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8
28회. 그걸 어찌 참으시려고
하남성 남부.
이름 없는 야산.
오봉산에서 하루쯤 되는 거리의 그곳에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얼마 전 오봉산채를 버리고 달아난 도적들이다.
그들은 산 넘고 강 건너 기현까지 갔다가 뒤늦게 소문을 듣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오봉산을 지척에 두고 의견이 갈렸다.
무영신투 백교가 ‘능력 없는 풍 채주를 형님으로 모시느니 평정산 적풍채로 가자’고 꼬드긴 것이다. 평정산은 오봉산에서 이틀쯤 떨어진 거리에 있다. 집주인이 마음에 안 드니 옆집으로 이사 가자는 소리다.
코가 주저앉은 백교가 도적들에게 물었다.
“나와 함께 평정산의 적풍채로 갈 놈이 있느냐?”
천일보와 염사웅을 포함한 다섯이 백교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도적들은 여전히 구밀복검 심양각 주변에 머물렀다.
자존심 상한 백교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심 형, 정말 오봉산채로 돌아갈 생각이오?”
“백 형도 소문을 듣지 않았소. 만수상방의 토벌이 흐지부지 끝났다고. 그놈들이 갑자기 토벌을 중단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위험이 사라졌으니 돌아가는 게 당연한 일 아니오?”
“풍 채주를 따르는 놈들이 박대할 텐데 그걸 어찌 참으시려고.”
“상관없소. 어차피 앞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할 테니까.”
“쩝, 그럼 이쯤에서 헤어집시다. 나는 어린 연가 놈과 그 주변의 반편이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가 갈려서.”
“그럽시다.”
심양각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도적들에게 만나고 헤어지는 건 일상다반사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백교는 다섯을 이끌고 북쪽으로 떠나갔다.
백교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심양각은 바로 냉소를 터뜨렸다.
“흥!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도둑놈 같으니. 적풍채에서는 너희를 반겨 줄 것 같으냐? 산채가 위험할 때 버린 놈들을 누가 좋아한다고. 나이는 똥구멍으로 처먹었나. 쯧쯧! 한심하다 한심해.”
눈치를 보고 있던 독심낭인 황요명이 급히 장단을 맞췄다.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아는 놈이 적풍채에 있는데 채주의 성질이 아주 지랄맞다고 합니다. 그에 비하면 연가 놈은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흐흐. 네놈이 그래도 눈치 하나는 빠삭하구나. 그만 돌아가자.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다.”
“예, 예.”
돌아가기로 의기투합한 열다섯의 도적들은 남쪽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
다음 날, 심양각과 열다섯의 도적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하가촌에 들어갔다. 하가촌의 분위기는 보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오고 가는 상인들의 숫자가 좀 늘어난 거 같다는 거?
맛난 먹이를 보는 눈으로 주변 상인들을 훔쳐보던 산적들은 사해루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간 제대로 먹지 못해 부실해진 몸을 챙기기 위해서다.
그들은 모처럼만에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시켜 먹었다.
시원한 찻물로 입가심까지 마친 산적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컷 먹고 그냥 가 버리는 산적들의 뒤를 주인이 급히 쫓아갔다.
“저어, 대협님들. 음식값은 어느 분이?”
오봉산채의 도적들이 항상 값을 치르고 먹었기에 깜빡했나 싶어서 물어본 것이다.
심양각은 듣지 못한 척 휘적휘적 걸어갔다.
황요명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기현까지 오가는 동안 수중의 돈을 다 써 버려서 주고 싶어도 줄 게 없었다.
“험, 우리가 누군지 몰라? 나중에 줄게.”
“아, 예, 예…….”
황요명의 얼굴을 알아본 객점 주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굽실거렸다.
“저어 그런데 오봉십걸도 함께 오셨습니까?”
도적의 숫자가 많아서 객점 주인은 당연히 오봉십걸도 있으려니 했다.
‘오봉십걸 같은 호걸들이 음식값을 떼어먹지는 않겠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어? 어.”
황요명은 그게 오봉산에 남아 있던 도적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알고 대충 얼버무렸다. 어차피 오봉십걸의 이름까지 알려진 건 아니기에 한 행동이다.
“어이쿠! 영광입니다요. 살펴 가십시오.”
“그래. 수고해.”
주인이 머리를 조아리자 황요명은 기분 좋게 걸음을 떼어 놓았다. 나중에 돈이 생기면 그때 와서 갚을 생각이다. 물론 잊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
산채를 앞에 두고 심양각이 멈춰 섰다.
그의 예리한 눈썰미에 기이한 게 포착되었다.
‘뭐지?’
길 위에 마치 쟁기로 땅을 갈았다가 복구한 것 같은 요상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보름 전에는 없던 것이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황요명이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푸흣! 어느 병신이 산채 앞인 줄 모르고 밭을 일구다가 쫓겨난 모양입니다.”
산채가 빤히 보이는 위치에 밭을 만든다고?
말도 안 되는 억측이지만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심양각은 산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안쪽의 모습은 떠나던 때와 똑같았다.
마당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목수와 잡부가 분주히 오가며 집을 짓고 있었다.
몇몇 도적들과 마주쳤지만 그들은 서로 본체만체했다.
심양각과 도적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들이 묵던 움막으로 흩어졌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천기덕은 대뜸 인상을 찌푸렸다.
방 한가운데 웬 노도사 하나가 떡하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떠돌이 도사를 새로 받아들인 건가?’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천기덕은 한쪽 구석에 봇짐을 던져 놓고 밖으로 나갔다.
이곳에 남아 있던 친구 이철산에게 그간의 일들을 들어 볼 요량이다.
“뭐? 열 명이 의형제를 맺었다고?”
천기덕이 놀란 눈으로 이철산을 바라보았다.
산채의 실세들과 연을 맺어서 그런지 이철산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어, 이제 내가 산채의 여덟째야.”
“그럼 연 형님 바로 아래라고?”
“맞아.”
“심 형님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양각이? 가만있지 않으면 제가 어쩌려고?”
이철산은 마두 심양각의 이름을 동네 강아지 부르듯 했다.
“야, 야…….”
급히 친구의 입을 막으려던 천기덕은 뒤늦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슬며시 손을 내렸다. 심양각이 연적하의 의형제를 건드릴 리가 없지 않은가!
천기덕은 씁쓰름한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아, 참. 우리 방에 늙은 도사 하나가 있던데 새로 받은 식구냐?”
“아니.”
“아닌데 왜 우리 방에 있어?”
“연 형님 손님이야.”
“별일이네. 연 형님을 아는 사람이 찾아왔다고?”
잠시 주위를 살피던 이철산이 재빨리 천기덕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만 알고 있어. 그 사람이 천지상인이야.”
“헉! 뭐?”
깜짝 놀란 천기덕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조용히 해. 인마.”
“어, 어……. 진짜야?”
“그렇다니까.”
“그 도사가 왜 산채에 있어? 오봉산에는 오지도 않았다고 하던데.”
“누가 그래? 우리 연 형님에게 박살 난 뒤로 아예 눌러앉아 있구만.”
“바, 박살? 연 형님이 천지상인을 이겼어?”
“그래, 인마.”
이철산은 마치 제가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는 천기덕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간추려 들려주었다.
“오봉십걸이 의형제를 맺었고, 연 형님에게 무공까지 배웠다고?”
“어. 나도 백자구결이랑 일 초식의 검법을 배웠어. 이거 대성하면 장난 아냐. 칼에서 막 용권풍이 일어난다니까.”
“지, 진짜?”
“이건 비밀인데, 연 형님이 이 검법으로 천지상인을 아주…… 깨끗하게 발랐다니까.”
이철산로서는 그때의 광경을 달리 묘사할 방법이 없었다.
“나, 나도 가르쳐 주라.”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지 말래. 그러다가 걸리면 가르친 사람이랑 배운 사람 모두…….”
이철산은 말하다 말고 손날로 목 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사실 연적하는 와룡장이 신경 쓰여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말라’고 했을 뿐인데 말이다.
천기덕이 부러운 눈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전부 믿는 건 아니지만 연적하에게 뭔가 배운 건 사실 같았다.
‘씨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남는 건데…….’
몸은 몸대로 개고생을 하고, 얻은 건 하나도 없다. 이 무슨 빌어먹을 경우란 말인가. 우울해진 천기덕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흘렸다.
***
그 뒤로 사흘쯤 지났을까?
점심 무렵 하소백과 하가촌에 내려갔던 한채연이 씩씩거리며 돌아왔다.
두 여자는 상화각으로 채주 풍연초를 찾아갔다.
“오라버니! 어느 미친 도둑놈들이 하가촌에서 우리 의형제를 사칭하고 다녔대요!”
“그게 무슨 소리냐?”
부채주 탁고명과 함께 검법을 수련하던 풍연초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감히 오봉십걸을 사칭하다니?
오봉십걸은 단지 오봉산채에 있는 열 명의 도적이 아니다. 그건 저 어마무시한 고수 연적하와 아홉 명의 의형제를 지칭하는 소리다.
죽으려고 환장한 게 아니라면 왜 하가촌에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좀 전에 소백이와 사해루에 갔었거든요. 잘 먹고 막 나오는데 주인이 그러더라고요. 사흘 전에 오봉십걸과 산채 식구들이 왕창 몰려와서 먹고는 그냥 갔다고. 사흘 전이면 그 뻔뻔한 놈들이 돌아온 날이잖아요. 그놈들이 우리를 사칭하고 무전취식까지 했다니까요! 아 정말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어요!”
이야기를 듣자마자 풍연초는 밖으로 나가서 상화각의 처마 아래 달려 있는 종을 거칠게 때렸다.
땡.땡.땡.땡.땡.
신경질적인 타종 소리에 여기저기 짱박혀 있던 도적들이 상화각으로 몰려왔다.
채주 풍연초가 서늘한 눈으로 도적들을 훑어보았다.
며칠 전에 기어 들어온 도적들의 뻔뻔한 면상을 보니 달려가 쥐어 패고 싶다. 자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벌써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한참 동안 풍연초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도적들은 투덜거리지 않았다. 자신들의 염치없는 짓을 생각하면 조금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땀에 젖은 연적하가 느릿느릿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천지상인과 함께 오봉산 제일봉에 있다가 오느라 가장 늦은 것이다.
풍연초는 연적하가 앉은 걸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 아홉째와 열째가 하가촌에 갔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셋째 마형도가 귀를 후비며 말했다.
“왜요? 또 어느 상방이 쳐들어온답니까?”
“그랬으면 차라리 다행이지. 누군가 하가촌에서 오봉십걸을 사칭하고 다녔다.”
“…….”
무거운 침묵이 상화각을 휩쓸었다.
돌아온 도적들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힐끔거렸다.
그들도 이제는 오봉십걸에 담긴 의미를 안다. 제정신이 있는 놈이라면 연적하와 의형제라고 떠벌리지 못할 것이다. 대체 어느 미친놈들이 그런 짓을 하고 다닌단 말인가?
뒤이어 풍연초의 성난 음성이 대전에 울려 퍼졌다.
“사흘 전 사해루에서 실컷 처먹고, 오봉십걸의 이름으로 외상 장부를 달아 놓은 놈들이 누구냐?”
누구냐고 묻고 있지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심양각이었다.
대경실색한 심양각은 급히 황요명을 노려보았다.
그가 뒤에 남아서 돈을 달라던 객점 주인과 대화하던 게 생각나서다.
한순간 황요명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그날의 일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번에는 부채주 탁고명이 심양각과 그 주변의 도적들을 향해 호통쳤다.
“놀란 면상을 보니 네놈들이 한 짓이었구나! 산채를 버리고 달아났던 놈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감히 오봉십걸의 이름을 팔아먹고 다녀? 네놈들이 그러고도 남자라고 할 수 있느냐!”
물밀듯 몰려오는 치욕에 심양각의 볼살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새까만 후배, 그것도 무공조차 별 볼 일 없는 탁고명 따위에게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놈들이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날뛴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