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91
1491회. 당신이 제일 비겁한 사람이야
엘리오는 네블라 악시무스 백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다른 귀족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악시무스 백작을 보았다.
‘하아.’
악시무스 백작은 가볍게 날숨을 내뱉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원하는 답을 들어야만 놔줄 모양이다.
대귀족들은 체면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넘어가 주는데 상대는 기어이 바닥을 볼 기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각하, 혹시 위르겐 라데 백작을 아십니까?”
“대충 들었습니다. 용병 출신으로 대귀족이 되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랜드 마스터인 각하 앞에서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실전 검술의 대가이지요. 라데 백작과 교류할 때 가문의 젊은 기사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라데 백작이 그랜드 마스터의 마나를 가졌다면 대륙 최강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라고요. 라데 백작이 제대로 된 마나 연공법을 익혔다면 하는 아쉬움에서 나온 소리였겠지요. 아시다시피 마나 연공법은 귀족 가문의 비기라 평민 출신인 라데 백작과 거리가 멉니다. 그는 스스로 터득한 마나 연공법과 실전 검술로 소드마스터가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찬사와 아쉬움이 담긴 말이지, 결코 라고아 백작 각하와 라데 백작의 검술을 비교한 것은 아닙니다.”
구구절절한 변명을 듣고 난 뒤에도 엘리오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대륙 최강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와 ‘라고아 백작도 라데 백작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완전히 결이 다른 말이었다.
“악시무스 백작.”
“예, 각하.”
“미꾸라지를 잡아 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악시무스 백작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라고아 백작이 자신을 미꾸라지에 비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번 잡아서 끓여 먹어 보았는데…… 그놈이 미끌미끌해서 사정 봐주면서 잡으려고 하면 손가락 사이로 쏙쏙 빠져나갑니다. 그래서 내가 반드시 이놈을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으면, 잡기가 어렵지요.”
“각하…….”
악시무스 백작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그건 라고아 백작이 ‘반드시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자신이 빠져나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악시무스 백작은 급한 마음에 운을 뗐지만, 머릿속이 엉망이라 말을 잇지 못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아까부터 기회를 엿보던 위르겐 라데 백작이 나섰다.
“라고아 백작 각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라데 백작 역시 악시무스 백작처럼 자신을 낮추었다.
하지만 겸손한 말투와 달리 그의 눈빛은 투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엘리오가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라데 백작이 말을 이어 갔다.
“기왕 그런 소문이 나돌고 있다면, 어떤 말로도 가라앉힐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최선의 방법은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뿐이라 생각합니다.”
“나하고 붙어 보자는 겁니까?”
“소문처럼 양측이 마나와 영기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검술로 대련을 한다면…… 더 이상 그런 말이 나돌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라데 백작은 결투가 아닌 대련임을 강조했다.
대련이라 해도 자신과 라고아 백작은 처한 상황이 달랐다.
패해도 자신은 잃을 게 없는 반면, 라고아 백작의 체면은 땅에 떨어질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훗날 자신과 오마르 백작의 결투에 끼어들기도 어렵다.
‘한평생 나를 피해 다니게 만들어 주마.’
라데 백작의 눈이 명예욕과 승부욕에 달아올랐다.
오십 년 가까이 전장을 구른 그는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라고아 백작의 맹하고 앳된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영기를 뺀 그는 한평생 피의 길을 걸어온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문제는 그의 결정이다.
라고아 백작이 그걸 알아차리고 거절한다면 모든 게 꼬이고 만다.
그런데.
“그럽시다.”
너무도 간단한 그의 승낙에 라데 백작은 잠시 멍했다.
상대가 이 핑계 저 핑계로 몸을 사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단번에 ‘그럽시다’라니 놀란 것이다.
“왜요? 문제 있습니까?”
라고아 백작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라데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대련은 언제쯤으로…….”
“지금 여기서 합시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오마르 백작님, 그래도 괜찮겠죠?”
라고아 백작의 물음에 오마르 백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됩니다.”
영주성의 중앙 홀은 훈련장만큼이나 넓다.
영기나 마나를 봉인하고 하는 검술 대결이라면 오히려 바깥보다 나았다.
오마르 백작이 허락하자 귀족들은 급히 중앙의 자리를 비워 주었다.
빠르게 귀족들이 뒤로 물러나고, 종국에는 엘리오와 라데 백작만 남았다.
지금의 상황이 못내 찜찜했던지 라데 백작이 거듭 말했다.
“약속한 대로 저는 마나를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각하도 영기를 사용하지 말아 주십시오. 순수하게 검술로만…….”
“이렇게 많은 귀족들 앞에서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할 것 같습니까?”
“아, 예, 노파심에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그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엘리오의 말에 라데 백작이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무심코 공허의 검을 뽑으려던 엘리오가 가까이 있던 귀족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시작하자마자 상대가 자리를 뜨자 라데 백작이 황당한 얼굴로 소리쳤다.
“각하!”
“아, 내 검이 좀 특별해서 평범한 검으로 상대해 주려고 그래요. 백작이 지고 나서 연장 탓을 할 수도 있으니까. 검 좀 빌립시다.”
라고아 백작의 말에 귀족 하나가 황급히 검을 뽑아 건넸다.
엘리오는 롱소드를 가볍게 휘둘러 본 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라고아 백작의 말에 모멸감을 느낀 라데 백작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이긴 것처럼 말하다니.
저런 식의 천박한 도발은 용병 생활을 그만둔 뒤로 처음이었다.
검술로만 한다면 라고아 백작보다 자신의 경험이 앞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라고아 백작은 마치 어른이 아이에게 하듯 손가락까지 까딱였다.
그에 ‘울컥!’한 라데 백작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슈아악―!
어찌나 강하게 휘둘렀던지 대기를 가르는 파열음이 중앙 홀을 찢었다.
롱소드와 롱소드가 중간에서 마주쳤다.
쩡―!
단 일격으로는 어느 쪽의 우세도 드러나지 않았다.
라데 백작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연거푸 롱소드를 휘둘렀다.
챙! 챙! 챙! 챙! 챙―!
두 개의 롱소드가 부닥칠 때마다 ―달군 쇠를 망치로 내려친 것처럼― 불꽃이 튀었다.
용병 생활로 갈고닦은 실전 검술답게 라데 백작의 검로는 불규칙했다.
하지만 한 수 한 수 치명적이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을 못 쉬게 만들었다.
귀족들은 속으로 ‘역시 라데 백작’이라고 중얼거렸다.
라고아 백작이 라데 백작의 공세를 막아 내기에 급급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데 백작의 마음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달랐다.
누가 봐도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정작 라데 백작은 쫓기는 심정이었다.
어떻게 해도 라고아 백작이 모두 막아 낸 탓이다.
실전 검술로 자신이 압도하리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라고아 백작의 검은 ‘귀족 특유의 형식’과 거리가 멀었다.
용병의 실전성도 오랜 세월 반복되다 보면 조금씩 ‘형태’가 잡힌다.
그런데 라고아 백작의 검에는 ‘형식’은 물론 ‘형태’조차 없었다.
검술 초보처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은데, 그의 일 검 일 검에 오싹할 정도로 전율이 일어났다.
본능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공격에 열중하던 그는 그제야 라고아 백작의 얼굴을 살폈다.
뜨겁게 달아오른 자신과 달리 지루하다는 듯 시큰둥한 얼굴이다?
‘헉!’
미친 듯 몰아쳐 가던 라데 백작의 검이 멈칫했다.
순간 엘리오가 ‘내 앞에서 어디 감히 딴생각을 하냐?’는 듯 되받아쳤다.
핏―!
라고아 백작의 검 끝이 라데 백작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라데 백작의 얼굴에 붉은 선이 생겨났다.
일격에 가슴이 철렁한 라데 백작은 더욱 과격하게 검을 휘둘렀다.
소나기처럼 검격을 퍼붓던 라데 백작의 호흡이 조금씩 고조됐다.
자신이 놀란 걸 감추기 위해 짧은 시간 필요 이상의 힘을 쓴 탓이다.
거친 호흡에 어깨까지 들썩거릴 정도가 되자 라데 백작은 라고아 백작에게 달라붙었다.
가가각―!
두 개의 검이 맞닿았다.
숨을 헐떡거리던 라데 백작이 패배를 자인하기 직전, 엘리오가 그를 강하게 밀쳐 냈다.
“허억!”
버티던 라데 백작은 끝내 힘에 밀려 헛바람 소리와 함께 뒷걸음질 쳤다.
엘리오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롱소드를 벼락처럼 휘둘렀다.
본능적으로 검을 막아 낸 라데 백작의 입에서 ‘윽!’ 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 돌아갔는지 라고아 백작의 검면이 옆구리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허리에서 극통이 밀려오자 라데 백작의 팔꿈치가 허리로 내려갔다.
그 순간 훤하게 드러난 반대편 허리에 다시 검면이 날아들었다.
퍼억―!
이번에는 허리가 활처럼 휘어 있어서 충격이 더 컸다.
‘악!’ 소리와 함께 라데 백작의 상체가 반대편으로 꺾였다.
다시 드러난, 처음 가격당한 허리로 검면이 또 박혔다.
퍽!
“크헉!”
소드마스터인 라데 백작은 체면도 잊고 연신 비명을 내질렀다.
‘졌다’는 말을 할 틈도 없었다.
제대로 된 말보다 비명이 먼저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라데 백작은 애송이들처럼 검면으로 매타작을 당했다.
태풍을 만난 갈대처럼 그의 상체가 좌우편으로 거세게 흔들렸다.
다시 훤하게 드러난 반대편 허리로 검면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그에 라데 백작은 반사적으로 ‘악!’ 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움찔했다.
하지만 검면은 옆구리에서 한 뼘 앞에 멈춰 서 있었다.
“…….”
기이한 침묵이 중앙 홀에 흘렀다.
그제야 자신의 실태를 알아차린 라데 백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엘리오가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실전적으로 계속 맞겠습니까?”
“으윽, 아닙니다. 졌습니다.”
라데 백작은 서둘러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검을 수납했다.
사실상 그는 지금 두 발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의 몸 상태였다.
소드마스터의 육체와 자존심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쓰러졌을 것이다.
빌린 검을 돌려주고 다시 상석에 앉은 엘리오가 귀족들에게 손짓했다.
폴 허먼 백작파와 제럴드 로건 백작파 귀족들이 하나 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베일럼의 귀족들은 도살장에 끌려온 양처럼 체념한 얼굴이었다.
영기를 봉인하고도 라데 백작을 어린애 다루듯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귀족들을 둘러보던 엘리오의 시선이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서 멈췄다.
“오마르 경.”
“예.”
“혹시 정계를 장악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허허, 그럴 리가요. 말씀만 들어도 벌써부터 숨이 막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로건 백작님에게 의탁한 것은 조용히 여생을 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오가 이번에는 악시무스 백작을 쳐다보았다.
“악시무스 백작.”
“예? 각하?”
화들짝 놀란 악시무스 백작이 눈을 크게 떴다.
라데 백작이 귀족들 앞에서 개처럼 두드려 맞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들었습니까?”
“예.”
악시무스 백작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로건 백작과 오마르 경의 관계를 망치기 위해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고 있습니다. 복수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만둬요. 오늘 내가 당신을 용서하는 것처럼, 오마르 백작을 놔주란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머뭇거리던 악시무스 백작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폴 허먼 백작 측을 정리한 엘리오가 이번에는 로건 백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럴드 로건 백작.”
“예, 각하.”
“내가 볼 때는 당신이 제일 비겁한 사람이야.”
“예?”
뜻밖의 말에 제럴드 로건 백작이 황망한 눈으로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