다.
정확히는 샤이틴의 권능을 써야 소멸의 맹약이 완성된다.
‘샤이틴님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젠 멈출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어차피 눈앞의 저 인간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기 때문이다.
우샤스 운드라가 잠깐 딴생각에 빠져 있을 때, 엘리오가 그를 향해 공허의 검을 날렸다.
쐐애액―!
대검이 날아오자 우샤스 운드라는 블링크로 빠져나간 뒤 환영 마법을 사용했다.
수십 명의 우샤스 운드라가 나타났다.
엘리오는 이기어검을 거둬들인 뒤, 바로 천산검영을 펼쳤다.
우샤스 운드라의 환영들 위로 수백 개의 ‘검의 화신’이 떨어져 내렸다.
퍼퍼퍼퍽―! 콰앙―!
환영들은 터져 나갔지만 우샤스 운드라의 본체를 때린 ‘검의 화신’이 폭발했다.
엘리오는 어차피 본체를 찾기 위한 것이었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지상으로 쏟아져 내려가던 검의 화신들이 허공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다시 허공에 엘리오와 우샤스 운드라가 마주하고 섰다.
우샤스 운드라가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구주(九州)의 잡기술로는 나의 털끝도 다치게 할 수 없다.”
“응, 걱정 마. 큰 기술도 많으니까.”
말과 함께 엘리오가 작정한 듯 구천검령을 불러냈다.
엘리오의 머리 뒤로 하늘을 가릴 듯 거대한 푸른 검 하나가 나타났다.
그걸 본 우샤스 운드라의 입에서 신음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으음. 역시 아스트랄 소드(Astral Sword)였구나.”
흔들리던 우샤스 운드라의 눈빛은 금방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아스트랄 소드는 본신의 능력만으로 무리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샤이틴님의 권능을 끌어다 쓸 수밖에 없다.
“엘리오여, 정녕 이세계에 멸망을 가져오고 싶은 것이냐?”
“헛소리 그만하고, 배신자답게 과오를 반성하며 조용히 가세요.”
엘리오가 검결지를 뻗자 푸른 검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흐흐흐. 하하하핫! 나는 배신자 따위가 아니라 혼란의 선봉장이다!”
큰 소리로 웃던 우샤스 운드라가 돌연 품에서 단검을 꺼내 자신의 심장에 박았다.
묘하게도 가슴에서는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카오스 아포칼립스!”
순간 땅이 솟구치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며 엘리오를 압살할 듯 찍어 눌렀다.
깜짝 놀란 엘리오는 이형환위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혼돈의 기운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솟구친 땅과 내려앉은 하늘이 엘리오와 푸른 검을 집어삼켰다.
어디선가 검은 구름이 몰려와 아포칼립스의 공간을 휘감았다.
하늘과 땅과 구름이 마치 어비스 입구처럼 검은 구체(球體)로 압축됐다.
곧이어 표면을 휘감고 있던 검은 구름이 수백 수천 조각으로 흩어지더니, 이내 창끝처럼 변해 구체를 파고들었다.
콰드드드―.
콰드드드―.
콰드드드―.
섬뜩한 파열음이 쉬지 않고 하늘에 울려 퍼졌다.
우샤스 운드라는 문득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제도 중구의 절반 가까운 땅거죽이 들고일어났으니 지상은 아수라장이었다.
그래도 엘리오를 죽이는 데 이 정도 희생이면 적은 편이다.
‘응?’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요함에 우샤스 운드라는 검은 구체로 고개를 돌렸다.
물 끓듯 들썩이던 카오스 아포칼립스의 표면이 갑자기 잔잔한 호수로 변해 있었다.
카오스 아포칼립스를 쉴 새 없이 곤죽 내던 카오스 스피어(검은 구름)도 멈춘 상태.
‘설마…….’
카오스 아포칼립스는 샤이틴님의 권능으로 만들어 낸 새로운 공간이다.
설사 마나 프트라스라 해도 그곳에 갇히면 죽을 터였다.
그때다.
검은 구체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순간 우샤스 운드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헉!’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펼친 아포칼립스다.
그것이 깨진다는 것은 즉, 자신의 최후를 의미한다.
소멸의 맹약이 완성되는 것이다.
‘안 돼!’
우샤스 운드라는 자신도 모르게 카오스 아포칼립스로 손을 뻗었다.
균열을 일으키던 궁극의 종말 마법, 카오스 아포칼립스가 마침내 폭발했다.
번쩍―!
그 찬란한 빛에 우샤스 운드라는 뻗어 가던 손으로 눈을 가렸다.
가늘게 뜬 그의 눈에 무려 아홉 개의 아스트랄 소드가 보였다.
사방으로 퍼져 나갔던 아스트랄 소드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우샤스 운드라는 자신의 가슴으로 뚫고 나오는 엘리오의 검을 보았다.
“끄아악―!”
검에 꿰뚫린 채 그는 엘리오의 앞까지 날아갔다.
카오스 아포칼립스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우샤스 운드라는, 저항할 의지를 잃고 피실피실 웃었다.
“후후, 너는 아느냐? 우리는, 어쩌면 마나 프트라스조차도 샤이틴의 뜻대로 움직였다는 것을.”
“상관없어.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돼.”
“네 발 아래를 보아라.”
엘리오는 우샤스 운드라를 경계하며 아래쪽을 슬쩍 확인했다.
제도 중앙의 절반이 초토화되어 있었다.
뛰어난 오감 덕에 사람들의 절규와 울음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네가 만든 것이다.”
뻔뻔한 우샤스 운드라의 말에 엘리오가 발끈했다.
“개소리! 내가 만든 ‘검의 화신’은 단 하나도 지상에 떨어지지 않았다! 네가 벌인 짓을 나에게 떠넘기지 마라.”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아포칼립스를 펼쳤겠느냐? 그러니 저것은 너의 책임이다.”
“나는, 내가 직접적으로 한 일 외에는 관심없어. 내가 하지 않은 일에 죄책감 느낄 정도로 착한 사람도 아니고.”
“그래, 하지만 이제부터는 죄책감을 가져야 할 게다.”
“내가 직접적으로 한 일이 아니라면 관심없다고 했잖아.”
엘리오는 우샤스 운드라의 숨이 빨리 끊어지기만을 바랐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궤변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후후,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똑똑히 기억해 두어라. 곧 이 세계에 아포칼립스가 찾아올 테니.”
“이 세계가 망하건 말건 나는 관심없다고!”
“나는 혼돈의 선봉장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를 혼돈의 선봉장으로 만든 것은…… 너다.”
순간 짜증이 난 엘리오는 우샤스 운드라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 같은 놈들이 있지. 자기 마음대로 나쁜 짓 하다가 남 탓만 하는 새끼들. 누가 너에게 마나 프트라스를 배신하라고 했냐? 샤이틴과 소멸의 맹약을 맺으라고 했냐? 사람들 부추겨 전쟁이나 일으키고! 뒤에서 여기저기 무기를 대 주고! 세상에서 온갖 분탕질을 치다가! 죽게 되니까 뭐? 나 때문이라고? 에라 이 병신 같은 놈아! 너 같은 놈이 무슨 신이라고!”
“…….”
그러나 어느새 숨이 끊어진 우샤스 운드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오는 멱살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우샤스 운드라의 시체는 마치 남궁연이 그랬던 것처럼 빛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엘리오는 긴장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샤스 운드라가 자기가 죽으면 검은 태양이 떠오르니 어쩌니 한 게 떠올라서다.
하지만 검은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엘리오는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자 공허의 검을 마하담에 넣었다.
그리고 구룡번신을 이용해 제도를 떠났다.
***
쉐이드 왕국.
왕성 노토스.
초저녁.
어두운 왕성 앞 들판에 한 청년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제도를 떠난 엘리오다.
“아, 깜짝이야. 이놈의 구룡번신 또 말을 안 듣네.”
본래는 허공에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려 했는데, 사람을 지면에 내리꽂아 버린다.
반신의 경지에 달한 무위가 아니었으면 어디 한 군데 부러졌을 것이다.
구시렁거리던 엘리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굳게 닫힌 성문이 보였다.
성벽에 벌집처럼 구멍이 뚫려 있는 걸 보니 꽤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것 같다.
제국군이 쉐이드 왕국까지 후퇴했다고 하는데 노토스를 누가 점령했는지 모르겠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그가 남부로 온 것은 라르바 오마르 백작 등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엘리오는 허공답보로 가볍게 성벽을 넘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거리 곳곳에 남부 왕국군이 보였다.
엘리오는 성 안에서 가장 큰 남부 왕국군 진영을 찾아갔다.
사령부로 들어가자 초로의 두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어서 오십시오. 나는 드니로프 왕국군 사령관 블레드 파토스 공작입니다.”
“참모장 라데 본다르크 백작입니다.”
엘리오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에스카토스 왕국의 엘리오 라고아 백작입니다.”
이윽고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빈자리에 앉았다.
참모장이 눈치껏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북부의 영웅이신 백작님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전쟁에 불참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함께 다니던 일행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은 남부 왕국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라르바 오마르 백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엘리오는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오마르 백작에 대해 잘 아는 걸 보면 찾는 게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참모장이 사령관을 힐끔 보자, 사령관 블레드 파토스 공작이 고개를 까닥였다.
“오마르 백작님은 지금 노토스의 왕성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뭐가요?”
“이 전쟁에 신들이 개입했으며, 라고아 백작께서 그 원흉 중에 하나인 어떤 신을 잡으러 다닌다고…….”
“어떤 신이 아니라 우샤스 운드라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여하튼 그래서 전쟁에 참여할 틈이 없으시다고…….”
말투가 조금 이상했지만 엘리오는 문제 삼지 않았다.
이 세계 사람들의 우샤스 운드라에 대한 믿음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사실입니다. 그럼 이만.”
엘리오가 일어나자 참모장이 마지못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사령관은 아예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사령부 앞까지 배웅을 나온 참모장은 참모 하나를 붙여 주었다.
길 안내를 위한 것이라지만 실은 라고아 백작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북부 왕국과 제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음에도 여전히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라고아 백작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나 우샤스 운드라를 섬기는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라고아 백작을 욕했다.
참모는 말 한마디 없이 왕궁까지 안내만 하고 돌아서 갔다.
“드니로프 왕국 사람들은 과묵하구나.”
남부 사람들이 그럴 리가 있나.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 주기로 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