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513
1513회. 포도로 와인을 만든다고 해도 믿지 말거라
다음 날.
십언시 공안국 5과.
출근한 임초연은 오래도록 책상에 앉아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에 뜬 자료는 연적하의 개인 정보였다.
출생에서 시작해 농민공이 되기까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이력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이력이 조작된 것임을 알고 있다.
진짜 농민공의 신분에 연적하라는 사람을 덧씌운 것이 틀림없다.
알면서도 덮으려니 여간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하나 위로가 되는 건 있다.
연적하에게 죽은 자들이 모두 구제 불능의 악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하지 못한 일을 그 사람이 한 거야.’
그녀는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해 나갔다.
이제 와서 뒤집기에는 걸리는 게 너무 많았을 뿐 아니라, 실익이 없었다.
마화동 사장과 동방경호 요원들은 진소향을 납치해 죽이려 한 극악한 범죄자들이다.
그리고 폐공장에서 연적하의 행위는, 조금 극단적이긴 하지만 정당 방어에 해당된다.
아니, 특무팀만으로 연적하를 체포할 수나 있을까?
두 달 전 천진에서 갑급(甲级) 돌연변이를 체포할 때는 천여 명의 무경(인민 무장 경찰 부대)이 동원됐었다.
그날 나온 사상자만 삼백여 명.
연적하를 체포하려면 최소한 그 정도의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소리다.
천진의 갑급 돌연변이는 법륜공 지도자라서 피해를 무릅쓰고 작전을 펼쳤다.
‘연적하를 상대로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지.’
고개를 끄덕이던 임초연은 보고 있던 공안국 정보 열람 창을 닫았다.
그때 모강준 경원이 다가와 말했다.
“경사님, 장락방에 심어 둔 정보원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장락방과 천무방에서 홍련상회의 사람 하나를 납치했다가 된통 당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진소향 씨의 일을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배주대곡의 강무 부사장이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 홍련방에서 손을 쓴 것 같습니다.”
“최근 일주일 동안 홍련방에서 본토에 들어온 사람이 없습니다.”
“홍련상회가 다른 세력과 손을 잡았다면요?”
“십언시에서 장락방과 천무방을 상대로 싸울 조직이 있습니까?”
“아…… 그건 또 그렇네요. 반란이 아니면 외부 세력이 벌인 짓인데. 누굴까요?”
모강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싸한 조직이 떠오르지 않았다.
십언시에 배주대곡 사장과 십여 명의 보안 요원들을 흔적도 없이 지울 조직이 있을까?
생각에 잠긴 모강준을 뒤로하고 임초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손 국장님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이번 사건을 특경(特警)으로 넘길 수도 있으니 자료 정리해 두십쇼.”
그녀의 말에 모강준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예에? 특경으로 보낸다고요?”
특경이 살인 사건이나 조직범죄 등 강력 사건을 담당하는 부서지만, 이번 경우 돌연변이들이 대거 실종됐다.
특경이 아무리 날고 뛴다 해도 돌연변이를 상대로는 속수무책이다.
그런 이유로 특경에서 비밀리에 만들어진 조직이 특무과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특경으로 내려보내겠다는 건 ‘이번 사건을 묻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예, 문제 있습니까?”
“팀장님도 아시잖습니까? 특경은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건을 넘기면 뒤로 밀리다가, 어느 순간 미제 사건으로 처리되고 말 겁니다.”
“특임과는 특임과의 장점이 있고, 특경은 특경의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내지 못한 걸 그들이 알아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냥 하는 말이다.
흑사회의 돌연변이들이 특경에게 협조할 리 없으니 흐지부지 시간만 끌다 잊혀지리라.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바라는 바였다.
***
장완구 홍련상회.
오랜만에 숙소에서 TV를 시청하던 연적하는 진과월 부사장의 호출을 받았다.
그가 부사장실로 들어가자 진과월 부사장이 웃으며 신분증을 건넸다.
“네 신분증이다. 이제 어디를 가든 호패 대신 이 신분증을 사용하거라.”
“감사합니다.”
연적하는 신분증을 받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과거의 경우 호패가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었지만 현대는 달랐다.
신분증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자신의 신분증을 보고 있으려니 이제야 비로소 자신도 현대인이 된 기분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있느냐?”
진과월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지만 속내는 조금 착잡했다.
연적하의 정신이 올바르고, 행동이 건실했다면 홍련상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곁에 두고 본 그는 문제가 많았다.
우선 정신이 온전치 않았고, 술집에서 문제를 일으켰으며, 허세가 심했다.
허세가 심하다는 것은 삼합회 직원들의 평이었다.
그런 사람을 삼합회 가족으로 받아들였다가는 반드시 문제가 생길 터였다.
조금 안됐지만 이쯤에서 그를 놓아주어야 했다.
“합비에 가 보려고요.”
“석경장을 찾아가 보려는 것이냐?”
“예.”
“그곳은 이미 폐허가 됐다고 했을 텐데.”
“그래도 직접 두 눈으로 봐야 미련이 남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래. 자기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괜찮겠지.”
폐허가 된 석경장을 보는 게 그의 증상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막는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진과월이 계속해서 말했다.
“비행기 표는 내가 구매를 해 주마. 그리고…….”
진과월이 두툼한 월급봉투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그래, 그 정도 돈이면 당분간은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게다.”
“감사합니다.”
연적하는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녹림은 물론 석경장에 살 때도 자주 받아서 뭔가를 받는 데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봉투를 열어 금액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십만 위안(한화 약 1,800만원)이네요? 뭘 이렇게 많이.”
준 사람 앞에서 금액까지 까발리자 진과월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험, 더 주고 싶지만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크리스티에게 들어갈 돈도 있고…….”
만약 연적하가 멀쩡한 놈이었다면 뺨이라도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진과월은 상대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걸 알기에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항상 형편이 좋을 수는 없지요.”
그 말에는 진과월도 더 참지 못했다.
“나가 보거라.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출발하는 것으로 예매를 하마.”
“오늘 저녁은 숙소 직원들과 회식을 해도 되겠습니까? 드라마에서 송별회라는 걸 봤는데, 그게 해 보고 싶더라고요?”
“숙소 직원들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강록 형님과 청운요.”
“그 두 사람이라면 괜찮다.”
진과월은 흔쾌히 허락했다.
홍련상회 직원 전부라면 막을 생각이지만 둘 정도는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
그날 저녁.
진과월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해 집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진과월이 지나가듯 말했다.
“오늘 연적하의 신분증이 왔다. 바로 합비로 간다기에 내일 오후 2시 비행기를 예매해 두었다.”
“그렇게 빨리 간다고요?”
깜짝 놀란 크리스티가 고개를 번쩍 쳐들고 부친을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느냐? 본래 정처 없이 천하를 떠돌던 사람이었다. 신분증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떠났을 게다.”
“저도 내일 출발할게요.”
“어딜 간다는 거냐?”
“홍콩요.”
“연적하와 같은 비행기를 탈 수는 없다.”
십언시에서 합비는 바로 가지만, 홍콩에 가려면 상해에서 홍콩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했다.
“알아요. 그냥 대합실에서라도 한번 보려고요.”
진과월은 천연덕스러운 딸의 말에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자신의 딸이 그놈을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여서다.
“그놈이 유명한 아이돌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갑자기 왜 그러는 거냐?”
“흐음. 아빠, 연 오라버니도 내일 비행기표 예매한 거 알아요?”
“알려 줬다. 지금쯤 친하게 지내던 직원 둘과 함께 송별횐지 뭔지를 하고 있을 게다.”
“그럼 진짜 내일이면 작별이네요?”
“그게 갑자기 네가 관심을 보이는 것과 무슨 상관인데?”
“연 오라버니가 구해 준 사람은 아빠만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냐?”
진과월이 황당한 얼굴로 딸을 보았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은 연적하가 아니라 지나가던 협객이었다.
“전에 아빠가 그랬죠? 주파오촌에서 아빠를 구해 준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연 오라버니는 아빠를 데리고 그곳에서 도망친 거라고.”
“그런데?”
“연 오라버니가 거짓말을 한 것 같아요.”
“뭐? 설마 그놈이 마장청과 한패였다는 소리냐?”
진과월이 금방이라도 의자에서 일어날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진정하세요. 연 오라버니가 마장청과 한패였으면 제가 그를 존경하겠어요?”
“그럼?”
“아버지를 마장청에게서 구해 준 사람은 연 오라버니였을 거예요.”
“그놈이 그러더냐? 그놈 말은 전부 귓등으로 흘려들어야 한다. 허세가 보통 심한 게 아니야. 그놈 말이라면 포도로 와인을 만든다고 해도 믿지 말거라.”
“제가 봤어요.”
“네가 뭘 봐? 주파오촌에는 나와 그놈밖에 없었는데.”
“주파오촌이 아니라…… 배주대곡 사장실에서 연 오라버니가 사장과 보안 요원들을 죽이는 거요. 그걸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그럴 리가……. 네가 약기운에 취해 헛것을 봤겠지. 그 녀석의 차원력은 0이었다.”
“그럼 배주대곡의 강무 부사장이 미쳐서 저를 차에 태워 돌려보냈겠어요?”
“반란을 일으킨 강무가 내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아니라니까요. 아빠, 제 차원력이 얼마인지 아시잖아요. 그리고 물뽕도 헛게 보이지는 않는다고요.”
“하지만 그 녀석의 차원력은………….”
“아빠가 가지고 다니는 중국산 싸구려 MDM(유전 변이 측정기)을 믿지 말고, 건강한 아빠 딸의 눈을 믿으라고요.”
“…….”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앉아 있던 진과월이 중얼거렸다.
“하기야 조금 이상하기는 했어. 지나가던 협객이 구해 줬다니……. 그런 궁벽한 산골 마을에 고위급 돌연변이가 있을 리 없지.”
“이제 아시겠어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과월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네가 본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보거라.”
크리스티는 자신이 사장실에서 본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경고했어요. ‘내 얘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나에 대한 말이 나돌면 너희가 내 뒤통수를 친 것으로 생각할 거다. 먼저 간 사장과 만나고 싶지 않으면 부하들 입단속 잘해야 할 거다.’라고.”
“허어!”
진과월의 입에서 무거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는 이제 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기세등등하던 장락방과 천무방이 갑자기 자세를 낮춘 게 영 못 미더웠는데, 그런 비사가 있을 줄이야!
그런 줄도 모르고 십만 위안으로 그와의 관계를 청산하려 했다니…….
생각할수록 얼굴이 화끈거렸다.
“연 오라버니가 자신이 한 일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으니 아빠도 모른 척하세요.”
“끙! 그래야겠지.”
진과월도 그 정도는 알았다.
다만 그동안 자신이 그를 머저리 취급한 게 마음에 걸릴 뿐이다.
***
다음 날 오후.
연적하는 진과월 부사장의 차를 얻어 타고 십언시 공항으로 향했다.
그 차에 크리스티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연적하가 그녀를 힐끔거리자 크리스티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홍콩으로 돌아가려고요.”
“아, 그래.”
“오라버니는 합비로 가신다고요?”
“어.”
“그다음은 아마도 한국이겠죠?”
“어떻게 알았어?”
“제가 누구 딸인지 잊었어요? 우리 아빠는 저에게 비밀이 없다고요.”
연적하는 해맑은 크리스티의 모습에서 문득 딸을 떠올리고 쓰게 웃었다.
모든 것이 산 자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럴수록 ‘구천현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