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4
34회. 팔주령, 동방의 성물
흑암대 대주 암혼귀살 사도영이 손등으로 코를 훔쳤다.
피로 물든 손등을 보니 기가 막혀서 일순 말이 나오질 않는다.
“이런 미친…….”
수치심보다는 당혹스러움이 앞섰다.
교에서 자신의 위치는 십두마병.
백두마군인 환영신마 웅재귀 같은 존재와 비교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지만, 무림에서는 절세의 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십두마병이 된 뒤로는 칠파이문의 장로들도 눈 아래로 내려다보며 살았다. 그런 자신이 어린놈에게 맞아 코피 따위를 흘리다니?
막 자리를 떠나려던 웅재귀가 멈칫하더니 돌아섰다.
당황한 사도영은 급히 입을 열었다.
“방심했습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웅재귀는 대답하지 않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만 봤다.
사도영은 빠드득 이를 갈며 검을 뽑았다.
백두마군에게 방심했다고 핑계를 댔으니 이제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탈혼수라기를 극성으로 끌어 올린 사도영은 ‘차핫!’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상대에게 날아갔다.
사도영의 손에 들린 검이 허공에서 번득였다.
검 끝에서 일어난 붉은 검기가 연적하의 상체로 쏘아 갔다.
쉬이익.
조금 뒤늦게 연적하의 박도가 사선으로 솟구쳤다.
쩌엉.
한순간 붉은 검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붉은 검기를 소멸시킨 하얀 도기가 노도처럼 사도영에게로 밀려갔다.
대경실색한 사도영은 공중에서 몸을 뒤집어 도기를 피했다.
휘리리릭.
사도영은 겨우 땅에 착지했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자 허리가 화끈거린다.
뒤늦게 통증을 느낀 사도영의 시선이 허리로 향했다.
‘헉!’
허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코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출혈이다.
“물러나라. 네 상대가 아니다.”
웅재귀의 말에 사도영은 고개를 떨구고 비켜섰다.
이윽고 웅재귀가 천천히 걸어 나갔다.
“애송이, 너는 우리가 누군지 알고 나선 것이냐?”
웅재귀가 야릇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환영신마는 삼십여 년 전 시비 끝에 화산파 장로를 죽이고 쫓기다 유명교에 투신했다. 그 뒤 십두마병을 거쳐 백두마군의 위치까지 올랐다. 유명교도가 되고 백두마군에 오르기까지 삼십여 년이 걸린 셈이다. 그런 그의 눈에 연적하는 하룻강아지였다.
“관심 없는데?”
“그럼 죽어라.”
웅재귀가 귀찮다는 얼굴로 손을 떨쳤다.
순간 연적하의 주변에 세 개의 산가지(산통점을 치는 나뭇가지)가 박혔다.
“크윽!”
갑자기 연적하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연적하의 주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몰려드는가 싶더니 점점 번져 갔다.
그림자에 둘러싸인 연적하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박도를 휘둘렀다.
쉬이익. 쉬익.
사나운 검기가 사방팔방으로 휘몰아쳤다.
그러나 그림자는 흩어지지 않았다.
아니, 연적하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오히려 그의 옷이 칼에라도 베인 것처럼 쩍쩍 갈라졌다.
누가 봐도 이상한 광경인데 웅재귀는 당연하다는 듯 웃기까지 했다.
과거 강호를 종횡할 때도 적을 찾아 볼 수 없었던 ‘함영탈혼마공’이다. 그림자를 가둬 혼백을 빼앗는 저 수법은 십두마병이 되었을 때 이미 무적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그보다 몇 배나 강한 백두마군. 함영탈혼마공을 당해 낼 인간이 존재할 리가 없다.
한편 연적하는 뒤늦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멈춰 섰다.
마치 흑암의 지옥에라도 빠진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멈춰 선 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마치 늪에 빠져드는 것처럼 온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숨 쉬는 것도 불편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지나면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할 것 같았다.
‘아! 이건 혹시 주술인가?’
천지상인은 강호의 고수들 중에 기상천외한 수법을 사용하는 자들이 있다고 했었다. 상대가 젓가락 같은 걸 던지는 건 봤다. 그게 이런 현상을 불러일으킬 줄이야! 알았다면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크윽! 어쩐다.’
이미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도 없는 상황.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하아…….”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처음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생기자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갔다.
온몸을 죄여 오는 어둠의 무게가 갑자기 늘어나는가 싶더니 급기야 숨이 막혔다.
‘끄윽!’
숨을 쉬기 위해 버둥거리던 연적하의 뇌리로 상대의 마지막 손짓이 스치고 지나갔다. 늙은 마두가 던진 나무젓가락은 분명 자신의 주변에 꽂혔었다.
만약 그 젓가락이 이런 기괴한 현상을 일으킨 거라면, 그걸 없애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에게는 땅을 갈아엎는 쓸 만한 수법이 있다.
용조할지다.
다른 건 떠오르지도 않았다.
연적하는 힘겹게 박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곧이어 박도는 공중에서 호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꽈르르릉.
한 번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연적하는 옆으로 몸을 틀며 또 한 차례 용조할지를 펼쳤다.
꽈르르릉.
짙은 먹구름 속에서 우렛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기적처럼, 먹구름보다 짙은 흑암(黑暗)이 살짝 갈라졌다.
효과가 있었다.
당장 온몸을 찍어 누르던 압력이 약해지고, 숨 쉬는 것도 편해졌다.
옆으로 한 번 더 몸을 틀며 다시 한 번 용조할지를 날렸다.
꽈르르릉.
마침내 흑암이 물러갔다.
웅재귀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함영탈혼마공에 갇힌 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걸 깨고 나오는 건 처음 본다.
흑암 속에서 뻗어 나온 도기에 지면이 갈라져 나갈 때 조금 불안하긴 했다. 무림의 어느 문파에서도 저런 검공은 본 적이 없었다.
새파란 애송이에게 저런 공력이 있다고?
여섯 개의 도기가 지면을 뒤집을 때 산가지 하나가 휘말려 날아갔다.
그리고 아홉 개의 도기가 뻗어 나올 때 웅재귀는 슬쩍 뒤로 몸을 뺐다.
“뭘 구경만 하고 있느냐? 놈을 죽여라!”
웅재귀의 명령에 암혼귀살 사도영은 수하들과 함께 이제 막 어둠을 찢고 나온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죽여라!”
“죽어!”
흑암대의 고수 스물다섯이 벌 떼처럼 연적하를 뒤덮었다.
뒤쪽으로 물러난 웅재귀는 수하들과 연적하가 뒤섞여 있는 곳으로 열 개의 산가지를 던졌다. 수하들이 죽든 말든 그의 관심 밖이었다.
츠츠츠.
열 개의 산가지가 허공에서 지면으로 떨어져 내릴 때다.
연적하의 몸이 흑암대를 뚫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윽고 그는 하늘에서 거침없이 아홉 번이나 몸을 뒤집으며 자리를 바꾸었다.
구천세법의 팔 식, 구룡번신이다.
흑암대 무인들이 머리 위로 칼을 내질렀지만 연적하의 신형은 유령처럼 칼끝에 닿지 않았다.
구룡번신에 이어 구 식 뢰검분형이 펼쳐졌다. 하늘에서 아홉 개의 검형(劍形)이 지면에 떨어져 내렸다.
꽈과광.
검형에 머리를 직격당한 흑암대 고수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 파괴적인 검공에 놀란 나머지 흑암대 대원들이 뒷걸음질 쳤다. 명령도 무섭지만 소년의 검공은 그보다 훨씬 더 무서웠던 것이다.
산가지 열 개가 지면에 닿기 직전, 연적하가 박도를 힘껏 던졌다.
쉬이이익.
박도가 지면 위를 스치듯 날아가며 맹렬히 회전했다.
산가지들은 회전하는 박도가 일으킨 돌풍에 맥없이 휘말렸다.
웅재귀가 살아남은 사도영에게 힐끔 고개를 돌렸다.
반쯤 넋이 나간 수하들의 얼굴을 보니 이제는 목표를 바꿔야 할 것 같다.
“막아!”
웅재귀의 지시에도 사도영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사도영은 수하들과 함께 웅재귀의 앞을 막아섰다.
속으로 ‘개 같은 놈아! 백두마군도 당해 내지 못한 놈을 십두마병에게 떠넘기느냐!’ 욕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사이 박도를 회수한 연적하가 다시 흑의인들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특별한 말도 없고, 뭘 묻지도 않는다.
상대의 그런 모습에 웅재귀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무슨 수를 써도 저 걸음이 멈출 것 같지가 않다.
웅재귀는 사도영과 소년이 다시 맞붙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연적하는 흑암대 고수 다섯을 더 베어 넘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도영이 눈치를 보다가 몸을 뺐다.
흑암대 대주 사도영까지 빠져나가자 흑의인들은 메뚜기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적하는 그들과 특별한 원한이 없는 터라 쫓지 않았다.
싸움은 그렇게 끝났다.
풍연초가 멍하니 서 있는 장한영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저놈들은 누구요? 아무리 봐도 도적은 아닌 것 같은데.”
연적하의 무위에 기가 질린 장한영이 공손히 답했다.
“저도 그들의 정체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도적이 아닌 것 같다는 말씀은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방주님의 부탁으로 맡아 두었던 물건만 빼앗아 갔으니까요.”
“무슨 물건이오?”
“팔주령이라고 하는 동방의 성물입니다.”
“비싼 거요?”
“동방에서만 나는 것이라 구하기가 어려운 물건입니다만, 비싼 것은 아닙니다.”
“헐! 구하기 어려운 물건인데 비싸지는 않다라.”
“거래가 잘되는 물건이 아니라서요. 딱히 수집하는 사람도 없고.”
“그런 물건을 빼앗아 가면서 살인 멸구까지 한다? 거참 이상하군.”
풍연초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하아! 그렇게 무공이 뛰어난 사람들이 왜 팔주령 때문에 살인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 이 정신머리 보게나. 늦었지만 저희 부녀를 살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고 보답하겠습니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슈.”
풍연초가 손사래를 쳤다.
구해 주기 위해 뛰어든 게 아니라 떡고물이라도 생길까 싶어 끼어든 것이라 얼굴이 간지러웠던 것이다.
버려진 흑의인들의 시체를 조사하던 탁고명이 인상을 찡그리며 다가왔다.
“큰형님, 시체를 싹 다 뒤졌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하는 놈들인지 당최 알 수가 없네.”
“도적은 아닌 것 같으니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 그럼 됐네요.”
탁고명은 상대가 도적이 아니라니 바로 툴툴 털어 버렸다.
같은 녹림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신경 쓸 이유가 없어서다.
오봉십걸들이 가까운 마을까지 수월상방의 짐을 날라 주기로 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장한영은 비룡문도들에게 은자 삼백 냥을 약속했다.
꽤나 큰돈이지만 장한영이나 오봉십걸 모두 만족할 만한 거래였다. 장한영 부녀는 목숨은 물론 짐까지 찾았고, 오봉십걸들은 바라던 떡고물을 얻었으니 말이다.
***
다음 날 오봉십걸들과 장한영 부녀는 수현에 도착했다.
오봉십걸들은 수현에서 장한영 부녀와 작별을 고하고 바로 회남으로 떠났다.
그리고 구월 초.
오봉십걸들은 마침내 남직례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직례성이라고 하지만 황산은 합비를 지나 남쪽으로 한참 내려가야 하기에 갈 길은 아직도 먼 상황이다.
점심 무렵.
관도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쉬던 중 구밀복검 심양각이 멀리 보이는 산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게 팔공산입니다. 적사채라는 녹림 산채가 하나 있습니다.”
녹림 산채가 있다는 말에 오봉십걸이 눈을 반짝였다.
운이 좋으면 다른 녹림도를 만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감에서다. 남들이야 녹림도가 무섭겠지만 그들에게는 같은 식구라 말만 들어도 반가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