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9
19회. 놀라 달아나기 바쁠 걸세
확인하듯 독심낭인 황요명이 되물었다.
“아! 우두머리만 재끼면 되는 거로군요?”
“총대주만 앞으로 끌어낼 수 있다면,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 말을 끝으로 구밀복검 심양각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채주 풍연초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들었지? 쫄 것 없다. 놈들이 오면 산채로 오르는 문을 닫아걸고 버텨라. 뒷일은…….”
말하다 말고 풍연초는 슬쩍 연적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 아우가 해결해 줄 것이다! 우리는 이긴다!”
“와아아아!”
산적들의 외침이 오봉산에 울려 퍼졌다.
***
회의가 끝나자 산적들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구밀복검 심양각, 무영신투 백교, 독심낭인 황요명, 염사웅, 천일보가 같은 모옥으로 들어갔다. 연적하에게 깨진 사람들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미묘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황요명은 한껏 소리를 낮춰 물었다.
“심 형님,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뭐가?”
“남양상방 말입니다. 팔구십이나 된다는데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건지…….”
“괜찮지 않으면? 도망이라도 치자는 것이냐?”
“…….”
황요명은 진위를 살피려는 듯 심양각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 달쯤 전 연적하에게 맞아 앞니를 잃은 백교가 새는 발음으로 끼어 들었다.
“심 형의 말은 사실이다. 적의 숫자는 많으나 크게 염려할 바 없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가서 달아나도 될 일. 총대주가 아니고서는 우리 발걸음을 따라올 놈들도 없는데 뭘 걱정하느냐.”
“과연, 그렇겠군요.”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황요명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하수인 염사웅과 천일보 역시 달음질에 자신이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심양각이 시선을 돌려 백교를 바라보았다.
그는 코뼈가 주저앉고 앞니까지 왕창 빠져 얼굴이 영 볼품없게 변한 상태였다.
“백 형, 이대로 물러날 작정이오?”
“하아! 방법이 없지 않소.”
“방법이 영 없는 건 아닌데…….”
심양각이 애매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수가 있소?”
백교의 물음에 심양각의 눈이 염사웅과 천일보에게로 향했다.
“강하다는 것은 단지 무공이 뛰어남을 말하는 게 아니다. 너희는 어떠냐?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을 형님으로 모실 생각이냐?”
염사웅과 천일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에게 형님은 두 분뿐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연적하에게 깨졌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다섯은 나름의 연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확답을 듣고 난 심양각은 품 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염사웅과 천일보 앞에 툭 던졌다.
“이게 뭡니까?”
염사웅의 물음에 심양각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답했다.
“산공분.”
염사웅과 천일보가 눈을 끔뻑였다.
산공분은 조금만 먹어도 공력이 흩어지는 가루로 사파 고수들의 애장품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 그런 물건이 왜 나온단 말인가?
“……?”
“흐흐. 적당한 때에 사용하면 무형지독보다 더 약발이 잘 받는다. 이무량과의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애송이에게 먹여라. 놈이 이무량과 양패구상(양측이 모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손해만 입음)하면 우리가 수습에 들어갈 것이다.”
“아…….”
염사웅과 천일보는 부지런히 눈알만 굴릴 뿐 선뜻 종이를 집지 않았다. 연적하를 상대로 손을 쓰는 게 어쩐지 꺼림칙해서다.
놈은 어리지만 한번 꼭지가 돌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처참하게 박살난 노마두 백교의 얼굴이 그 증거다. 살아 있는 증거를 눈앞에 두고 산공분을 주워 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염사웅과 천일보는 상대를 힐끔거렸다.
이건 쥐 두 마리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과 같았다. 둘 중에 하나는 그 일을 해야 하는데,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얼굴이다.
둘의 눈치 싸움을 지켜보던 백교가 발끝으로 종이를 슥 밀었다.
종이가 자신에게로 오자 염사웅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제, 제가요?”
“지난번에는 저놈이 먼저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번에는 네놈이 해야 공평하지.”
염사웅은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한 달 전에 먼저 맞는 건데 하는 후회가 밀려든다.
***
남양상방의 무사들이 하가촌에 도착한 것은 땅거미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다. 무사들은 하가촌의 입구에 있는 토지신묘에서 하룻밤 묵어야 했다. 하가촌에 팔십여 명을 수용할 집이 없어서다.
총대주와 두 명의 대주는 토지신묘 안에, 나머지는 담장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삼월 말이라고 하지만 아직 밤이면 쌀쌀해서 두 명의 대주는 토지신묘 안에 불을 피워야 했다.
불길이 올라오자 세 사람은 지니고 있던 행낭에서 육포를 꺼내 뜯어 먹었다.
입안에 육포를 넣고 우물거리던 경천대 대주 소군평이 풍운대 대주 왕인걸을 힐끔 바라보았다.
“왕 대주, 칼 잘 쓴다는 어린 도적 말입니다.”
“예?”
사십 대 초반인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존대를 사용했다.
왕인걸은 청운관 출신이고 소군평은 홍방 출신이라 서로 거리를 둔 까닭이다. 청운관과 홍방은 남양상방의 호위를 독식하려고 보이지 않게 싸우고 있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요?”
“구밀복검이나 무영신투만큼이나 그 이름이 자주 오르내린다는 게 말입니다. 왕 대주께서도 그 어린 도적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왕인걸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은 화살공격에 놀라 자발적으로 통행세를 냈다. 당연히 최근 떠오르는 어린 도적과 손을 섞어 볼 틈조차 없었다.
“섬전검 강 대주가 당했다는 게 사실일까요?”
“글쎄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남들이 알지 못하는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만수상방의 백랑대 대주 섬전검 강무덕이 어린 산적에게 패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물론 그 소문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소군평이 경천검객 이무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총대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뜻인가?”
이무량이 입에 육포를 물고 소군평과 눈을 마주했다.
“오봉산채의 칼 잘 쓰는 어린 도적 말입니다. 정말 소문만큼 대단할까요?”
“화산파에서 수련을 할 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 있네. 탕마멸사.”
“…….”
왕인걸과 소군평은 일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확실히 총대주는 화산파의 속가제자답게 생각하는 바가 달랐다.
“우리의 목표는 오봉산의 도적들을 멸하는 것일세. 적을 상대함에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적이 칼을 들고 우리 앞에 선다면, 베면 그만인 것을.”
소군평은 자신의 질문이 덧없음을 느끼고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오봉산이 눈앞인데 무사들의 배치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지형이 좁아서 진형을 유지하기는 힘들겠더군. 다 같이 나아가되 좌측은 풍운대, 우측은 경천대가 맡도록 하게. 나는 총단의 무사들과 함께 중앙을 지키도록 하겠네.”
“청운관의 고수들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들에게는 가급적 중앙에 있으라고 말해 두었네.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총대주 이무량도 방주처럼 남양상방의 무사들만으로 충분한 싸움이라 믿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왕인걸이 물었다.
“하가촌에서 들으니 도적의 무리가 삼십이 넘는다고 하더군요. 생각보다 숫자가 많은 것 같아 조금 걱정입니다.”
“많다고 하나 그들 대부분은 화전민 출신이네. 구밀복검이나 무영신투처럼 내외공을 익힌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가 우르르 몰려가서 화살 몇 번 날리면, 놀라 달아나기 바쁠 걸세.”
“과연!”
“그렇겠군요.”
산적 토벌의 경험이 많은 이무량의 말에 두 대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다.
남양상방의 총대주 이무량은 상방의 무사 칠십과 청운관의 무사 열하나, 모두 팔십일 명의 인원을 이끌고 오봉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중간쯤 올랐을까?
산채 앞쪽에 있는 길이 수십 개의 통나무로 막혀 있어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곧이어 빼곡히 쌓인 통나무 위로 산적들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상방의 개들이 여길 어디라고 오르느냐!”
“이 후레자식들아! 썩 꺼지지 못할까!”
“앞으로 남양상방은 절대 오봉산을 지나지 못할 것이다!”
“녹림이 만만해 보이느냐!”
십 장(약 30미터)쯤 떨어진 위치에서 총대주 이무량이 손을 까닥였다.
기다렸다는 듯 십여 명의 궁수들이 앞으로 나섰다.
쉬쉬쉬쉭!
궁수들이 화살을 쏘아 올리자 산적들의 머리가 아래로 쑥 꺼졌다.
그래도 궁수들은 쉬지 않고 활을 날렸다.
궁수들의 전통(箭筒)에 화살이 다 떨어져 갈 즈음, 이무량이 소리쳤다.
“즉시 통나무 벽을 넘는다! 풍운대 선두! 경천대가 그 뒤를 따르라!”
“예!”
풍운대 대주 왕인걸이 이십여 명의 수하를 이끌고 오르막길을 뛰어 올라갔다. 경천대의 고수 이십여 명이 그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그때 통나무 안쪽에서 화살이 두세 발 날아왔다. 그러나 조준하고 쏘는 게 아닌지라 눈먼 화살에 맞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통나무 벽에 도착한 풍운대가 빠르게 기어올랐다.
가장 먼저 꼭대기에 도착한 사람은 나무를 박차고 올라간 왕인걸 대주였다.
그러나 왕인걸은 올라서기가 무섭게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세 자루의 극(克, 창의 기본 날 외에 보조 날이 달린 무기)이 아슬아슬하게 왕인걸의 발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왕인걸은 허공에서 몇 차례 몸을 뒤집은 뒤 표표히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뒤이어 풍운대 무사들이 통나무 위에 올랐다. 그러나 대주인 왕인걸조차 버티지 못한 장병기를 일반 무사들이 감당할 리가 만무하다.
풍운대 무사들은 극의 공세에 밀려 뒤로 나자빠졌다.
극에 찔려 부상자가 속출하자 이무량은 무사들을 후퇴시켰다.
분노한 왕인걸이 통나무 벽 앞에 서서 소리쳤다.
“녹림이라고 큰소리 뻥뻥 치더니! 쥐새끼들처럼 숨어 있구나! 그러고도 사내라고 할 수 있느냐!”
잠시 후 통나무 위로 도적들의 머리가 하나 둘 올라왔다.
도적들 중에 셋째 마형도가 화답했다.
“지랄도 풍년이시네! 그게 개떼처럼 몰려와서 할 소리냐? 개 같은 놈아! 너는 거기서 짖어라. 그런다고 우리가 여기서 나갈 것 같으냐!”
“뻔뻔한 새끼들! 그렇게 몰려와서 무슨 개소리야!”
“꺼져라 병신아! 우리는 안 나간다!”
“낄낄! 우리를 아주 바보로 아네.”
산적들의 조롱을 견디다 못한 왕인걸은 맥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주변 산세를 살피던 이무량이 경천대주 소군평을 불렀다.
“하가촌에 가서 기름을 구해 오게.”
“아, 화공(火攻)을?”
“그래. 통나무를 태우면 제 놈들이 어디로 숨겠는가.”
“알겠습니다.”
수하들과 하산한 소군평은 정오 무렵에야 기름 세 통을 짊어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무량은 즉시 화공에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무사들을 뒤로 물리고 경계를 튼튼히 하며 하릴없이 시간만 보냈다.
부상자 다섯을 하가촌에 내려 보낸 왕인걸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총대주님, 언제쯤 공격하려고 하시는지요?”
“지금처럼 훤한 낮에 화공을 준비하면 적의 반격이나 대비가 있을 수 있네. 야음을 틈타 통나무를 제거할 생각이니 너무 조급히 굴지 말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왕인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계속된 실패로 남양상방에서 청운관의 입지가 점차 줄어드는 것 같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