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92
1492회. 돌아갈 준비가 되었느냐?
제럴드 로건 백작은 한때 베일럼 왕국을 누비고 다녔지만, 근 이십여 년간 영지를 벗어나지 않았다.
귀족들은 그런 그를 두고 ‘피 튀기는 왕자들의 암투에 몸을 사리느라 그랬다’거나, ‘정쟁에 신물이 나서 칩거했다’고 떠들어 댔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얻게 된 별명이 ‘늙은 말’이다.
그런 로건 백작이래도 오늘만큼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무려 대륙의 구원자이자 그랜드 마스터인 라고아 백작이 베일럼 왕국에 행차를 한 때문이다.
한편으로 최근 떠오른 ‘허먼 백작과 오마르 백작의 밀월설’을 확인하기 위함도 있다.
지난 사 년간 교류를 차단했던 탓에 오마르 백작과의 만남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미래에 맞닥뜨릴게 될지 모를― 더 큰 위험을 ‘간파’ 내지는 ‘차단’하려면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하지만 막상 참가해 보니 결과는 우려와 반대였다.
대륙의 구원자는 허먼 백작 측 인사인 악시무스 백작을 쥐 잡듯 몰아세웠다.
연이어 강 건너 불구경하듯 라고아 백작과 라데 백작의 대련도 감상했다.
라고아 백작은 누가 봐도 허먼 백작 측 대귀족들에게 적대적이었다.
자연히 오마르 백작을 보는 눈도 부드러워졌다.
방금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잘 나가던 라고아 백작이 돌연 자신을 부르더니 말했다.
“내가 볼 때는 당신이 제일 비겁한 사람이야.”
“…….”
노회한 제럴드 로건 백작은 불똥이 갑자기 자신에게 튀자 화들짝 놀랐다.
지금까지 라고아 백작은 자신의 정적인 허먼 백작 측을 찍어 눌렀다.
그걸 보고 속으로 비웃었는데 ‘당신이 제일 비겁한 사람’이라니!
특히나 상대편 수장인 허먼 백작 앞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
로건 백작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자신이 허먼 백작의 공세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건 사실이지만, ‘제일 비겁한 사람’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오가 단언하듯 말했다.
“오마르 백작에 대한 소문은 베일럼 왕국 사람이 아닌 내가 들어도 거짓말인 걸 알겠더라고. 오마르 백작이 당신의 후실을 죽이고, 귀족들을 끌어모아 당신의 자리를 노린다고? 웃기지 않나? 그런 소문 때문에 당신이 오마르 백작을 멀리하면서, 오마르 백작은 오히려 고립되었다고. 오마르 백작이 철저하게 고립됐다는 걸 당신이 모를 리 없잖아. 그런 오마르 백작이 누굴 끌어들여서 당신의 자리를 노린다는 거야? 당신이라면 소문이 전부 거짓이라는 걸 알고도 남았어. 알면서도 거리를 둔 이유가 뭘까?”
“오해십니다.”
“오해 같은 소리 하네. 이유를 말해 줄까? 당신은 소드마스터가 된 오마르 백작을 곁에 두기가 부담스러웠던 거야. 오마르 백작을 곁에 두면 당신 측근들이 그에게 쏠릴까 봐. 그럼 소문처럼 오마르 백작에게 당신의 자리를 빼앗길 거라 생각한 거지. 그래서 악시무스 백작이 오마르 백작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 오히려 거리를 둔 거야.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내어 준 거지. 말해 봐. 그 소문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나? 몰랐나?”
“전혀 몰랐습니다, 각하. 검은 태양이 떠오르면서 세상은 혼란으로 치달았습니다. 혈육도 밥 먹듯 배신하는 시대에…… 오마르 백작에 대한 좋은 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는 물론 제 주변의 귀족들은 모두 오마르 백작을 두려워했습니다. 머리맡에 검을 두어야 겨우 잠들 수 있는 나날이었습니다.”
엘리오는 뻘쭘한 얼굴로 로건 백작을 보았다.
굳이 언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원인은 많이 빗나갔지만 그래도 결과는 같으니 덜 망신스러웠다.
“어떤 이유에서건 오마르 경을 악시무스 백작에게 내어 준 것은 사실이잖나. 악시무스 백작이 소드마스터인 라데 백작을 끌어들였을 때, 그가 상대할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고 할 텐가!”
“…….”
그 말에는 차마 반박할 수 없던 로건 백작은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위르겐 라데 백작이 누굴 노리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된 거 둘 다 죽거나 중상을 입고 칩거하기를 바랐다.
라고아 백작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렇게 끝났을 터였다.
“로건 백작, 당신은 오마르 백작을 배신한 거야. 그것도 상대가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이유로 말이지. 당신은 당신보다 못한 귀족들만 품어 줄 수 있는 사람이야. 당신과 당신 측근의 수준을 알 만하군.”
라고아 백작의 독설에 로건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결과를 놓고 보면 맞는 말이라, 아무리 답답해도 항변하기 어려웠다.
이윽고 조금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엘리오가 말했다.
“당신도 오마르 백작의 바람이 뭔지 들었죠? 더 이상 당신의 일에 오마르 백작을 끌어들이지 마세요. 알겠습니까? 로건 백작?”
“……예.”
솔직히 로건 백작은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왜냐면 자신이 오마르 백작을 끌어들인 게 아니라, 오마르 백작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슬 퍼런 라고아 백작의 앞에서 과거의 일을 들출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베일럼 왕국 귀족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떴다.
귀족들로 북적거리던 영주성이 다시 이전의 한가함을 되찾았다.
오마르 백작과 둘만 남게 되자 엘리오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쩝, 오마르 경의 일에 제가 너무 나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바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라고아 경이 아니었다면 평생 허먼 백작과 로건 백작에게 시달렸을 겁니다.”
“그런데 라데 백작 말입니다.”
“예.”
“싸움에 이골이 난 사람 같더군요. 오늘 일로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테니……. 치료가 끝나면 오마르 경에게 도전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 괜찮습니다. 라고아 경 덕분에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라고아 경과 그의 대련을 보니 제가 당하거나 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하하. 그럼 다행이고요.”
오마르 백작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엘리오는 가볍게 웃었다.
싸울 의지조차 없던 어제에 비하면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라고아 경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제도에 들렀다가 고향으로 갈 생각입니다.”
“제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몇 년간 마음고생을 한 오마르 백작이 기대 어린 눈으로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그러나 엘리오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니요. 말씀은 감사한데 이번에는 반드시 혼자서 가야 합니다.”
자신이 제도에 가는 것은 고향으로의 차원 이동을 위해서다.
그걸 다른 사람이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그러시군요.”
오마르 백작은 많이 아쉬웠지만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엘리오는 오마르 백작과 환담을 이어 갔다.
사실 하계와 상계를 통틀어 오마르 백작처럼 엘리오와 말이 잘 통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엘리오는 오마르 백작의 ―통찰력과 삶의 경륜이 묻어나는― 말에 크게 감탄했다.
남궁연을 떠올리게 할 만큼 오마르 백작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자정에 가까울 무렵, 문득 엘리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마르 경의 부인을 만나 뵌 적이 없군요.”
“삼십 년 전에 죽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먼저 말씀을 드렸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까맣게 잊고 지냅니다. 허허.”
“그 뒤로 쭈욱 혼자십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 부인을 못 잊어서 그런 겁니까?”
“그보다는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1왕자 진영의 칼 노릇 하느라 가족을 돌볼 시간도 없었으니까요.”
“아…….”
엘리오의 입에서 아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는데, 듣고 보니 자신과 많이 달라서다.
“라고아 경은 아직까지 부인을 잊지 못하셨나 봅니다?”
오마르 백작의 물음에 한참을 머뭇거리던 엘리오가 되물었다.
“오마르 경은 세상에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만…… 어딘가에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엘리오가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오마르 경이 죽기 전에 부인을 그리워한다면, 그런 사랑을 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먼 남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군요. 저는 영원한 사랑이 어려운 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허허허.”
“저에게는 어려운 일이 맞습니다.”
오마르 백작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농담으로 생각해 캐묻지 않았다.
새벽녘에야 대화를 끝낸 두 사람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날이 밝기 전의 새벽 미명(未明).
칠흑처럼 어두운 영주성의 하늘 위로 하얀 구름 한 덩어리가 솟구쳐 올랐다.
엘리오가 토르누비스(운종술)로 영주성을 떠난 것이다.
그는 구름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눈에 익은 북부의 풍경이 새롭게 느껴졌다.
***
4월 초.
론디니움 제국.
페트로폴리스 북구.
한 청년이 꽃잎이 흩날리는 거리에서 마나 프트라스 대신전을 올려다보았다.
대신전은 5년 전의 권위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시민들은 감히 대신전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빙 돌아 다녔다.
대신전 내부까지 쓰레기로 꽉 차 있던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변신이다.
엘리오는 뚜벅뚜벅 대신전으로 걸어갔다.
역시나!
대신전에 도달하니 낯선 신전기사들이 달려 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도 약속을 잊지는 않았나 보다.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와 만나기로 했다’니 신전 기사들이 그를 안으로 데리고 갔다.
대신전 뒤로 한참을 들어가자 작고 정갈한 수도원이 나타났다.
신전 기사들과 수도원 앞에 서 있으려니 안나 사도가 마중을 나왔다.
신전 기사들은 왔던 길을 돌아가고, 엘리오는 안나 사도를 따라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제가 지내는 곳이에요. 일명 성역이라 불리는 곳이지요.”
엘리오는 조금 놀란 얼굴로 수도원을 둘러보았다.
성역은 마나 프트라스 교단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걷던 안나 사도는 수도원 중앙의 거대한 돌비석 앞에서 멈춰 섰다.
가로 4미터, 높이 12미터에 이르는 석비를 본 엘리오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건 마나석인가?’
그제야 엘리오는 아홉 달이나 기다려야 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처럼 큰 마나석이 재충전되기를 기다린 것이다.
안나 사도가 뒷걸음질 쳐 돌비석의 영역 밖으로 물러났다.
그녀가 비켜나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은은한 음성이 들려왔다.
―엘리오 라고아. 돌아갈 준비가 되었느냐?
“예.”
―네가 속한 세상에 더 이상 너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돌아가려느냐?
“예.”
―네가 떠난 세상은 네가 알던 세상과 다르다. 그래도 돌아가기를 원하느냐?
“예.”
엘리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고향으로 가는 것은 구천현녀에게 확인할 것이 있어서다.
언제나 그랬지만 세상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텔레마, 불멸의 힘이여! 나는 약속에 의해 너를 떠나온 곳으로 안내하겠다.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