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95
1495회. 그래서 지금은 태양력으로 몇 년 몇 날이 됩니까?
얼굴로 전해져 오는 훈훈한 온기에 진과월은 눈을 떴다.
부지불식중에 장락방 암살자들과의 싸움을 떠올린 그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장락방 암살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 쓰러져 가는 폐가 안에서 연적하가 멀뚱멀뚱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자네가 왜……. 혹시 장락방 놈들을 보았나?”
“보기는 했죠.”
“그들을 보고도 살아남았다고?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보게.”
“그놈들이 부사장님을 죽이려고 할 때…… 어떤 협객이 나타나서 그놈들을 제압하고 사라졌습니다. 그 뒤 제가 재빨리 부사장님을 데리고 도망친 겁니다.”
“협객이라고?”
진과월은 애매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무협 드라마 냄새가 진하게 나서 좀처럼 믿어지지 않아서다.
“누군지 얼굴은 봤나?”
“못 봤습니다.”
연적하는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거울도 없이 자기 얼굴을 무슨 수로 본단 말인가.
진과월은 재빨리 문밖으로 나가서 주위를 살핀 후 다시 돌아왔다.
“하아!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자네와 나는 저승사자 앞까지 갔다가 나온 걸세. 마장청은 먹잇감을 쉽게 포기하는 놈이 아니거든. 여기가 어딘지 아나?”
“모릅니다. 발길 닿는 대로 가다 폐가가 보이길래 쉬어 가려고 들어온 거라서.”
진과월이 어깨와 허리, 등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그랬군. 내 상처가 가볍지 않았을 텐데…… 자네가 치료했나?”
“치료라기보다는 창상약을 바르고 묶어 준 것뿐입니다.”
“고맙네. 내가 수차례 칼에 맞아 봤지만 이렇게 개운하기는 처음일세. 의술을 공부했었나?”
“전혀요. 제가 공부하고는 안 친해서요.”
“그렇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의 말이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일까?
진과월은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진과월은 표시 나지 않게 연적하를 관찰했다.
솔직히 믿어지지는 않지만, 그가 최상위층 돌연변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료한 얼굴로 모닥불을 보던 진과월이 문득 품에서 검은색 패드를 꺼냈다.
유전 변이 측정기(MDM)다.
연적하가 측정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진과월이 웃으며 말했다.
“이게 뭔지 궁금한가?”
“차원력 측정기라면서요.”
“정확도는 나사의 것에 비해 떨어지지만 그래도 꽤나 재밌는 물건이지. 손을 앞으로 내밀어 보게.”
“손요?”
연적하가 오른손을 쭉 뻗자, 진과월이 패드를 연적하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전원을 켰다.
패드의 중앙에서 하얀 불빛이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30초쯤 지났을까?
‘띠링!’ 소리와 함께 패드 중앙에 0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자네의 차원력은 0이네. 그 말은 즉, 돌연변이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지.”
“아! 아니었구나…….”
공짜를 좋아하는 연적하가 시원섭섭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그런 연적하와 달리 진과월의 표정은 밝았다.
이제 그는 ―비록 정신이 오락가락하지만― 눈앞의 청년을 신뢰하기로 했다.
패드를 회수한 진과월이 진지하게 물었다.
“자네는 앞으로 무엇을 할 생각인가?”
“꼭 만나야 하는 여선(女仙)이 있습니다. 그 여선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여선이라고? 누구를 말하는 건가?”
진과월은 연적하가 팬심으로 연예인과 만나고 싶어 한다 생각했다.
무협 드라마에 푹 빠져 있는 그라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상황이었다.
“구천현녀요.”
“배역 말고, 그렇게 해서는 못 찾지. 그 여배우가 누구냐 말일세.”
“배역은 뭐고 여배우는 또 뭔가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구천현녀를 연기한 여배우가 있을 것 아닌가? 그녀가 누구냐 이 말이지.”
“아까부터 드라마라고 하시던데 그게 뭐죠? 영화는 또 뭐고요?”
“TV 드라마를 말하는 거 아닌가. 설마 TV가 뭔지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게 뭔데요?”
“…….”
진과월은 답답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가 생명의 은인인 데다,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백번 들어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지? 나중에 직접 보여 주겠네. 그건 그렇고…… 구천현녀를 만나는 거 외에 따로 할 일은 없어 보이는데, 맞나?”
“맞습니다.”
“혹시 합비에서 이곳까지 온 것도 구천현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나?”
“예.”
“그랬군, 그랬어.”
진과월은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적였다.
‘드라마가 진짜인 줄 알고 구천현녀를 만나기 위해 떠돌아다녔구나.’
마음이 짠해진 그가 입을 열었다.
“자네, 거민신분증과 거주증이 없다고 했지?”
“예. 그게 꼭 있어야 합니까?”
“당연하지. 옛날에도 호패가 없으면 포청에 끌려가고 하지 않았나. 신원 확인은 과거보다 현대가 더 엄격해졌다네. 신분증이 없으면 공안에 끌려가게 될 걸세.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공안과 얽혀서 좋을 일은 없네.”
진과월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는 호패밖에 없는데……. 이것으로는 안 되겠죠?”
“당연하지. 그래서 말인데, 내가 보답으로 자네의 신분증을 만들어 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삼합회의 중간 관리자인 진과월에게 신분증 하나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저야 감사하지요.”
연적하는 진과월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앞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려면 신분증이 있어야 하니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했다.
“알겠네. 출신지를 십언시로 하면…… 일주일이면 될 걸세.”
이왕이면 출신지를 석경장으로 하고 싶었던 연적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합비로도 가능합니까?”
“당연히 가능하네. 다만 합비 것으로 하려면 준비하는 데 최소한 한 달은 걸릴 걸세. 어쩌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고. 그래도 괜찮겠나?”
“예, 이왕이면 합비 것으로 했으면 합니다. 살던 집이 그쪽이라.”
“오, 집에 대한 기억이 있나 보군. 어딘가? 이왕이면 그쪽으로 맞춰 보겠네.”
진과월은 연적하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파고들었다.
“여강현에 있는 석경장입니다.”
“석경장이라…… 무슨 모텔이나 요릿집 이름 같은데, 맞나?”
“전혀 아닙니다. 일반 장원입니다.”
“아, 몇 번지인지는 모르고?”
“번지가 뭡니까?”
연적하가 예의 그 어벙한 표정을 짓자, 진과월은 얼른 말을 마무리했다.
“몰라도 괜찮네. 어차피 석경장으로는 힘드네. 운이 좋으면 여강현까지는 맞춰 줄 수 있을 걸세. 그나마도 안 된다면 그냥 합비로 만족하게.”
삼합회는 신분증 발급 기관이 아니다.
그들은 사망한 유랑인이나, 농민공 등의 신분을 위조할 뿐이다.
그러니 석경장은커녕 여강현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예.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정 안 되면 십언시를 출신지로 해도 됩니다.”
연적하는 출신지를 고집하지 않았다.
사실 연고지 없이 떠돈 지 오래된 그에게 출신지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자네 나이가 몇인지는 알고 있나?”
이제 진과월은 대놓고 연적하를 ‘머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 취급했지만, 연적하는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의 나이를 몇이라고 해야 할지가 더 고민이었다.
“모르겠는데요?”
“음, 역시.”
진과월은 왜 그런 것도 모르냐고 힐난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와의 대화를 되짚어 보면 모르는 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연적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진과월이 말했다.
“내가 볼 때 자네는 이십 대 중반인 것 같네.”
“삼십 대 중반이 아니라요?”
“농담하지 말게. 그 얼굴로 삼십 대라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걸세. 오히려 수상쩍게 생각할 거야. 신분증은 이십 대 중후반 정도로 구하면 되겠군.”
혼자서 중얼거리던 진과월이 연적하를 빤히 보았다.
“또 뭐가 남았습니까?”
“신분증이 나올 때까지 나와 함께 지내는 게 어떤가? 아, 물론 달리 가 있을 만한 곳이 있다면, 그곳에 있는 것도 괜찮네. 있을 곳이 있나?”
“전혀요.”
“그럼 나와 함께 지내는 것으로 하세.”
“저야 감사한데…… 폐를 너무 끼치는 것 같아서…….”
“폐라니, 천만의 말일세.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네. 은인을 위해 그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네.”
진과월은 당분간 연적하를 곁에 두고 지켜볼 생각이었다.
머리만 온전했다면 식구로 받아들였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무리였다.
생각에 잠긴 진과월의 귓가에 연적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부사장님.”
“왜 그러나?”
“지금 황제는 누굽니까?”
‘뜨악’한 표정으로 연적하를 보던 진과월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는 연적하가 또다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것이라 생각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를 끝으로 중국에는 황제가 없네.”
“청나라가 멸망했습니까?”
“망한 지 오래됐지. 1912년에 망했으니까.”
“…….”
연적하는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청나라에 먹힌 것은 알고 있었다.
‘숭정제가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문으로 한동안 천하가 떠들썩했으니까.
그런데 청나라가 멸망했다니!
“그럼 지금은 국호가 어떻게 됩니까?”
“중화인민공화국. 줄여서 중국이라고 하네.”
“그런데 황제가 없으면…… 날짜를 세는 기준은 어떻게 잡습니까?”
“흐흐흣! 그야 당연히 태양력을 기준으로 하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 때가 1년이라네. 1년은 365일이고.”
“그래서 지금은 태양력으로 몇 년 몇 날이 됩니까?”
“오늘? 2034년 2월 14일이네.”
“…….”
연적하는 태양력이 낯설어 한참을 눈만 끔뻑였다.
“저어 그럼, ‘숭정 17년’을 태양력으로 바꾸면 어떻게 됩니까?”
“숭정? 그게 뭔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숭정제잖습니까. 그 숭정 17년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고. 내 기억이 맞다면 명나라가 멸망한 건 1644년이네.”
삼합회의 중간 관리자답게 진과월은 명나라 멸망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삼합회의 뿌리가 반청복명을 기치로 내건 천지회인 까닭이다.
“아…….”
한순간 연적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과월의 말이 사실이라면 390년이나 흐른 뒤였기 때문이다.
“왜 그러나?”
“아닙니다. 세월이 참……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아서요.”
“빠르지. 나도 엊그제가 십 대 때 같은데…… 벌써 장성한 딸을 두었으니까.”
“따님이 있으셨군요.”
자연사를 선택한 딸을 떠올린 연적하의 얼굴에 애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오해한 진과월이 한마디 했다.
“내 딸과 어찌해 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말게. 어설프게 다가갔다가는 괜히 상처만 받을 걸세. 이쁜데 차원력까지 높아서 지분거리다 다친 사람이 여럿이라네. 자네는 차원력이 없으니 근처에도 가지 말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눈이 높아서 어지간한 여자는 여자로 보이지도 않으니까요.”
그 말에 진과월은 은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간단히 ‘알았다’고 하면 될 일을 눈이 높으니 걱정하지 말라니…….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진짜 이뻐서 하는 말이네.”
“하하. 그 마음 이해합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이쁘다고 하잖습니까.”
“…….”
한마디도 지지 않는 연적하에게 진과월은 울컥했지만 애써 감정을 눌렀다.
머리에 이상이 있는 사람과 딸을 두고 말씨름해 봐야 자신만 손해였다.
그러는 동안 천천히 날이 밝았다.
문득 장락방을 떠올린 진과월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암살에 실패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홍련상회를 공격할 텐데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그러다 바닥이 꺼지겠습니다?”
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연적하의 농담에 진과월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근심 걱정이 없어서 좋겠어.”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알고 보면 저도 고민 많습니다.”
연적하가 억울하다는 눈으로 진과월을 보았다.
아무리 걱정이 많대도 39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온 자신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