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66
266회. 저도 남잔데요
칠리하촌.
해시 말(오후 11시).
천지맹 동편의 사파인 거주 구역.
주위가 온통 어둠에 잠겼는데 한 집만 늦은 시간까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제길. 하필 이럴 때 혼자 남겨질 게 뭐람.”
무영신투 백교가 불안한 얼굴로 방 안을 서성였다.
적풍채가 이틀 전에 호두산으로 떠나 주변 세 채의 집이 텅 비었다.
물론 다른 산채들이 있으니 별일이야 있겠나 싶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다.
신기수사 제갈승운이 백면서생이라면 모를까?
그가 자신보다 고수라는 걸 알고도 천하태평 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당분간 주루는 물론 기루에도 가지 않을 작정이다.
남린처럼 비명횡사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때 마당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흠칫 놀란 백교는 문 쪽으로 바싹 다가가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곧이어 가벼운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험.”
은밀히 왔지만 살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씨벌. 놀래라.’
백교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린 뒤 서둘러 마루로 나갔다.
희미한 달빛 아래 낯선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누구요?”
“심부름을 왔습니다.”
“누가 보냈소?”
남자는 손가락으로 천지맹 쪽을 가리켜 보였다.
이 시간에 천지맹에서 심부름을 보낼 사람은 제갈승운밖에 없다.
‘역시 제갈가 놈들답게 치밀하군. 증거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겠다는 건가?’
마당에 내려선 백교는 상대를 찬찬히 살폈다.
무장을 하지 않은 걸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때 사내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공손히 백교에게 내밀었다.
백교는 덥석 받기 전에 물건을 먼저 살폈다.
전표 꾸러미였다.
역시나 그는 제갈승운의 심부름꾼이었다.
“쳇! 입은 뒀다가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말을 아끼는 건지, 원.”
투덜거리며 전표를 받아 든 백교는 서둘러 금액을 확인했다.
삼만 냥이다.
순간 백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약속한 오만 냥에서 이만 냥이 부족해서다.
“어이, 형씨. 돈이 부족한데?”
“당장 마련할 수 있는 돈이 그것이라 하셨습니다. 나머지는 사흘 이내에 마련해 드리겠다고 하셨으니 며칠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만약 백교가 사내를 밝은 대낮에 만났거나, 제대로 된 성급(省級) 고수였다면 그의 표정이 어색하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밤은 깊었고, 백교의 무위는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했다.
“사흘? 알았다. 만약 하루라도 늦어지면 기찰대로 찾아갈 거라고 전해라.”
“예.”
사내는 정중하게 습을 하고 돌아섰다.
백교는 심부름꾼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삼만 냥은 목숨을 걸 정도로 큰 돈이다.
그는 혹시라도 상대가 돌아서서 딴 수작을 부릴까 봐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잠시 후 방으로 돌아간 백교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거금이 생겨 좋으면서도 이전보다 더 불안했다.
이제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는 것을 알아서다.
비밀과 돈.
삼만 냥이면 같은 녹림도라도 믿을 수가 없다.
은자 몇십 냥 때문에 죽고 죽이는 게 녹림도였다.
녹림도는 저 오봉십걸들처럼 의형제가 아닌 이상 누가 죽어 나가도 신경쓰지 않는다.
고민하던 백교는 전표를 침상 아래에 숨기고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
칠리하촌을 떠난 지 사흘째.
정주.
죽림진.
점심 식사 후.
대나무 숲에서 쉬고 있는 주작대와 인대를 향해 등짐을 진 사람들이 다가갔다.
정주의 상방에 속한 상인들이다.
잠시 후 그들은 대나무 숲 한쪽에 물건을 늘어놓고 팔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청운검 남궁천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아! 적하야. 잘 봐 둬라. 먹고사는 것도 전쟁이나 다름없다. 저들은 언제 싸움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곳까지 찾아와 물건을 판다.”
“그러네요.”
연적하도 남궁천의 말에 동의했다.
천지맹에 물건을 파는 상인들은 유명교의 먹잇감이었다.
그들은 물건을 빼앗고, 심지어 죽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은 천지맹과 유명교 양쪽에 물건을 팔았다.
물론 물건값은 시중의 판매가보다 몇 배나 비쌌다.
그 몇 배의 차익을 위해 그들은 이 위험한 장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연적하는 장사꾼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들에게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 화용독심 남궁연이다.
남궁연은 주로 먹을거리를 샀다.
그것도 연적하가 평소 좋아하는 것들로만 골라서 말이다.
또 뭘 얻어먹을까 생각하며 희희낙락하던 연적하의 얼굴이 굳었다.
선우세가의 장남인 선우진이 남궁연에게 말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적하는 공력을 끌어 올려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하하. 연 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 찾고 있어?”
선우진의 물음에 남궁연이 짧게 답했다.
“닭 요리요.”
“닭고기를 좋아하나 봐? 나도 좋아하는데. 가볍게 덥혀서 먹을 만한 걸 추천해 줄까?”
“괜찮아요.”
남궁연은 선우진을 피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선우진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다녔다.
어지간하면 지쳐서 떨어질 만도 한데 선우진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남궁천이 그런 선우진을 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 선우진, 남자 망신은 네가 다 시키고 다니는구나.”
“그는 어떤 사람인가요?”
“선우세가의 장남인데 사람은 쓸 만해. 어려서부터 연이를 따라다녔는데, 진도가 안 나가. 나는 그가 마음에 드는데 여자들 눈은 다른가 봐?”
“형님은 그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는데요?”
“일단 나한테 아주 싹싹해. 무림세가의 후계자면 목이 뻣뻣해야 정상인데, 저 녀석은 버드나무 같아. 뭐, 연이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만. 하하하!”
“저는 형님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형제지간이니까 마땅히 그래야지. 나도 너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간다, 이 녀석아. 그런데 우리 웬만하면 좋은 곳으로 가자. 지옥 같은 데 말고, 천궁(天宮)이나 무릉 도원도 좋잖아.”
남궁천은 전대의 인연으로 연씨들을 형제로 여겼다.
특히 십 년이나 함께 지낸 연무백이나 무공 수련에 큰 도움을 준 연적하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연적하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선우진보다 더 그에게 잘할 수 있다는 결의였는데 아무래도 못 알아들은 것 같다.
남궁천이 말을 이었다.
“선우세가의 가주님도 연이를 마음에 들어 하는데, 정작 아버지나 연이가 꺼리는 것 같더라고.”
“왜요?”
“아버지는 연이를 워낙 아끼시니까 그럴 테고. 연이는, 뭐랄까. 남자에게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아. 하기야 누가 연이의 눈에 차겠냐? 어림도 없지.”
남궁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천하제일을 다투는 미모에 무불통지의 두뇌까지.
자신이 생각해도 동생에게 어울릴 남자는 이승에 없을 것 같았다.
“형님.”
“응?”
“아, 아니에요.”
연적하는 멋쩍은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
농담처럼 슬쩍 ‘나는 어떠냐’는 말을 하려다가 떨려서 포기한 것이다.
“원 싱겁기는. 선우진도 너처럼 그렇게 싱거운 짓을 잘하더라. 그런 면에서 둘이 좀 닮았나?”
“닮았다고요? 그럼 안 되는데.”
“그렇지? 저런 놈과는 닮지 마라. 사내가 여자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고. 쯧쯧.”
남궁천은 자신이 칠리하촌에서 진설하를 따라다닌 건 잊었는지 선우진을 놀려 댔다.
잠시 후 남궁연이 두 손 가득 음식을 들고 돌아왔다.
그녀의 뒤를 선우진이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남궁천이 선우진을 보며 실실 웃었다.
“후후. 진 아우. 고생이 많다.”
“고생은요. 저도 닭고기를 좋아해서 같이 다닌 건데요 뭐. 연 매가 닭고기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요.”
“응? 연이는 닭고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연이는 육식을 즐겨 하지 않아.”
“아! 그럼 닭고기는 형님을 위해 샀나 보군요?”
“나? 나는 소고기를 좋아하는데? 닭 귀신은 적하야. 얘는 닭이라면 사족을 못 써.”
“아, 연 공자가 좋아하는 거였군요.”
선우진이 연적하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연적하를 보는 선우진의 눈빛이 제법 날카로웠다.
그건 연적하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마치 우두머리 자리를 두고 다투는 수사자들처럼 상대방을 경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둘은 이내 표정을 수습했다.
남궁천과 남궁연 남매 앞에서 차마 자신들의 감정을 내비칠 수가 없어서다.
남궁연이 닭다리 하나를 쭉 뜯어서 연적하에게 내밀었다.
연적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닭다리를 받아 뜯어 먹기 시작했다.
선우진은 남궁연의 무릎에 놓인 남은 다리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남궁연은 선우진이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눈길도 주지 않았다.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선우진을 보던 남궁천이 한마디 했다.
“연아, 진 아우는?”
“오라버니. 나는 찬모가 아니에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그녀의 말에 남궁천은 할 말이 없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나, 나는…… 좀 얻어먹을 수 있겠냐? 오라비인데.”
남궁연이 마지못해 닭고기가 든 봉지를 남궁천에게 내밀었다.
직접 뜯어 먹으라는 뜻이다.
남궁천은 선우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날개 하나를 뜯어 입에 물었다.
이 자리에 남아 있어 봐야 찬밥 신세임을 깨달은 선우진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어, 그래. 진 아우. 가 봐.”
사근사근한 남궁천과 달리 남궁연과 연적하는 가볍게 눈인사만 보냈다.
축 처진 어깨로 멀어져 가는 선우진을 보며 남궁천이 말했다.
“연아야. 너 그렇게 남자들 밀어내다가는 혼자 늙을 수도 있다. 힘들겠지만 눈을 좀 낮춰 봐. 적하를 챙겨 주는 것의 반만 해 줘도, 너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남자들이 줄을 설 게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누님, 저만 믿으세요. 누님에게 해코지하는 놈은 제가 뼈까지 씹어 먹을 테니까.”
“후후. 고마워.”
어딘지 어긋난 두 사람의 대화에 남궁천은 머리를 흔들었다.
“적하야. 이건 싸움 얘기가 아니다. 연이를 봐라. 옆에 남자라고는 나와 너밖에 없잖느냐. 시집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계속 이러니 문제란 말이다.”
‘형님. 저도 남잔데요.’
연적하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왜 남궁천과 남궁연은 자신을 어엿한 남자로 봐 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
낙양.
백마사.
접인전(接引殿).
넓은 전각에 일곱 명의 백두마군이 모였다.
조바심을 내던 이전과 달리 어쩐지 여유가 느껴지는 표정들이다.
교주의 친위대인 팔황과 연락이 닿은 뒤로 생긴 변화다.
그들의 관심은 이제 정주의 천지맹이 아니라 교주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모이자고 한 거요?”
혼천혈귀 강상피의 음성에 짜증이 묻어났다.
한 시진(2시간) 거리의 왕호산장에서 허겁지겁 달려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대답에 앞서 무산낭랑 이매화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교주가 산서성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 다들 긴장이 풀린 얼굴들이다.
적을 코앞에 두고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칠리하촌에 심어 둔 간자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천지맹의 고수들이 움직였다고 하네요. 서쪽으로 백여 명, 북쪽으로 오십여 명 정도. 우리가 백마사에 틀어박혀 있으니 먼저 찔러 볼 생각인 것 같아요.”
혼세검마 척진경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헛! 고작 그 정도 숫자로 무얼 할 수 있다고? 죽여 달라고 고사라도 지내는 것인가.”
“이런 제길! 고작 그 백 명 때문에 놀라서 우리를 불러 모은 거요?”
수하들을 데리고 호두산으로 떨어져 나간 강상피조차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