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7
27회. 집에는 안 가요?
용조할지가 남기고 간 파괴적인 현장 앞에 천지상인은 넋이 나간 얼굴이다.
싸울 의지를 상실한 천지상인은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검첨(劍尖, 칼끝)을 슬그머니 내렸다. 조금 전까지 충만하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내공이 뛰어난 소년이라 생각했는데 검공의 현묘함은 상상 이상이다. 무당파 역사상 태극혜검을 정면으로 박살 낸 사람은 그가 처음일 것이다.
그러나 연적하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받았으니 이제는 돌려줘야 할 시간.
그의 무릎이 살짝 구부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지면을 박차고 힘차게 날아올랐다.
구천세법의 삼 식 운룡풍호.
연적하의 갑작스러운 반격에 놀란 천지상인은 급히 전투태세로 돌아갔다.
박도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공기의 흐름을 뒤틀었다.
박도가 스치는 곳에서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거대한 용권풍(회오리바람)으로 변했다.
콰콰콰콰.
그런데 놀랍게도 용권풍 속에 언뜻언뜻 한 마리 청룡의 형상이 나타났다.
천지상인은 단번에 그것이 태극혜검처럼 도기가 형상화된 것임을 알아차렸다. 용권풍 속에 용형도기(龍形刀氣)가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휘우우웅.
용형도기가 실린 용권풍이 천지상인의 몸으로 밀려갔다.
천지상인은 이를 악물고 순양무극공을 끌어 올렸다.
벌써 두 차례 태극혜검을 사용해서 그런지 내력은 얼마 모이지도 않았다. 이 정도 힘으로 태극혜검을 펼쳤다가는 기혈이 역류해 주화입마에 들고 말 것이다.
천지상인은 약간의 내력으로도 펼칠 수 있는 태극검을 시전하기로 했다.
송문고검이 용권풍 앞에서 원을 그렸다.
천지상인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단어는 당랑거철(鄭拒敵)이었다.
쿠우우-.
용권풍이 천지상인을 가볍게 찍어 눌렀다.
마치 애무하듯 천지상인의 몸통을 나선형으로 휘감고 내려간 용형도기는 지면에 닿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스스스.
잘려 나간 머리카락과 옷 조각들이 천지상인의 발치에 소복이 쌓였다.
천지상인의 물건 중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건 송문고검밖에 없었다.
연적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살기는 뺐는데. 잘한 건가 모르겠네.”
만약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면 옷과 함께 육신까지 갈려 나갔을 것이다.
“……고맙소.”
압도적인 무력을 경험한 천지상인은 패배가 부끄럽지도 않았다.
만수상방의 무사들은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칼질 하나로 십 장(약 30미터)이나 되는 길이의 깊은 고랑과 용권풍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적이라니!
그의 앞에서 토벌대의 숫자는 의미가 없다. 칼질 한 번으로 무려 십 장에 달하는 땅을 갈아엎은 사람이다. 그게 토벌대 위에 떨어진다고 생각해 보라. 토벌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천지상인이 터덜터덜 걸어 광풍검객 상무천의 앞으로 다가갔다.
상무천은 황급히 겉옷을 벗어 스승의 몸을 가려 주었다.
푸들푸들 웃던 천지상인이 중얼거렸다.
“보았느냐?”
“예.”
“너도 천외천이라는 말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토벌? 황제가 군대를 일으키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와는 대적할 생각도 하지 말거라.”
상무천은 공손히 대답했다.
솔직히 천지상인이 따로 당부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알았으면 돌아가거라.”
상무천이 고개를 들어 스승을 바라보았다. 어째 느낌이 싸하다.
“스승님은?”
“나는 당분간 이곳에 남을 것이다.”
“예?”
그러나 천지상인은 더 이상 설명해 주지 않았다.
상무천은 감히 더 묻지 못하고 토벌대를 이끌고 산을 내려가야 했다.
하산하자마자 상무천은 토벌대에 ‘오늘 목격한 것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명했다. 만수상방과 무당파의 위신을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상무천이 입단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수상방의 실패는 하남성 남부에 퍼져 나갔다. 오봉산채는 ‘듣도 보도 못한 놈들’에서 ‘조금 센 놈들’로 알려졌다. 천지상인의 이야기는 와전된 것이라나.
오봉산채와 함께 유명해진 이름이 있다.
만수상방 무사들을 통해 ‘오봉산채를 지킨 열 명의 호걸들’에 대한 소문이 암암리에 퍼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 열 명의 호걸을 ‘오봉십걸’이라 불렀다. 물론 보봉현과 그 인근 서너 개 현에서 그랬다는 소리다.
오월 말.
연적하는 움막 앞 평상에 길게 누워 모처럼의 오수(午睡)를 즐겼다.
그런 연적하 옆에 천지상인이 털썩 주저앉았다.
인기척에 눈을 뜬 연적하가 귀찮다는 듯 물었다.
“집에는 안 가요?”
천지상인이 산채에 머문 지도 벌써 보름.
그동안 천기가 어쩌고, 인연이 어쩌고, 하면서 자신의 곁을 맴돌고 있다. 도적들과 달리 노도사와 함께 있으면 심신이 상쾌해져서 싫지는 않다.
그런데 도사가 왜 산채를 어슬렁거리는 걸까?
“허허, 소협은 빈도의 별호를 벌써 잊으셨는가? 빈도는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방바닥 삼아…….”
“아, 네, 네.”
잠이 다 달아난 연적하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마당에서 꺅꺅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천지상인이 중얼거렸다.
“참 평화로운 곳이야. 빈도는 산채가 이럴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네.”
“도사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다들 그걸 궁금해하던데.”
천지상인이 야릇한 눈으로 연적하를 바라보았다.
지난 보름 동안 산채에 머무르며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두의 제자라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황당한 오해였는지, 이제는 안다.
이 소년은 현문의 기공을 익혔다.
그의 눈빛과 전신에서 은연중에 풍기는 기운은 맑고 투명하다. 물론 산적들과 함께 생활해서 그런지 입은 거칠고 싸가지는 밥 말아 먹었지만 말이다.
한채연이라는 여도둑은 ‘풍 채주가 다 죽어 가는 연적하를 구해 주었다’고 했다. 그 뒤로 산채의 일원이 되었고,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산채에 남은 보람이 있다. 한때는 전대미문의 거마가 탄생한 줄 알고 옥황상제를 원망하기까지 했으니까.
상무천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조금이라도 그를 좋은 쪽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 산채에 남은 것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음에도 떠나지 않고 있는 건 자신의 욕심 때문이다.
태극혜검의 최후 경지인 삼극 연동.
연적하 같은 고수의 옆에 있으면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겠다 싶었다.
“언젠가 소협이 그런 말을 했었지. 검기로 그림을 그린다고. 기억나시는가?”
“그랬었죠.”
“빈도가 태극혜검을 수련한 게 올해로 꼭 삼십 년일세. 그런데 아무리 해도 삼극이 연동하지를 않고 있네.”
“그런데요?”
연적하는 천지상인이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당파와 관계없는 사람에게 왜 이런 소리를 하나 궁금할 테지.”
“잘 아시네요.”
“솔직히 말하지. 나는 소협에게 삼극 연동에 관한 조언을 듣고 싶네.”
그동안 친해졌다고 천지상인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에? 나는 삼극이니 연동이니 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데?”
“만류귀종이라고 하지 않던가. 무학의 끝은 결국 같다네. 빈도는 소협이 ‘검기로 그림을 그린다’고 할 때 특별한 느낌을 받았네. 빈도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소협과 빈도의 무학이 닮은 것도 같고.”
“아하.”
연적하는 천지상인이 하는 말을 이해했다.
당시에는 자신도 그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태극검형과 용형도기의 형태는 다르지만 그 본질은 비슷하지 않던가!
“물론 빈도에게만 일방적으로 좋은 일을 할 수는 없지. 소협이 빈도에게 조언을 해 주면, 빈도는 소협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겠네.”
“부족한 부분요?”
천지상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 뛰어난 소년은 무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러니 천하의 태극혜검을 항마도법 따위로 받아쳤겠지. 천지상인은 함께 있는 동안 그걸 채워 줄 요량이었다.
“빈도가 볼 때 연 소협에게는 무학의 기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네. 연 소협은 자신이 익힌 무공 외에 다른 건 거의 모르지 않나?”
“그런 경향이 있죠.”
“무학의 기본을 알게 된다면, 연 소협의 무공도 더욱 깊어질 걸세.”
잠시 생각하던 연적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확실히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
낙양 동편 언사.
와룡장.
집 한편에 있는 커다란 연무장이 모처럼 연씨 일족들로 가득 찼다. 와룡장의 문호 개방을 앞두고 연씨들만의 행사가 열린 것이다.
행사의 목적은 당연히 구천검의 시연.
특별히 만들어진 자리에 앉은 연씨 원로들이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연무장 한가운데 연무백과 연승백이 서 있다.
원로들은 남궁세가에서 수련을 하고 돌아온 연무백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상황. 그가 연씨 일족 중에 구천검을 가장 높은 경지까지 연성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와룡장의 소가주이자 대사부인 연무백이 원로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원로들과 나란히 앉아 있던 백미주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내일이면 와룡장은 문호를 개방해 외부인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오랜 세월 꿈꿔 온 무림세가로 향하는 첫 걸음을 떼어 놓는 것이다.
현재 연무백의 성취는 무려 칠 성.
죽은 남편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고수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다.
연무백과 연승백은 나란히 서서 구천세법의 일 식부터 구 식까지 빠르게 선보였다.
일사불란한 두 형제의 무공 시연에 원로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구천세법의 시연이 끝나자 형제는 약속한 비무에 들어갔다.
구천세법의 동작을 기본으로 화려한 공방이 펼쳐졌다.
차차창. 창.
두 개의 검이 맞붙었다가 떨어지기를 수십 차례.
미리 손발을 맞춘 비무라서 그런지 두 형제가 마주 보고 추는 검무처럼 보일 정도다.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의 공력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숨결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연무백과 달리 연승백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비무가 끝났다.
차남인 연승백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연승백이 관객들 속으로 들어가자 연무백은 연무장 중앙에 우뚝 섰다.
“그동안 약간의 심득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어르신들께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곧이어 연무백이 신중한 얼굴로 검을 뽑았다.
검첨이 지면으로 향했다.
기수식을 본 원로들 속에서 나지막이 ‘용조할지?’라는 소리가 들렸다.
연무백은 침착하게 천룡무상신공의 공력을 끌어 올렸다.
천룡무상신공은 현녀경을 분실한 연씨의 선조들이 새외에서 구해 온 심법이다. 다행히 천룡무상신공의 공력과 구천세법의 궁합이 잘 맞아 지금은 가전 무공 대접을 받고 있다.
지이잉-.
천룡무상신공의 공력이 주입되자, 검신이 가볍게 떨렸다.
연무백은 머릿속으로 구천세법의 칠 식, ‘용조할지’를 떠올렸다.
그가 최근 고련 중에 얻게 된 심득은 이른바 심상(心象).
거대한 용의 발톱이 대지를 가르는 모습을 마음으로 떠올렸다.
마음이 가는 곳에 기가 흐른다.
검 끝이 머리 위에서 호선을 그리다 벼락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콰콰콱.
칼끝에서 갈라져 나온 세 줄기 검풍이 연무장 바닥을 길게 갈랐다.
“오오오!”
원로들은 체면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연무장 바닥에 흐릿하게 남은 검풍의 흔적을 보니 소름이 돋는다.
백미주의 눈에서도 야망이 활활 타올랐다.
언사의 명문(名門) 와룡장이 문호를 개방하기 하루 전에 벌어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