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62
1462회. 하비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와아아!”
“짝! 짝! 짝!”
에리카 노블이 등장하자 젊은 귀족들이 환호와 함께 박수를 쳤다.
순간 공연 기획자 알렌 바우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히르헤라에 집결한 북부 왕국 연합에는 의사 결정을 위한 기구가 없다.
문제가 발생하면 국왕과 사령관 들이 모여 회의로 결정했다.
그나마도 주제는 마족과의 전쟁에 한정되어 있다.
문화 교류나 왕국 간 교역은 애초에 논의의 대상이 못 됐다.
그런 것을 할 여건도 아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바르도스들의 공연은 전적으로 공연 기획자들과 ―문화 예술을 애호하는― 귀족의 손에 달려 있었다.
새로 단장한 빅토리아 주점에서의 승전 축하 공연은 자신과 스테마 그리프 자작이 계획한 역사적인 공연이다.
혹자는 ‘바르도스의 공연이 거기서 거기가 아니냐.’ 말할지도 모른다.
피해가 덜한 왕국에서는 벌써 몇 번이나 공연이 열렸을 것이다.
공연 기획자와 바르도스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 곳과 히르헤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히르헤라가 북부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북부 왕국 연합군이 해체되기 전까지 그 지위를 누릴 터였다.
게다가 히르헤라에는 국왕들과 대귀족들이 대거 운집해 있다.
히르헤라에서의 공연 한 번이, 십 년간 왕국을 떠돌아다니는 것보다 낫다.
다른 공연 기획자와 바르도스들이 안전하게 후방을 전전할 때, 자신은 데리고 있는 바르도스들을 설득해 히르헤라로 진출했다.
그리고 얻은 첫 결실이 ‘북부 왕국 연합군 승전 축하 공연’이었다.
지금 알렌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앞으로 며칠간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북부 왕국에서 자신은 가장 유명한 공연 기획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한참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던 알렌이 눈을 찌푸렸다.
‘응? 하비 씨가 왜?’
스테마 그리프 자작의 장자인 하비 그리프가 무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공연 전에 꽃다발이라도 주려나 싶었지만, 하비의 표정이 곧 죽을 자리로 돌격하는 기사처럼 비장하기만 했다.
‘뭐지? 왜 저러지?’
공연 전에 꽃다발은 자신이 잘 전해 주었다.
그렇기에 평소 매너 좋았던 하비의 돌발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프 연주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하프의 현을 어루만졌다.
샤라라랑―.
아름다운 하프의 음률이 실내에 퍼져 나갔다.
전주가 끝나고 막 에리카가 노래를 시작하려 할 때 사달이 일어났다.
하비가 돌연 엘리오 라고아 백작 앞에 우뚝 멈춰 선 것이다.
에리카는 당황했지만 못 본 척 노래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끝내 그녀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하비가 라고아 백작을 향해 허리를 접으며 큰 소리로 외쳤기 때문이다.
“라고아 백작 각하! 저는 에리카 양을 사랑합니다! 저에게서 에리카 양을 빼앗아 가지 말아 주십시오!”
감미로운 하프의 선율에 어울리지 않는 꽤나 비장한 대사였다.
순간 파비안이 ‘풉!’ 소리와 함께 머금고 있던 맥주를 내뿜었다.
뒤늦게 이상을 눈치챈 하프 연주자가 얼른 연주를 멈췄다.
기이한 적막이 실내를 휘감았다.
왕족과 대귀족 들은 야릇한 시선으로 라고아 백작과 청년 기사를 번갈아 보았다.
숨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물론, 눈 하나 깜빡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하비가 말을 이어 갔다.
“각하의 주변에는 아름다운 여성분들이 많겠지만…… 저에게는 에리카 양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부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리카가 말했다.
“하비 씨. 저의 공연 중에 난입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저와 하비 씨가 무슨 사이라고 라고아 백작님에게 그런 소리를 하세요? 아니, 무엇보다 라고아 백작님이 왜 하비 씨에게 그런 경우 없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연이어 에리카의 시선이 라고아 백작을 향했다.
“라고아 백작님, 하비 씨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비가 끼어들었다.
“저와 에리카 양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제가 에리카 양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까? 알면서도 몇 번이고 저와 만나지 않았습니까? 제가 싫었다면 만남을 거절했어야지요. 하지만 에리카 양은 제 마음을 알면서 계속해서 저를 만나 주었습니다. 라고아 백작님이 나타나기 전까지, 에리카 양은 저의 마음을 받아 주었습니다. 에리카 양,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라고아 백작님에게 에리카 양은 스쳐 지나가는 매력적인 바르도스일 뿐입니다. 진짜 라고아 백작님이 에리카 양을 정실로 받아들여 줄 거라 생각합니까? 평생 에리카 양 옆에 있어 줄 사람은 저 하비란 말입니다.”
하비의 말에 놀라고 기가 막힌 에리카의 입이 쩍 벌어졌다.
후원자의 장자이기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몇 번 만나 준 것을 그렇게 해석하다니!
그녀는 뒤늦게 ‘그리프 자작과 어색해지더라도 만나 주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책을 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라고아 백작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라도 라고아 백작이 그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어쩌나 했는데, 놀랍게도 그의 표정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담담했다.
그때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땡! 땡! 땡! 땡! 땡―!
종을 연타하는 걸 보니 어딘가의 방어선이 뚫린 것 같았다.
몇몇 귀족들은 조용히 자리를 떴지만, 대귀족들은 본체만체했다.
히르헤라에 북부 왕국의 힘이 몰려 있으니 걱정할 이유가 없어서다.
주점 내부를 둘러보던 엘리오가 차갑게 말했다.
“어디 구경났나 봐.”
순간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우르르 일어나 밖으로 튀어나갔다.
대귀족들도 겁이 나는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상인 것 같으니 가 봐야겠군.”
“전하,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설마, 마족은 아니겠지.”
왕족과 대귀족 들이 되지도 않을 소리를 하며 빠르게 사라졌다.
귀족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실내에 엘리오 일행과 하비, 에리카만 남았다.
묵묵히 하비를 응시하던 엘리오가 말했다.
“하비라고 했나? 자네의 그 병신 같은 소리는 잘 들었다. 북부의 귀족들 앞에서 잘도 나를 모욕하는군. 너는 몇 마디 말로 나를 ‘임자가 있는 바르도스를 노린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저는 단지…….”
그러나 엘리오는 하비에게 변망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닥쳐 이 새끼야!”
라고아 백작의 일갈에 하비는 찔끔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귀족들 앞에서 나와 에리카 양을 속물로 공격하기 전에, 너는 확인부터 했어야 했다. 나와 에리카 양이 정말 사귀는 사이인지, 너에 대한 에리카 양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를.”
“…….”
하비는 라고아 백작의 지적에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가장 중요한 ‘사실 확인’을 건너뛰고 일부터 저질렀다.
만약 라고아 백작의 말처럼 둘의 사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자신은 그야말로 죽으려고 환장한 놈이 되고 만다.
갑자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된 하비는 고개를 툭 떨구었다.
엘리오가 이번에는 에리카를 향해 말했다.
“에리카 양, 이 어리석은 놈에게 에리카 양이 왜 그랬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엘리오는 욕은 퍼부었지만 죽이고 싶을 만큼 하비가 밉지 않았다.
어차피 세간의 명예에는 관심도 없다.
그가 울컥한 것은 단지 하비가 제멋대로 타인에 대해 입을 놀려서다.
한순간 자신은 여색이나 밝히고 다니는 대귀족이 되었고, 에리카 양은 그에 놀아난 헤픈 여자가 되고 말았다.
자신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에리카 양은 활동에 지장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던 에리카가 처연한 얼굴로 말했다.
“하비 씨, 당신의 말대로 나는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리프 자작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후원자의 아들인 당신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나름 거리를 둔다고 했는데, 하비 씨에게는 그런 내 마음이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나요? 이건 정말 나도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내가 하비 씨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면, 그건 분명히 내 잘못이니까요.”
에리카의 자책 어린 말에 하비는 절망감을 맛보았다.
물론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걸 연적이라 생각한 남자 앞에서 직접 들으니 극도의 수치심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에리카 양은 라고아 백작님과 아무 사이도 아닙니까? 두 분 사이에 아무 감정도 없는데 저 혼자 미쳐서 날뛰었던 겁니까?”
순간 에리카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했다.
“나는 6년 전 라고아 백작님을 처음 알게 된 뒤로…… 그분을 잊어 본 적이 없어요. 라고아 백작님은 제 노래의 원동력이세요. 사랑이나 이별에 대한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분을 떠올렸어요. 하지만 저 혼자서만 그럴 뿐, 지금까지 라고아 백작님은 저에게 단 한 번도 마음을 열어 주신 적이 없답니다. 그렇죠? 라고아 백작님?”
갑작스러운 고백에 하비는 물론 파비안과 하워드까지 놀란 눈으로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하비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에리카를 거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라고아 백작이 상처했다는 걸 알고 있던 파비안은 라고아 백작에게 눈짓을 보냈다.
‘받아들이십쇼.’
에리카 노블이 누군가.
‘미성(美聲)의 에리카’라 불리지만, 외모는 목소리보다 더 아름답다.
대귀족들이 후처로 들이고 싶은 0순위 바르도스가 바로 그녀다.
물론 라고아 백작의 사회적 지위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그래도 에리카 정도면 납득할 수 있었다.
하비의 얼굴은 마주 보기가 부담될 정도로 창백해졌다.
이렇게 되면 무례를 넘어서 혼자서 병신 짓을 한 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 하비가 휘청거렸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비는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죽음보다 비참한 처지라니!
이런 기분을 맛보느니 차라리 라고아 백작의 손에 죽고 싶었다.
그럼 삼각관계로 죽임당했다고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피실피실 웃음이 났다.
뒤늦게 웃고 있는 그를 발견한 파비안이 차갑게 말했다.
“웃어? 이 새끼가? 가만 보니 정신줄 놓은 모양인데, 아서라. 라고아 백작님에게 똥물을 뿌리고 곱게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그제야 하비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깨달았다.
이번에는 오한이 밀려왔다.
그렇게 하비가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할 때 엘리오가 말했다.
“에리카 양,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죠? 저는 라고아 백작님의 후처로도 만족할 수 있어요.”
“흐음. 에리카 양은 왜 하비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았습니까?”
“그건 제 마음에 이미 라고아 백작님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에요.”
“명쾌한 대답이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제 마음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있어서, 에리카 양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
에리카는 ‘후처라도 좋아요’라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염없이 입술만 물어뜯던 에리카는 쓸쓸히 무대를 떠났다.
엘리오의 시선이 하비에게로 향했다.
“하비.”
“……예.”
라고아 백작과 에리카의 대화를 본 하비는 살려 달라 애원하지 않았다.
삶을 체념한 하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걸 보고 마음이 약해진 엘리오가 말했다.
“너의 경솔함은 죽어 마땅하나 죽이지 않겠다. 속죄의 의미로 10년간 파비안 남작의 종자가 되어라.”
“……예?”
“저렇게 병신 같은 놈을 종자로 데리고 있으라고요? 라고아 백작님, 저에게 왜 그러십니까?”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던 하비는 파비안의 절규에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죽고 싶은 것’과 ‘진짜 죽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인 까닭이다.
파비안이 하비에게 눈을 부라릴 때, 백색의 로브를 걸친 사제들이 들어왔다.
사제들이 주점이라니?
의아해하는 엘리오 일행을 향해 수염이 허연 노사제가 뚜벅뚜벅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