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3
33회. 만 리 길을 온 사람도 있느니라
날이 밝았다.
오봉십걸들은 느긋하게 건량으로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났다. 하루 종일 강을 끼고 걷던 그들이 오십포구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한 건 해거름 무렵이었다.
구밀복검 심양각이 애매한 얼굴로 마을과 관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심 노제, 왜 안 가고 서 있나?”
풍연초의 물음에 심양각이 마을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일행이 묵어가기에는 마을이 작아 보여서요. 차라리 더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노숙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던 풍연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마을 규모가 너무 작았다. 이럴 때는 경험이 많은 심양각의 말에 따르는 게 낫다. 괜히 고집을 부리다가는 돈은 돈대로 날리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게 될 테니까.
“그래 보이는군. 더 가 보자고. 날씨가 좋아서 요즘은 노숙도 괜찮으니까. 혹시 알아? 사당이나 토지신 묘라도 발견하게 될지?”
오봉십걸들은 미련 없이 마을을 지나쳤다.
조금 더 가자 관도 양편으로 숲으로 우거져 갑자기 어두컴컴해졌다.
막내 하소백이 불안한 듯 한채연에게 바싹 붙으며 말했다.
“아직 해 떨어지려면 멀었는데……. 기분이 찜찜하네요.”
“그러게. 갑자기 호랑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네.”
한채연도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이철산이 주먹으로 제 가슴을 퍽퍽 치며 호언장담했다.
“걱정 마라! 호랑이가 나오면 내가 때려잡아 줄 테니까. 나만 믿어!”
“정말요? 그럼 오라버니만 믿고 갈게요.”
한채연의 말에 이철산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런데 앞서가던 심양각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는가 싶더니 종내에는 멈췄다.
돌아선 심양각은 가장 먼저 연적하와 눈을 맞췄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듯 연적하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풍연초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심 노제, 설마 여기서 노숙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 사방의 나무 때문에 조금 어둡지만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남았을 텐데?”
“저 앞쪽에서 큰 싸움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병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옵니다.”
“싸움이라고?”
풍연초의 시선이 연적하를 향했다. 정말이냐고 묻는 표정이다.
“예, 맞아요. 조금 전부터 소리가 나더라고요.”
“아니 이렇게 좁은 숲길에서 무슨 싸움이래? 좋은 자리 다 놔두고?”
탁고명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봉십걸들 중에서 눈치가 가장 빠른 허임달이 한마디 툭 던졌다.
“지난번에 본 그 사람들 아닐까요?”
“누구?”
탁고명은 기억이 전혀 안 난다는 얼굴이다.
“거 왜, 어제 점심때 음식점에서 수월상방의 대행수라는 사람 만났었잖습니까? 함께 가 주면 사례하겠다고 했는데 큰형님이 거절했던.”
“아!”
탁고명의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호위무사 숫자가 부족하다고 탄식하던 대행수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 심양각이 탁고명과 연적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계속 갈까요? 아니면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되돌아 갈까요?”
“심 노제는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가 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잘하면 떡고물이 떨어질 수 있으니까요.”
심양각은 오히려 지금이 재물을 취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잠시 생각하던 풍연초가 짧게 말했다.
“에라! 가 보자.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꼬리를 말 수는 없잖아? 안 그래?”
호기로운 풍연초의 말에 오봉십걸 들은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조금 찜찜한 건 사실이지만 연적하를 믿고 그냥 전진하기로 한 것이다.
울창한 나무들로 어두컴컴한 숲 속의 길.
흑의(黑衣)를 입은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상인과 잡부 들을 베고 있다. 바닥에는 이미 수십 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한쪽에서 상방 무사들 다섯이 싸우고 있지만 누가 봐도 마지막 발악에 불과했다.
수월상방 대행수 장한영이 곁에 있던 장하선의 앞을 가로막고 나직이 말했다.
“안되겠다. 너라도 피해라.”
“네? 저만 가라고요?”
“저놈들은 지금 재물만 노리는 게 아니야. 모두 죽이고 있어. 어서 가. 어서!”
장한영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수월상방의 무사 열다섯 중 서 있는 사람은 고작 다섯에 불과하다. 일각(15분)도 지나기 전에 무려 열 명의 무사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십여 명에 달하는 흑의인들은 나타나자마자 살수를 썼다. 상방 무사들은 물론 상인, 마부, 쟁자수들까지 예외는 없었다. 그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여 살인멸구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악!”
“크악!”
비명과 함께 두 명의 무사가 또 쓰러졌다.
장한영은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는 딸의 등을 힘껏 떠밀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장하선도 더 버티지 않고 숲 속으로 내달렸다.
딸이 울창한 나무 사이로 사라지자 비로소 장한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다 너무도 조용한 느낌에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몰살. 수월상방 사람들 중에 더 이상의 생존자는 없었다.
장한영은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오십 대 남자, 환영신마 웅재귀가 우두커니 서 있는 장한영에게 다가갔다.
“늙은이, 장우보 방주가 맡긴 물건은 어디 있느냐?”
순간 장한영은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장우보는 수월상방의 방주다.
방주가 은밀히 불러서 맡긴 물건을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걸까?
장한영이 눈을 부릅뜨고 사내를 노려보았다.
“고작 그걸 빼앗자고 이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소!”
“후후. 고작이라니. 그걸 위해서 만 리 길을 온 사람도 있느니라. 그건 너희 모두의 목숨값보다 중하다. 내놓아라. 그럼 너만은 살려 주마.”
“흥! 그냥 죽이시오! 내가 내어 줄 것 같소?”
장한영은 살려 준다는 상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마부와 쟁자수까지 싹 다 죽인 놈들이 자신을 살려 둘 리가 없지 않은가!
피식 웃던 웅재귀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숲 속에서 또 다른 흑의인들이 장하선을 질질 끌고 나왔다.
장한영은 차마 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억지로 외면하고 있는 장한영을 향해 웅재귀가 말했다.
“흐흐. 네가 나에게 그 물건을 넘긴다는 데 내 목을 걸 수도 있다.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나는 수하들에게 네 딸과 즐기라고 할 거다. 정확히 스물다섯 명이지. 네 고집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보자. 시작해라.”
기다렸다는 듯 사내들이 장하선을 땅에 패대기쳤다.
“아악!”
사내 넷이 장하선의 팔과 다리를 잡아 고정시켰다.
뒤이어 사내 하나가 달라붙어 장하선의 옷을 거칠게 뜯어냈다.
“아아악! 그만해! 아빠!”
장하선의 계속된 비명에 장한영이 버럭 소리쳤다.
“멈춰!”
기다렸다는 듯 웅재귀가 입을 열었다.
“잘 생각했다. 물건은 어디에 있느냐?”
파르르 떨던 장한영이 비칠거리며 마차 한 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마부석 아래 비밀 공간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웅재귀에게 건넸다.
가죽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웅재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장하선을 누르고 있는 사내들에게로 향했다.
“흐흐, 마저 즐기되 뒤처리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
“예!”
장하선을 올라타고 있던 사내의 손이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악!”
“이놈!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느냐!”
피를 토하는 듯한 장한영의 절규에 웅재귀는 웃음을 터뜨렸다
“크큿! 네 딸년도 죽기 전에 실컷 즐기게는 해 줘야지. 그래야 덜 억울할 거 아니냐?”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소리를! 정녕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으흐흐흐! 본좌가 하늘이니라. 너도 이제 그만 갈 때가…….”
떠들다 말고 웅재귀가 고개를 홱 돌렸다.
저 멀리 어두컴컴한 숲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닥에 널린 시체가 보일 텐데도 그들은 별로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싸우는 걸 알고도 배짱 좋게 그냥 왔다는 건가?’
웅재귀가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서 시체를 더 늘려야 한다는 게 귀찮았던 것이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흑의의 사내들이 천천히 웅재귀 앞으로 모여들었다. 장하선 위에 올라탔던 남자도 황급히 그들과 합류했다.
겨우 풀려난 장하선이 비틀거리며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장한영은 황급히 걸치고 있던 장포로 딸의 상체를 가려 준 뒤 정면을 응시했다.
심양각이 주변을 휘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야, 많이도 죽었다. 상인, 마부, 쟁자수까지 깡그리 죽였네. 하남성에서 누가 이렇게 무시무시하지? 대별산채는 아닌 것 같은데…….”
뒤늦게 오봉십걸의 얼굴을 확인한 장한영이 미친 듯 부르짖었다.
“대협님들! 살려 주십쇼! 이놈들이 수월상방의 사람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참혹한 광경에 오봉십걸이 인상을 찌푸렸다.
비록 그들이 산적이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시체는 본 적이 없다.
웅재귀는 수하들에게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려다가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고작 저 정도 숫자로 자기 일에 끼어든 불청객들의 정체가 궁금해서다.
웅재귀가 자신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흑암대 대주 암혼귀살 사도영에게 턱짓을 했다.
웅재귀의 뜻을 알아차린 사도영이 재빨리 불청객들 앞으로 걸어갔다.
“네놈들은 누구냐? 감히 우리 일에 끼어들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느냐?”
앞쪽에 서 있던 심양각은 사도영이 쏟아 내는 살기에 놀라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멀리서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헐! 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이 튀어나온 거지?’
그래도 자신이 녹림에서 콧방귀 좀 뀐다고 생각해 방금까지 어깨에 힘을 좀 줬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 서자 오금이 저려 왔다.
심양각의 얼굴을 본 풍연초는 감히 나서지 못하고 연적하를 힐끔거렸다.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면서 조금씩 낄 데와 안 낄 데를 구분하게 된 것이다.
안목이 늘어난 건 연적하도 마찬가지다.
그는 흑의를 입은 괴인들의 무위가 보통이 아님을 알고 처음부터 나섰다.
“우리는 오, 아니, 비룡문의 사람들인데요. 그쪽은 누군데 우리한테 그런 막말을 하세요?”
연적하가 슬쩍 오봉십걸의 눈치를 봤다.
잠깐 오봉산채와 비룡문 중에 뭐가 이로운가를 두고 고민했더니 말이 조금 꼬였다.
한편 어린놈의 대답에 기가 막힌 사도영은 할 말을 잃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유명교가 지하로 숨어든 지 이십 년이 지났지만, 그래도 흑암대 정도는 기억하고 있어야 정상 아닌가?
짜증이 나기는 웅재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약간의 기대를 했는데 수준 미달이다. 저 정도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아깝다.
속으로 혀를 차던 웅재귀가 나직이 말했다.
“죽여라.”
말과 함께 웅재귀는 돌아섰다.
유명교의 흑암대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잡배들에게 시간을 너무 낭비한 것 같다.
‘이십 년 전에는 검은 옷만 봐도 달아났는데…….’
문득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웅재귀가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사도영의 신형이 연적하를 향해 날아갔다.
휘릭.
사도영은 칼도 뽑지 않고 맨손으로 소년의 머리통을 잡아 갔다. 단숨에 머리통을 뽑아서 뒷걸음질 치는 늙은이에게 던져 줄 작정이다.
툭.
‘응?’
소년의 손이 탈혼수라기가 담긴 자신의 손을 옆으로 가볍게 쳐 냈다.
뒤이어 손바닥이 확대되는가 싶더니.
빡.
눈앞에서 번갯불이 번쩍였다.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던 사도영은 강풍에 날리는 낙엽처럼 뒤로 날아갔다.
그래도 고수인 사도영은 찰나지간에 균형을 되찾고 자연스럽게 착지했다.
주루룩.
용케도 땅에 처박히는 망신은 피했지만 양쪽 콧구멍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