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61
1461회. 용기 있는 자만이 미녀를 얻는다
오후 4시.
승전 축하 공연 1시간 전.
빅토리아 주점.
에리카 노블이 거울 앞에서 떠나지 않자 트레이시 골드가 웃으며 말했다.
“에리카, 하비 씨가 온다고 너무 힘주는 거 아니야?”
하비는 스테마 그리프 자작의 아들이다.
에리카가 프리치아 왕국에 있을 때 그와 몇 차례 만난 걸 알고 놀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리카는 화장을 고치며 가볍게 응수했다.
“하비 씨는 후원자의 가족일 뿐이에요. 그를 만나기 전에 내가 화장을 10분 이상 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중요한 날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 예를 들어 하비 씨가 청혼을 할 것 같다거나.”
“왜요, 언니? 내가 바르도스를 그만두었으면 좋겠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것 같았지만 에리카의 음성에는 은근 날이 서 있었다.
트레이시가 좋은 뜻으로 하비 그리프를 거론하는 게 아님을 알아서다.
“언니라고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언니 소리에 트레이시가 질색을 했다.
에리카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났을 뿐인데 퇴물 취급 당하는 기분이 들어서다.
“자꾸 쓸데없이 하비 씨 이름을 거론하면 공연장에서 언니라고 부를 거예요.”
“알았어, 알았으니 그만해. 하비 씨 때문도 아닌데 왜 그렇게 화장에 공을 들이는 거야? 설마…… 진짜 소문이 맞는 거야?”
바쁘게 움직이던 에리카의 손이 멈칫했다.
공연계는 본래 소문이 빠르다.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아도 귀족들 모임에 자주 참석하다 보면 절로 알게 된다.
그녀도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자신이 사귄다는 소문을 알고 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마는 전혀 아니다.
라고아 백작이 이전보다 자상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때 공연 기획자 알렌 바우처가 꽃다발을 들고 대기실로 들어왔다.
에리카와 트레이시의 대화도 자연히 끊어졌다.
알렌이 트레이시를 힐끔 본 후에 에리카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말했다.
“에리카, 하비 그리프 씨가 보낸 꽃다발이다. 응원의 카드가 꽂혀 있는 것 같더라.”
꽃다발을 든 에리카가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 트레이시에게 하비 씨와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했는데 하필 이때 꽃다발이라니.
역시나 트레이시가 한마디 했다.
“불쌍한 하비 씨가 알려나 모르겠네. 에리카는 다른 남자와 열애 중인데.”
그러자 알렌이 놀란 눈으로 에리카에게 물었다.
“사실이냐?”
“알렌 씨는 트레이시 언니가 농담 잘하는 거 알면서 왜 그러세요?”
“아! 아니지? 트레이시, 대귀족을 상대로는 그런 농담하면 큰일나니까 입조심해라. 특히나 라고아 백작은 왕들도 어려워하는 사람이야. 함부로 입 놀리다가 훅 가는 수가 있어.”
“어머, 알렌 씨는 왜 에리카의 말만 듣고 그러세요? 에리카가 한 시간 넘게 거울 앞에 앉아 있다는 걸 알면 그런 소리 못 할걸요?”
그러자 알렌의 시선이 이번에는 에리카를 향했다.
에리카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화장이 오늘따라 잘 안 먹어서 그래요. 자꾸 들떠서 마무리가 잘 안 되네요.”
트레이시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네 마음이 들뜬 건 아니고?”
“언니. 그만 좀 하시죠?”
“알렌 씨도 보셨죠? 얘 눈 똑바로 뜨고 나에게 뭐라고 하는 거. 라고아 백작을 물었다고 이젠 아래위도 없다니까요.”
트레이시의 말에 에리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알렌은 모처럼의 큰 공연을 망치고 싶지 않아 얼른 중재에 나섰다.
“자 자, 여기까지만 하자고. 북부의 난다 긴다 하는 귀족들이 다 모인 자리니까, 서로 협력해서 최고의 공연을 보여 줘야지. 에리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오늘 그 어느 때보다 예쁘니까. 아, 물론 트레이시도 마찬가지고. 자아, 그럼 나는 이만 마무리 준비를 해야 해서.”
알렌은 주의를 환기시킨 후 서둘러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뒤이어 트레이시도 ‘흥!’ 하고 냉소를 날린 후 대기실을 떠났다.
화를 삭이지 못한 트레이시는 주점 뒷문으로 나갔다.
“뻔뻔한 계집애. 뭐? 화장이 안 먹어?”
에리카의 피부는 고와서 10분 이상 화장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무려 한 시간이 넘게 거울 앞에 앉아서 화장을 고치고 한다는 말이 ‘화장이 들떠서’란다.
누가 봐도 라고아 백작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면서 말이다.
“흥! 양손에 케이크야 뭐야?”
구시렁거리는 그녀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트레이시 씨?”
깜짝 놀라 돌아보던 트레이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는 공교롭게도 하비 그리프였다.
“하비 씨?”
“하하, 트레이시 씨의 공연은 잘 보고 있습니다.”
하비 그리프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사실 그는 꽃다발이 잘 전해졌나 살짝 보러 온 것이었다.
트레이시 역시 그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귀족가 청년들이 바르도스 주변을 기웃거리는 건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꽃다발이 잘 전해졌는지 궁금해서 오셨죠?”
“역시 트레이시 씨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요. 그렇습니다.”
“꽃다발은 잘 전해졌어요.”
순간 하비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러나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데…… 아직 소문 못 들으셨나 봐요?”
“소문요?”
“에리카가 요즘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거 모르셨어요?”
“다른 남자요?”
하비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트레이시는 놀란 얼굴로 좌우를 살피며 속삭이듯 말했다.
“소리 좀 줄이세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흥분을 했군요. 에리카 씨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게 사실입니까?”
“하아! 저도 얼마 전까지는 소문이려니 했는데……. 에리카가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누굽니까?”
“아마 하비 씨도 아는 사람일 거예요.”
“제가 안다고요? 누굽니까? 그 사람이?”
하비의 재촉에 트레이시가 마지못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라고아 백작요.”
순간 하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로서는 갑자기 튀어나온 라고아 백작의 이름이 영 실감 나지 않은 까닭이다.
“에스카토스 왕국의 서부군 사령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요.”
“그분이 에리카 씨와 사귄다고요?”
“네, 에스카토스 왕국군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비가 프리치아 왕국군이라 알지 못한 것일 뿐 에스카토스 왕국군에서는 유명했으니까.
넋 나간 얼굴로 서 있던 하비가 확인하듯 물었다.
“조금 전 양손에 케이크라고 하신 게…… 저와 라고아 백작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까?”
“……들으셨다면 죄송해요. 그 애가 원래 화장을 10분 이상 안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 라고아 백작이 온다고 한 시간 넘게 화장을 고치더라고요. 하필 그때 알렌 씨가 꽃다발을 전해 줬는데…… 또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으니……. 나도 같은 여자지만 화가 나서 그만.”
“라고아 백작과 에리카 양이 교제하는 게 확실합니까?”
“에스카토스 왕국군을 잡고 물어보세요. 아마 다 맞다고 그럴걸요? 그런데 하비 씨가 에리카와 사귀는 게 아니었어요? 우리는 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트레이시의 물음에 하비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정식으로 사귀자는 말은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에리카 양을 좋아합니다. 에리카 양도 그런 제 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완전히 아니라고 하기도 좀 그렇군요.”
“그랬군요. 그래서 제가 양손의 케이크라고 말씀드렸던 거예요. 인기 바르도스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 있거든요.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보다가, 가장 좋은 조건의 상대에게 정착하는 그런 거요. 에리카도 스물다섯이니 슬슬 결혼을 생각할 때가 되긴 했죠. 서른을 넘기면 원하는 상대를 잡기가 어렵거든요.”
“에리카 양이 저와 라고아 백작을 두고 저울질 중이라는 건가요? 제가 라고아 백작의 상대는 못 될 텐데요.”
하비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고작 자작의 아들과 북부 최고의 기사인 라고아 백작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백 명이면 백 명 다 라고아 백작을 선택할 터였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요. 라고아 백작과 같은 대귀족이 라무스(성씨를 가진 평민)를 정실로 맞아들일 것 같아요? 북부의 왕실과 대귀족 들 중에 미녀가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당장 프리치아 왕국의 프리실라 공주님만 해도 에리카보다 아름다워요. 에리카는 왕실과 대귀족의 진짜 미녀들 앞에서는 얼굴도 못 내밀어요. 그걸 에리카가 모를까요? 자기가 라고아 백작의 불장난 상대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걸 아니까, 손에서 하비 씨를 놓지 않고 있는 거라고요.”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에리카 씨가 백작에게 버림받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란 말입니까?”
자조적인 하비의 질문에 트레이시가 말했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녀를 얻는다’는 말 몰라요? 백작이 에리카와 불장난을 하지 못하게 막으세요.”
“어떻게요?”
“오늘 백작 앞에서 하비 씨가 에리카의 남자라는 걸 밝히고, 정중하게 부탁하세요. 에리카와 만나지 말아 달라고. 대귀족 체면에 더는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을 거예요.”
“라고아 백작은 그랜드 마스터입니다. 그런 소리를 하면 저는 죽을 겁니다.”
“그 정도 용기와 결기도 없이 에리카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라고아 백작은 살인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하비 씨의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들어줄걸요?”
자작가의 장남인 하비는 떠받들어 주는 생활에 익숙하다 보니 귀가 얇았다.
그녀 말처럼 왠지 자신의 용기를 라고아 백작이 가상하게 여겨 줄 것도 같았다.
“트레이시 씨, 당신이 내 은인입니다. 오늘 일이 잘되면 평생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하비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이내 결연한 얼굴로 돌아섰다.
***
오후 5시를 조금 넘긴 시간.
빅토리아 주점.
마나석을 이용한 간접 조명으로 주점 내부는 밖과 달리 밝았다.
바르도스의 연주와 노래로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그때 주점 문이 열리더니 세 명의 기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오, 파비안, 하워드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점원에게 하워드가 몇 마디 하자, 깜짝 놀란 점원이 세 사람을 무대 가장 앞자리로 안내했다.
느긋하게 앞자리에 앉아 있던 대귀족들이 라고아 백작을 알아보고 앞다퉈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엘리오는 계면쩍은 얼굴로 그들의 인사를 받은 뒤 자리에 앉았다.
바르도스의 공연에는 순서가 있다.
예컨대 보조가 분위기를 띄우면, 주연이 나오는 식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트레이시와 에리카 모두 주연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트레이시는 에리카의 보조로 한 계단 낮아졌다.
지나친 음주와 흡연으로 성대에 무리가 오면서 목소리가 변한 탓이다.
보통 그 정도 되면 은퇴하는 게 일반인데 트레이시는 꿋꿋하게 버티었다.
트레이시의 에리카에 대한 질시가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다.
비파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트레이시의 눈이 빛났다.
마지막 노래가 끝나자 트레이시는 퇴장하기 전 문득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 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북부 최고의 기사인 엘리오 라고아 백작님, 백작님의 헌신으로 마족에게서 북부를 되찾았습니다. 북부의 이름 없는 주민들을 대신해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라고아 백작을 향해 허리를 숙이자, 엘리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가 가라앉을 즈음, 구석진 자리에서 한 청년 기사가 벌떡 일어났다.
사랑의 열병을 앓는 하비였다.
트레이시는 하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묘한 미소와 함께 퇴장했다.
곧이어 에리카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라고아 백작을 발견한 에리카가 환하게 웃으며 눈인사를 건넸다.
순간 하비가 성난 수컷 코끼리처럼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