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31
1431회. 바쁘신가 보네?
사흘 후.
석경장에서 연지안의 장례식이 열렸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막상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줄어드는 법이다.
이미 연적하도 없는 데다, 서풍표국의 전 주인이던 이만양까지 사망한 뒤였기에 내방객은 많지 않았다.
딸인 이설아 가족과 서풍표국 국주, 남궁세가 총관이 참가한 가운데 조촐한 장례식이 끝났다.
장례식 후 연지안은 석경장 가산에 이만양과 나란히 묻혔다.
어쩌다 보니 가산이 가문의 묘지로 변했지만 석경장을 물려받은 이설아는 오히려 좋아했다.
그날 밤.
자정 무렵 석경장의 가산에 한 남자가 깃털처럼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오래전 우화등선한 것으로 알려진 남천 연적하였다.
연적하는 애잔한 눈으로 애지중지 키웠던 딸의 무덤을 응시했다.
딸은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굴레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남궁연처럼 득도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는지, 인간으로 죽고 싶어서 그랬는지는 하늘만 알 일이다.
연적하는 한참 동안 묘비를 어루만지다 남궁연의 무덤으로 이동했다.
딸의 무덤에서 느껴지던 서글픈 감정 대신에 착잡함이 밀려왔다.
남궁연과 딸의 무덤은 겉으로 보기에 똑같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연지안은 상계에서 마신으로 존재했지만 자신의 딸로 끝났다.
그에 반해 남궁연은 자신의 처로 시작했지만…… 종국에는 어떻게 끝날지 알 수가 없다.
불로장생의 신선으로 살아가면서 그녀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인간으로 살았던 구십 년은, 신선에게 눈 한번 깜빡이는 시간에 불과할 터.
남궁연은 언젠가 구천현녀가 되고, 샤스트라 파라크티가 되었다가……. 그보다 더 높은 상계로 진출해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샤스트라 파라크티에게 구천현녀로 살아간 시간 역시 눈 한번 깜빡이는 순간에 불과했을 게다.
“하하…….”
연적하는 허허롭게 웃었다.
초월적인 지혜를 가진 남궁연이 그걸 몰랐을 리 없다.
정말 남궁연은 자신에게 늙어 죽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수도를 한 것일까?
부부의 인연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는 문득 남궁연과 살아온 세월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어린 시절에 처음 만나, 훗날 재회해 함께 강호를 주유하다, 혼인해 석경장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 그녀에게 느낀 것은 ―본 적도 없는― 어머니의 정이다.
그것이 후에 애틋한 사랑으로 변했다가, 쉰 살이 넘어가면서 두터운 정이 되었다.
두터운 정은 오래도록 그대로라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다 불현듯 그는 자기가 신선이 된 남궁연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구천현녀와 샤스트라 파라크티를 떠올릴 때마다 왠지 배신당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집착이 분명하다.
현생에서 잠깐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고 그녀가 영원히 자신의 아내일 거라고 생각했으니.
입맛이 쓰다.
원인을 알아냈음에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남궁연의 무덤 앞에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쓸쓸하게 돌아섰다.
남궁연은 진즉에 신선의 길로 떠났지만, 자신은 아직 그녀를 보내 주지 못했다.
머리가 뛰어나지 않은 자신도 이런데, 남궁연의 감정은 더할 터였다.
그는 지금은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반신과 신선에게 주어진― 불로장생의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어기충소의 신법으로 까마득히 날아오른 연적하는 서쪽 하늘로 날아갔다.
***
호광성.
무당산.
연적하는 오룡궁에서 멀지 않은 구천현녀의 사당을 찾아갔다.
육십여 년 전 처음 이곳에서 ‘네 번째 하늘’로 갔었다.
남궁연이 금선탈각 하여 선계로 떠나고, 딸의 장례까지 끝내고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보니 나온 곳이 여기다.
남궁연도, 딸도 ‘네 번째 하늘’로 가라고 한 적은 없다.
그러나 딸이 말한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곳’은 ‘네 번째 하늘’이었다.
구천현녀의 사당은 육십 년 전보다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나무로 만든 구천현녀의 상은 이제는 썩어서 떨어져 나간 곳도 있었다.
이러다가 조만간 사당이 허물어질 것 같았다.
착잡한 눈으로 사당 내부를 둘러보던 연적하는 마하담(공간창고)에서 향을 꺼내 불을 붙였다.
이윽고 그는 잔뜩 녹이 슨 향로에 향을 꽂고, 이전처럼 ‘태상정일강림신주(太上正一降臨神呪)’를 읊조렸다.
육십 년 전에는 구천현녀가 강림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향 하나가 다 타들어 갈 때까지 기다렸지만 끝내 구천현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응?’
연적하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낡은 사당 어디에도 구천현녀가 강림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구천현녀의 사당에서 간절하게 ‘태상정일강림신주’를 외우면 구천현녀가 강림할 거라 생각했다.
육십여 년 전 구천현녀도 ‘너의 바람이 닿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태상정일강림신주’는 유명교주가 과거 몸담고 있던 태일관의 비전 술법 중 하나다.
태일관의 도사들은 그 주문으로 신들과 만나곤 했다.
양여령(팔황신모)이 그 주문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을 만나 유명교를 창시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태일관은 고명산에 남아 있을 터였다.
유명교주와 적월을 떠올리던 연적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신과 대화하는 주문’까지 외워 가며 만나기를 간구했건만 구천현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문득 남궁천의 일로 소림사에 경고를 하러 가다 길을 잃은 일이 떠올랐다.
낡은 토지신 사당 근처에 천막을 치고 쉬던 중 갑자기 사당이 불타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구천현녀가 현현했었다.
구천현녀와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구천현녀의 사당도, 주문도, 간절한 바람도 아니다.
구천현녀가 원해야 만날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뭔가 조금 답답하고 억울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비록 반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본질은 인간에 불과한 때문이다.
“바쁘신가 보네?”
연적하는 대충 자리를 치우고 사당 한가운데 길게 드러누웠다.
딸의 임종과 장례식을 멀리서 지켜보느라 쉬질 못했더니 수마가 밀려왔다.
“이봐요.”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연적하는 부스스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구천현녀님?”
비몽사몽간에 구천현녀의 이름이 먼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구천현녀가 아니라 웬 중년 여자였다.
중년 여자의 뒤쪽에 노파가 눈살을 찌푸리며 구시렁거렸다.
“에이! 사지 멀쩡한 젊은 사람이 왜 사당에서 처자빠져 자. 산을 내려가면 널린 게 객점인데. 하여튼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개나 소나…….”
듣다 못한 연적하가 한마디 했다.
“할머니, 나는 개나 소가 아니라 사람인데요?”
그러자 노파는 미안해 하기는커녕 오히려 언성을 높였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왜 사당에서 그러고 있어? 여기 사당이 어딘지 몰라서 그래? 남천 님과 구천현녀님이 만난 영험한 곳이라고! 하여간 요즘 것들은 뭐가 중한지를 몰라. 일어났으면 냉큼 나가지 않고 뭘 쳐다봐?”
“아, 예.”
연적하가 밖으로 나가자 노파와 중년 여자는 제사용 음식[祭需]을 바치고 뭔가를 열심히 빌었다.
연적하는 당장 갈 곳이 떠오르지 않아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다.
남궁연이 선계로 떠나고, 딸마저 죽자, 마음 가는 곳이 없었다.
그때 사당에서 나온 노파가 그를 불렀다.
“이보게.”
“저요?”
노파의 정중한 말에 연적하는 보란 듯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래 자네. 여기 자네 말고 또 누가 있다고.”
“말투가 사당에 있을 때와 달라서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줄 알았죠.”
“그거야 자네가 사당 안에서 자빠져 자고 있었으니 그런 거고.”
노파의 말투가 다시 거칠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중년 여자가 서둘러 노파와 청년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머니, 진정하시고……. 제가 말할게요. 공자, 공자라고 불러도 돼요?”
“상관없어요.”
연적하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중년 여자가 그런 청년의 아래위를 살피며 계속해서 말했다.
“달리 갈 곳이 없어 보이는데 맞아요?”
“왜요?”
그러자 노파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왜긴! 그쪽이 우리 제사 음식에 손을 댈까 봐 그러는 거지! 배고프다고 제사 음식에 손댈 생각이면, 먹을 걸 줄 테니 따라와. 어쩔 거야?”
연적하는 노파와 중년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초면의 나그네에게 먹을 걸 준다는 걸 보니 심성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기야 그런 사람들이니 이 아침에 여기까지 올라와 제사를 드리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먹을 걸 주신다면야. 따라갈게요.”
“에이, 젊은 사람이 뻔뻔하기는.”
노파는 청년에게 한마디 하고 돌아서서 휘적휘적 산길을 내려갔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말씀은 저래도 불쌍한 사람을 그냥 보내지 않으시는 분이세요. 아, 공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에요.”
말을 마친 중년 여자는 부리나케 노파의 뒤를 따라갔다.
연적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불쌍해 보이나?’
반 시진(1시간)쯤 산을 내려가자 삼십여 가구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 나왔다.
객점이나 상점도 없는 게 마치 화전민 마을을 보는 듯했다.
노파와 중년 여자는 그중 제법 규모가 커 보이는 집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마당에 나와 있던 십 대로 보이는 소년 소녀가 중년 여자에게 다가왔다.
영악하게 생긴 소년이 낯선 청년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아휴! 그런 거 다 미신이라니까요. 공자님이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멀리한 거 몰라요?”
그러자 노파가 소년의 등짝을 ‘짝!’ 소리가 나도록 후려치며 야단쳤다.
“공자니 맹자니 주둥이만 산 놈들 이야기는 떠받들면서, 이 할미 말은 무시하는 거냐?”
“아야야! 할머니! 구천현녀니, 남천이니 하는 건 다 미신이라고요. 조총(鳥銃) 한 방이면 무림 고수도 픽픽 나자빠지는 세상에 무슨…….”
“이놈이 그래도?”
노파가 다시 손을 치켜들자 소년은 제 누이의 뒤로 달아났다.
조손의 싸움을 지켜보던 중년 여자가 소년에게 말했다.
“너도 그만해. 할머니와 엄마가 너랑 누나 잘되라고 빌어 주면 감사는 못 할망정, 손님 앞에서 부끄럽게 뭐 하는 짓이야?”
청년을 힐끔거리던 소년의 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어머니, 손님은 누구세요?”
손자와 신경전을 벌이던 노파가 중년 여자보다 한발 빠르게 답했다.
“손님은 아니고, 사당에서 만난 사람이다. 아직 아침을 못 먹었다고 해서 뭐라도 먹이려고 데리고 왔다. 네 아범은 어디 있느냐?”
“뒤뜰에요. 무너진 담장을 고치고 계세요.”
“그래? 소옥이 너는 엄마를 도와서 저 사람 먹을 거나 좀 내와라. 그리고 소룡이 너는 가서 글을 읽고. 커서 네 아비처럼 고생하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해.”
중년 여자와 소옥이 부엌으로 향했음에도 소룡이라는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못마땅한 눈으로 손자를 보던 노파가 청년에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면 며느리와 손녀가 먹을 걸 곧 내올 걸세.”
말을 마친 노파는 뒷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뻘쭘한 얼굴로 서 있던 연적하가 빈둥거리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글공부하러 안 가냐?”
“저는 상단에 들어갈 건데요?”
“그러면 더 열심히 글을 읽어야지. 무식한 사람은 써 주지도 않아.”
“상단 호위무사는 글공부보다 무술에 능통해야 돼요. 저는 호위무사가 될 거예요.”
“그래서 배우는 건 있고?”
순간 소년, 소룡이 좌우를 살피더니 작게 말했다.
“없죠. 그래서 조만간 균현으로 달아나려고요. 일단 객잔이나 주루에서 돈을 모으고, 그다음에 값싼 무관에서 무술을 배울 거예요.”
“거지가 되겠다는 소리네.”
“와아, 이 아저씨. 은혜를 악담으로 갚으시네?”
“은혜가 뭔지 몰라도 아직 안 받았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옥이 소반에 음식을 받쳐 들고 나왔다.
연적하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가 식사를 마치고 냉수로 입가심을 할 때, 노파가 중년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중년 남자는 낯선 청년과 눈이 마주치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행색을 보니 도적이나 유랑인은 아닌 것 같고, 뭐 하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