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
14회. 피를 볼 테냐? 재물을 바칠 테냐?
나무에 박혀 파르르 떨고 있는 살대를 본 왕인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숲 속에 몇 명 더 숨어 있는 모양이다.
‘이거 길보다 흉이 많겠군.’
그는 지금까지 상대를 경시하던 마음을 비우고 침착하게 말했다.
“이제 보니 풍 선배셨군요. 오봉산채가 녹림에 이름을 올린 모양입니다?”
“그렇다. 그런데 너는 하루 종일 거기 서서 말만 할 셈이냐? 지금 당장 성의를 보여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여 버리겠다!”
미리 말을 맞춘 듯 산적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일단 산적들이 무기를 앞세우자 분위기는 한순간에 흉흉하게 변했다.
산행에 처음 따라나선 연적하의 위치는 가장 뒤쪽이었다.
연습과 실전은 다른 법.
탁고명을 따라 박도를 뽑는 순간 심장이 벌렁거리고 현기증까지 났다. 급히 구천여일진경의 법문을 암송하자, 뿌옇던 눈앞이 점차 선명해졌다.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자 풍운대 대주 왕인걸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풍 선배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행수님께 여쭤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뒷걸음질 쳐 임오군 행수의 곁에 섰다.
“행수님, 그냥 넘어가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통행세를 내라는 것 같은데, 어찌하시겠습니까?”
“대주가 보기에는 어떻소? 우리에게 승산이 있소?”
“눈에 보이는 적이 전부가 아니라서……. 솔직히 얼마나 희생이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임오군의 안색이 흐려졌다.
여기서 호위무사들을 잃으면 이번 상행은 끝이라고 봐야 한다.
“하아! 그렇다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도록 하십시다.”
결국 임오군이 머리를 숙였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오봉산채의 도적들은 왕인걸에게 은자 삼십 냥을 받고 조용히 물러났다.
왕인걸은 암암리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리하고 불리하고를 떠나서 싸움은 피하는 게 좋다.
일은 잘 마무리됐지만 돈을 지출한 임오군에게 조금 미안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도적에게 통행세를 바치고도 임오군은 희희낙락한 표정이었다.
궁금해진 왕인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정에 없는 통행세를 냈는데 괜찮으십니까?”
“나는 저들이 몇백 냥을 부를 줄 알았소. 그런데 삼십 냥이라니……. 상인들에게 갹출하면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오.”
“그렇긴 합니다만.”
족보에도 없던 산채에 통행세를 바쳤으니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야 대책 없이 와서 우리가 머리를 숙였지만…….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오. 남양의 본점에서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테니까.”
“오봉산채와 싸움이라도 벌일까요?”
“일단은 녹림 쪽 상황을 지켜보다가 때가 되면 한번 찔러 보지 않겠소?”
왕인걸은 마음이 무거웠다.
오봉산채와 싸움이 벌어지면 풍운대가 앞장설 게 뻔했다.
‘이 아름다운 산에서 피를 보아야 한다니…….’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왠지 임오군의 예측대로 될 것 같았다.
***
오봉산채는 완전히 잔치 분위기였다.
신입들을 데리고 나간 산행에서 대박이 났기 때문이다.
오봉산채의 일 년 수입이 평균 은자 백 냥이다. 오늘 단 한 번 산행으로 일 년 수입의 삼 할을 벌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기분이 좋아진 풍연초가 쉬지 않고 떠들었다.
“너희들 봤지? 그 왕인걸이라는 놈이 설설 기는 거. 야아! 그 새끼가 처음에 실실 웃을 때는 ‘피를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었는데……. 씨펄! 화살 한 발에 분위기가 그냥 싹! 가만, 그런데 누가 활을 쏜 거냐? 시키지도 않았는데.”
산적들의 시선이 천기덕과 한채연에게로 향했다.
한채연이 계면쩍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긴장을 해서 그만 실수를 했지 뭐예요. 너무 일찍 활시위를 당기는 바람에 힘이 빠져서……. 그래도 얼굴에 안 맞았으니 망정이지…….”
한채연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풍연초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핫! 막내야! 그래도 그 덕분에 은자 삼십 냥이 생기지 않았느냐? 잘했다. 잘했어.”
“헤헷!”
한채연이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탁고명이 넌지시 주의를 줬다.
“웃지 마, 이년아. 이번에는 운이 좋아 잘 풀렸지만 다음에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절대로 칼부림이 나기 전까지는 화살을 날리지 마라. 알겠냐?”
“네, 네.”
풍연초가 이번에는 연적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적하야, 오늘 직접 산행에 참가해 보니 어떻더냐? 할 만하디?”
“예.”
여섯째인 장소봉이 끼어들었다.
“큰형님, 이 녀석 떨지도 않고 아주 제법이던데요? 앞으로 계속 데리고 다니죠? 녹림대회 전에 경험을 쌓아야 하잖습니까?”
“그래, 나도 그 생각을 했다. 앞으로 적하는 산행에 빠지지 마라.”
“예!”
연적하는 형님들의 배려에 감동을 받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관심과 격려를 받아 본 적이 없다. 자연히 그의 대답에는 기합이 잔뜩 들어갔다.
***
연적하가 첫 산행을 나가고 사나흘 지났을까?
며칠 동안 놀고먹던 채주 풍연초가 아침부터 도적들을 불러 모았다.
“만수상방의 상인들이 하장촌에 들렀다고 한다. 오늘 중으로 오봉산을 지날 것 같다는데…….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하장촌은 오봉산 인근 마을인데 그곳 건달들이 종종 상방 정보를 팔아 먹곤 했다.
부채주인 탁고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채주님, 만수상방이라면 수주현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
“그쪽 호위무사들은 실력 좋고 거칠기로 유명한데……. 괜찮을까요?”
“안 괜찮으면? 우리는 녹림이야.”
남양상방으로 재미를 본 풍연초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탁고명이 머뭇거리자 풍연초가 말을 이었다.
“이래서 봐주고, 저래서 넘어가 주면, 손님 가려서 받는다고 소문이 돌 게다. 하장촌의 건달들이 우리를 우습게 볼 수도 있어. 이 바닥은 한 번 찍히면 죽을 때까지 숨죽이고 살아야 해.”
“……알겠습니다.”
풍연초의 말이 틀리지 않은지라 탁고명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일단 결정이 나자 탁고명은 수하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채주님 말씀 들었지! 장비 챙겨서 다시 모여라. 오늘 한번 제대로 털어 보자.”
“예!”
오봉산의 도적들이 각자의 움막으로 흩어졌다.
연적하도 얼마 전에 지급받은 박도를 챙겨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도적들이 모이자 풍연초는 천기덕과 한채연에게 말했다.
“지난번처럼 너희 둘은 숨어서 활 쏠 준비를 해라.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고.”
한채연이 힘차게 ‘네!’라고 답하자 풍연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사십여 명의 사람들이 오봉산에 접어들었다.
만수상방의 상인들과 호위무사들이 우마차만 해도 일곱 개나 되는 제법 규모가 큰 상행이었다.
선두의 우마차에 앉아 있던 행수 곽임생이 오봉산 봉우리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간밤에 잠자리가 뒤숭숭했는데……. 별일 없겠습니까?”
그러자 옆에서 걷고 있던 중년의 사내, 섬전검 강무덕이 호방하게 웃었다.
“하하하! 오봉산의 좀도둑들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탑하에 있는 해룡채도 만수상방의 백랑대라면 양보해 주지 않습니까?”
곽임생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해룡채는 사하(沙河)의 지류에서 수적질을 해 먹고사는 녹림수채다. 그런 녹림의 도적이 눈치를 볼 정도로 만수상방의 호위대가 강한 건 사실이었다.
“하하. 섬전검 강 대협이 곁에 있으니 든든합니다.”
“예, 염려 붙들어 놓으십시오. 좀도둑들이 얼쩡거리면 잡아서 사지를 분지르겠습니다. 들었느냐? 얼쩡거리는 놈들이 있으면 즉시 잡아들여라!”
대주 강무덕의 말에 백랑대 무사들이 ‘예!’ 하고 우렁차게 답했다.
그제야 곽임생은 조금 느긋하게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하기야 지난 오 년간 정주를 오가는 동안 단 한 번도 오봉산에서 사고가 난 적은 없었다.
그 뒤로 한식경(약 삼십 분)쯤 지났을까?
이마에 맺힌 땀을 옷깃으로 걷어 내던 곽임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밑동이 잘린 나무 한 그루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다.
달구지들이 하나둘씩 멈춰 섰다.
호위대 무사들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통나무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다.
휘이익. 퍽.
통나무 한가운데 창 하나가 날아와 박혔다.
그 반동으로 창대에 매달린 녹색 깃발이 세차게 흔들렸다.
순간 강호 경험이 풍부한 강무덕이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열두 명의 무사들이 신속하게 달구지 좌우로 정렬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상인들이 부랴부랴 달구지 주변에 모여 들었다.
준비를 마친 강무덕이 큰 소리로 외쳤다.
“불초는 만수상방의 호위를 맡은 강무덕이라 하오! 녹림의 영웅들께서 이곳 오봉산에 계신 줄은 몰랐소! 존성대명을 알려 주시면 그에 마땅한 예를 표하리다!”
잠시 후 양쪽 숲에서 여덟 명의 산적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채주인 풍연초가 살짝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기는 대별산채와 형제지간인 오봉산채의 구역이다. 지나가려면 응당 재물을 바쳐야 할 것이다!”
당당한 강무덕의 기세에 눌린 풍연초는 대별산채의 이름을 앞세웠다.
한편 도적들의 면면을 확인한 강무덕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녹림에서 세를 늘리기 위해 안달이라고 하더니 좀도둑들까지 끌어들인 모양이다.
“아! 오봉산채셨구려. 이 몸은 강호의 동도들에게 섬전검이라고 불리고 있소. 귀하의 별호는 어찌 되시오?”
“나는 오봉산채의 채주인 풍연초다.”
“풍연초가 별호요? 아주 특이한 별호구려.”
강무덕이 빙글빙글 웃으며 풍연초를 바라보았다.
놀림당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풍연초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쏘아 붙였다.
“피를 볼 테냐? 아니면 재물을 바칠 테냐?”
그러자 강무덕이 미소를 거두고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감히 너희 같은 좀도둑이 녹림을 사칭해 우리를 겁박하다니! 네놈이야말로 살고 싶으면 당장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라!”
강무덕은 녹림의 복수가 두려워 사칭으로 몰아붙였다. 나중에 녹림에서 뭐라고 하면 ‘몰라서 그랬다’고 발을 빼면 그만이었다.
풍연초가 당황한 얼굴로 부채주 탁고명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얼굴로 입술을 물어뜯던 탁고명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기서 살겠다고 머리를 조아렸다가는 녹림에서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
풍연초의 얼굴로 진땀이 흘러내렸다.
이제는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맞붙어 싸우는 수밖에 없다.
상대는 열셋.
그러나 저 강무덕이라는 자만 처리하면 승산이 있을 것도 같다.
하늘이 도왔는지 마침 강무덕은 천기덕과 한채연에게서 가까웠다. 숨어서 대기하고 있는 두 사람도 머리가 있다면 강무덕을 먼저 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캄캄하던 눈앞이 조금 밝아졌다.
마침내 풍연초가 칼을 뽑으며 소리쳤다.
“쏴라!”
쉬이익. 쉬익.
기다렸다는 듯 숲속에서 화살 두 발이 날아왔다.
세 사람의 마음이 통한 것일까?
두 개의 화살은 강무덕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뒷일까지도 풍연초의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강무덕의 별호는 섬전검.
타닥. 탁.
강무덕의 앞에 두 가닥 검기가 번득인다 싶더니 화살이 잘려 나갔다.
그 압도적인 무위에 놀란 풍연초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날아오는 화살을 베다니?
태어나서 저렇게 빠르고 정확한 칼질은 처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