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30
1430회. 이제 가셔도 돼요
석경장 객청.
밤이 깊어지자 손녀인 이설아가 피곤하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친과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연지안이 말했다.
“어머니가 우화등선을 하시기 전에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뭐라고 하더냐?”
“아버지를 놓아줘야 한다고 하셨어요.”
“쯧! 너에게도 그런 소리를 했구나. 네 엄마에게도 말했지만, 네 엄마를 잡고 있던 건 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결론 내렸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이 세계는 아버지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그래서 아버지가 더 외롭고 쓸쓸한 거라고.”
“절대자는 어느 시대나 외로운 법이지.”
“아버지 앞에서는 그 절대자들마저도 티끌과 같은 존재잖아요. 아버지를 제도 따위가 만든 권력자들과 비교하면 안 되죠.”
“뭐, 아무튼 그 자리에서 느끼는 감상도 나와 다르지 않을 게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살고 있죠. 아버지는 행여나 세상이 망가지기라도 할까 봐 석경장에 칩거하셨고.”
“내가? 그건 오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산 사람이다.”
“아버지는 이 세계에서 배제된 분이세요. 아버지가 그러기를 원하셨고, 세계도 결국 아버지의 뜻에 따랐죠. 무림인들이 아버지를 신선이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른 세계에 속한 분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연적하는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딸의 말처럼 자기 뜻대로 산 것은 녹림 총순찰로 있을 때뿐이었다.
상계인 ‘왕들의 하늘’에 다녀온 뒤로 자신은 이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이 세계는 딸의 말처럼 너무 약해서 조금만 방심해도 부스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눈은 다른 세계를 향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럼에도 이 세계에 머무르는 건 어머니 때문이라고.”
“…….”
연적하는 반박하지 않았다.
남궁연도 없는 마당에 굳이 변명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다.
게다가 남궁연은 항상 옳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최근 몇 년간 아버지가 천하를 떠돌아다니시는 거 알아요.”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니까.”
“혹시라도 저와 설아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는 거라면……. 저도 어머니와 같은 말을 하고 싶어요. 저희들에게 붙잡혀 계시지 말라고.”
“지안아. 너는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고, 설아는 그런 네가 낳은 손녀다. 그리고 연호는…….”
“네, 아버지의 손녀가 낳은 증손자죠. 하지만 아버지.”
연지안은 잠시 말을 끊고 자신보다 한참 젊어 보이는 아버지를 응시했다.
어머니에게 전수받은 천지종의 주안술을 익힌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아버지였다.
자신은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사십 대로 보여 딸 설아의 질투를 사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여전히 이십 대의 모습이다.
증손자 섭연호와 같이 돌아다니면 친구인 줄 알 게다.
“저는 어머니와 비교하면 내공이 일천해요. 머지않아 내력이 흩어지기 시작하면……. 눈에 띄게 늙어 갈 테지요.”
그것이 주안술의 단점이다.
나이가 들어 내력이 쇠퇴하면 피부는 점차 탄력을 잃는다.
그러다 종국에는 평범한 여느 노파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게 된다.
연적하는 애잔한 눈길로 딸을 보았다.
팔뚝보다도 작던 핏덩어리가 어느새 저런 말을 할 정도로 늙었다니.
자식을 보면 자신이 늙은 걸 알게 된다는 말은, 옳다.
겉모습이 이십 대인 자신도 딸 앞에서만큼은 말투부터가 근엄하게 바뀐다.
딸 앞에서 자신의 나이를 자각한다.
“저는 어머니와 달리 평범한 사람으로 늙어 죽을 거예요. 설아와 손자에게 생로병사 하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삶을 보여 주고 싶어요.”
“…….”
“설아가 아버지에게 ‘왜 나한테는 수도하라고 말하지 않느냐?’ 물었을 때, ‘아차!’ 싶었어요. 설아와 손자가 그들보다 젊은 아버지를 보면서……. 유명교주처럼 헛된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순간 연적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명교주를 떠올리니 딸이 왜 질색을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어쩌면 자신은 손녀와 증손자에게 불로장생의 유혹일지도 모르겠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곤혹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보며 연지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아버지에게 어울리는 세계로 가세요. 아버지를 두려워하기만 하는 세상이 아니라, 아버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상으로요.”
연지안은 굳이 ‘네 번째 하늘’을 언급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연적하는 뭐라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딸의 바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말은 상념이 되어 입속에서 맴돌기만 했다.
다음 날 아침.
딸과 손녀의 가족들이 돌아가고 석경장은 다시 이전의 고요를 되찾았다.
점심 무렵, 연적하는 서각을 둘러본 뒤에 약제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발길을 끊은 지 오래된 서각과 약제당은 보기만 해도 을씨년스러웠다.
연적하는 내친김에 석경장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남궁연과 딸, 심통과 월아와 금아, 그리고 당운망과 한채연, 하소백, 이연지, 풍연초와 그 가족들과의 일들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소리쳐 부르면 금방이라도 달려와 줄 것 같지만, 그럴 리가 만무하다.
마지막으로 연적하는 ―남궁연의 무덤이 있는― 가산을 찾아갔다.
쓸쓸한 눈으로 무덤과 묘비를 보던 연적하는 문득 생각했다.
선조의 무덤을 돌본다고 해 봐야 길어야 삼대다.
당장 자신만 해도 부모 외에는 알지도 못한다.
증손자인 섭연호야 자신과 명절마다 만났으니 기억해 주겠지만 그다음은?
섭연호의 자식들에게 남궁연은 아주 먼 조상 중 한 분에 불과할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먼 조상의 무덤을 잘 관리해 줄까?
그럴 리 없다.
설상가상이라고 홀로 있는 남궁연의 무덤이 왠지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다.
장례를 치르고 남들이 하자는 대로 하다 보니 무덤까지 만들었지만, 지금은 후회가 된다.
‘아닌가.’
평범하게 살기를 바란 딸을 생각하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먼 후손은 아니더라도, 당장 딸에게는 부모를 기념할 장소가 있어야 할 터였다.
잠시 생각하던 연적하는 남궁연의 무덤 옆에 나란히 똑같은 모양의 봉분을 만들었다.
제법 그럴싸해 보이자 그는 남궁연의 묘비를 뽑아 그 가운데 다시 세웠다.
그리고 묘비에 새겨진 글자를 ‘연적하와 남궁연 이곳에 잠들다’로 고쳐 적었다.
누가 봐도 괴발개발의 글씨체지만 딸은 오히려 좋아하리라.
흐뭇한 눈으로 한 쌍의 무덤을 보던 연적하는 다시 안채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안채를 청소하던 시비가 서탁에서 연적하의 유언장을 발견했다.
뒤이어 석경장의 일꾼들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진 ‘연적하와 남궁연의 무덤’을 확인한 관리인은 급히 서풍표국으로 달려갔다.
충격적인 소식에 깜짝 놀란 이만양과 달리 연지안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뒤를 따라 우화등선하신 것 같다’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연지안이 ‘이번 설에 아버지가 어머니처럼 우화등선할 뜻을 내비쳤다’고 하자 더 이상 연적하의 최후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공식적으로 남천 연적하는 현세를 떠난 사람이 됐다.
많은 사람이 ‘늙어 죽었다’고 했지만, 그의 우화등선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이야 어떻든 연적하의 후손들은 그날 이후 연적하를 만나지 못했다.
유언에 따라 연지안이 석경장을 물려받았다.
그해에 연지안과 전임 서풍표국주 이만양은 석경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듬해, 이만양이 덜컥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사십 대로 보이던 연지안도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갔다.
여강현의 의원은 ‘배우자를 잃은 충격으로 그렇게 됐다’고 진단을 내렸다.
충격이든, 천지종의 주안술로도 어쩔 수 없는 자연 현상이든 간에 연지안은 노파가 됐다.
‘자신이 죽을 때’를 아는 사람이 있다.
연지안이 그랬다.
어느 날 그녀는 명절도 아닌데 딸과 손자를 석경장으로 불러들였다.
환갑을 넘긴 딸과 중년의 손자, 그리고 손자의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연지안의 표정은 밝았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어쩌다 불로장생의 길로 들어섰고, 어머니는 지금의 자신과 같은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이기 싫어 신선이 됐지만 말이다.
밤이 깊어지자 딸과 손자, 손자의 가족들은 객청으로 돌아갔다.
흐릿한 유등(油燈) 아래 연지안은 어디 있는지 모를 아버지를 떠올렸다.
지금쯤 ‘네 번째 하늘’에서 모험을 즐기고 계시리라.
아버지는 천생 여행자다.
당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호기심 많고, 남의 일에 관여하시길 좋아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녹림 총순찰은 아버지 천성에 딱 맞는 일이었다.
그런 분이 자그마치 칠십 년이나 석경장에 칩거했으니, 그걸 보는 어머니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그 정도로 컸다.
‘아버지…….’
연지안이 마음속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다.
유등이 가볍게 흔들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지안은 누운 상태에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운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
“그래. 나다.”
“아버지가 왜 이곳에 있어요? 설마 아직 떠나지 않으셨던 거예요?”
연적하가 늙은 딸의 침상 머리맡으로 의자를 가져다 앉으며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던? 나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고.”
“후후…….”
연지안은 힘없이 피실피실 웃었다.
아무리 그런 분이라도 그렇지, 무덤까지 만들어 놓고 사라진 분이 현세에 남아 있을 줄이야.
“그동안 어디에서 뭘 하고 계셨어요?”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백두마군들을 찾아다녔다. 내 후손이 그들로 인해 피해를 입으면 안 되니까. 염마왕의 잔재를 현세에 남겨 두고 싶지도 않았고.”
연적하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현세에서 분탕질 치게 둘 마음이 없었다.
“일은 잘됐어요?”
“그래.”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백두마군은 물론 십두마병도 없다. 현세의 주인은 인간이었다.
“제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했었지만…… 실은 아버지가 보고 싶었어요.”
“안다.”
“아버지.”
“응.”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다행이에요. 아버지는 반신이지만 누구보다 인간다운 분이세요. 신선이 된 어머니보다 훨씬 더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나. 하지만 널 지금처럼 반듯하게 잘 키운 건 내가 아니라 네 엄마다. 내가 키웠다면 누구도 못 말릴 개차반이 됐을 게다.”
“후후.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가진 절반은 아버지에게서 온 걸요.”
“그래, 머리는 네 엄마가 아니라 나를 닮은 게 분명해.”
“푸후훗!”
연적하의 농담 같은 진담에 연지안은 가슴이 들썩이도록 웃었다.
한참을 웃던 연지안이 이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가셔도 돼요.”
“…….”
못마땅한 얼굴로 딸을 보던 연적하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딸이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지막이 될 게 분명한 딸의 얼굴을 연적하는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진짜 간다?”
“제발요.”
순간 연적하는 허리를 숙여 딸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유령처럼 사라졌다.
그제야 연지안은 만족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새벽 무렵, 가물가물 타오르던 유등은 바람도 없는데 저 혼자 스르륵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