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2
32회. 저녁매미 우는 밤에
오봉산.
이른 아침 오봉산채의 문이 활짝 열렸다.
곧이어 등에 봇짐을 짊어진 열한 명의 도적들이 걸어 나왔다. 강남 만사평으로 가는 오봉십걸과 길잡이 구밀복검 심양각이다.
앞서 걷던 심양각이 슬쩍 돌아서 오봉십걸을 일견한 뒤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끔한 옷차림 덕에 도적으로 의심받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모두의 허리춤에 매달린 도검은 어쩔 수 없다. 녹림대회에 맨손으로 참가할 수는 없으니까.
‘끽해야 무림 방파 사람들로 생각할 테지.’
그래야 한다.
괜히 산적이라는 게 들통나면 여러 사람 피곤해진다.
다시 돌아서려던 심양각과 풍연초의 눈이 우연히 마주쳤다.
“심 노제, 왜? 하고 싶은 말이 있소?”
“아닙니다. 그런데 오가다 만난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으면 뭐라 답하실 생각이십니까?”
“초면에 그런 걸 묻는 사람들이 있을라고?”
“흐흐, 이렇게 많은 숫자가 다니면 궁금해하는 놈들이 꼭 하나쯤 나옵니다.”
“그래? 뭐라고 둘러대는 게 좋으려나?”
오봉십걸들이 걸어가며 한마디씩 툭툭 던졌다.
“오봉문 어때요?”
“그보다는 오봉관?”
“왜? 오봉루라고 하지.”
“오라버니들, 왜 꼭 오봉을 넣으려고 하세요? 그보다는 비룡문 어때요? 우리 모두 비룡승천을 배웠잖아요.”
한채연의 말에 허임달이 초를 쳤다.
“그럼 난 승천문.”
“오, 그거 괜찮네.”
“전 비룡문요.”
“이런 젠장.”
오봉십걸들은 비룡문과 승천문 사이에서 좀처럼 의견을 모으지 못했다.
보다 못한 탁고명이 ‘비룡문 할 사람은 비룡문 하고, 승천문 할 사람은 승천문 해’라고 소리쳤다.
오봉산을 거의 다 내려갈 즈음, 풍연초가 ‘용이 길하니 비룡문으로 하겠다’고 선언함으로 문파가 정리됐다.
내친김에 풍연초는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는 죄다 문도들, 연 아우는 사범. 그럼 됐지?”
“형님, 문주는 없수? 형님이 하셔야지.”
탁고명의 물음에 풍연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없어. 괜히 문주가 나설 상황 같은 거 생기면 골치 아파. 안 할래.”
“크크! 저라도 할까요?”
“너나 나나 무슨 차이가 있다고? 안 돼. 문주가 없어야 책임질 일도 없는 거야.”
듣고 있던 심양각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건 채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문주가 있다고 하면 여기저기서 달라 붙을 수도 있습니다.”
“거봐. 들었지?”
풍연초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번에는 하소백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풍 오라버니, 그런데 우리 비룡문은 남직례성에 왜 가는 거예요?”
“왜 가냐 하면……. 그러니까…….”
풍연초가 적당한 답을 찾아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허임달이 끼어들었다.
“남직례성에 승천문이 있어. 우리는 승천문을 도와주러 가는 거야.”
“풋! 허임달. 끝까지 승천문 미는 거야?”
탁고명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던지 풍연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네. 다들 들었지? 누가 물어보면 우리는 무술 사범이랑 남직례성의 승천문으로 가는 중인 거다.”
오봉십걸들이 실실 웃으며 답했다.
“알았습니다요.”
“예, 형님.”
그때 이철산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형님들, 남직례성에 승천문이 있어요?”
“알 게 뭐야?”
“야야.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마. 있음 어떻고 없음 또 어때?”
“하여간 우리 철산이 순진하다니까.”
오봉십걸들의 놀림에 이철산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하가촌에 도착한 오봉십걸은 건량을 넉넉하게 구입한 뒤 동남 방향으로 관도를 따라 걸어갔다.
***
구월 중순.
남직례성 부양.
정오 무렵, 열한 명의 무림인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강남 만사평으로 가고 있는 오봉십걸들이다. 오랜 여행으로 그들의 행색은 조금 남루해 보였지만, 그게 또 허리춤에 걸린 도검과 잘 어울렸다.
“큰형님, 덥고 배고파서 더는 못 가겠습니다. 아무 데나 들러서 좀 먹고 갑시다.”
텁석부리 탁고명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사정했다. 몸에 털이 많은 체질이라 남들보다 더 힘든 모양이다.
풍연초도 지쳤는지 맥없는 음성으로 답했다.
“그래, 좀 쉬자. 나도 죽겠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구밀복검 심양각이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풍 형님, 저기 신양반점이라고 있네요. 저쪽으로 가시지요.”
오봉십걸들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만큼 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신양반점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그러나 열한 명이나 되는 무인들을 본 점소이들은 요령껏 자리를 만들었다.
오봉십걸들은 앉자마자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런 뒤 기다리던 점소이에게 대충 음식을 주문하고 다시 축 늘어졌다.
허공의 한 지점을 멍하니 응시하던 풍연초는 기이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의 오십 대 중년인이 자꾸 힐끔거리는 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다.
풍연초는 딱히 잘못한 일이 없음에도 괜히 찔려서 그의 눈을 슬슬 피했다.
‘혹시 녹림이라는 걸 알아보고 저러는 걸까?’
다행히 중년인은 이내 관심을 끊는 것 같았다.
때마침 음식이 나오자 풍연초는 만사를 잊고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탁자 위의 음식이 거의 사라져 갈 무렵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옆자리의 중년인이 불쑥 말을 걸었다.
“저어 실례합니다만 여행 중이십니까?”
순간 풍연초는 가슴이 철렁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혼자 놀란 풍연초가 퉁명스럽게 되받아쳤다.
“그건 왜 물어보슈?”
“아, 죄송합니다. 제 소개를 먼저 드린다는 게 그만 깜빡했습니다. 여기 부양에 있는 수월상방의 대행수 장한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딸이고요.”
장한영이 자신의 옆에 있던 이십 대 초반의 귀염성 있게 생긴 여자를 가리켜 보였다.
멈칫하던 여자가 묵례를 했다.
얼떨떨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장한영이 즉흥적으로 벌인 일 같다.
번갯불에 콩 굽듯 후다닥 소개를 마친 장한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갑자기 상행을 가게 됐는데 마침 호위할 상방 무사들이 충분치 않아서요.”
“설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 손 거들어 달라는 건 아니실 테고…….”
“허허, 꼭 그렇다기보다는…….”
장한영은 무안한 듯 웃으면서도 암암리에 무인들을 꼼꼼히 살폈다.
늙은 노인 하나만 눈빛이 탁하고, 나머지는 맑고 담백했다.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 역시 명문의 제자들처럼 뭔가 느낌이 좋았다.
그의 착각은 오봉십걸들이 연적하가 가르쳐 준 백자구결을 자나 깨나 암송해서 생긴 일이다.
그 백자구결이 어떤 것이던가!
구천현녀가 가르쳐 준 도가기공의 정수로 숨만 쉬어도 도력이 쌓인다. 비록 직업은 도적일지 모르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고아함은 칠파이문 제자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더구나 오랜 풍찬노숙으로-속세의 찌꺼기를 탈탈 털어 낸 덕분에-수수함 속에 탈속함마저 엿보이니 장한영이 깜빡 속을 만도 했다.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장한영은 적극적으로 들이댔다.
“하하! 백년해로하는 부부도 그 시작은 초면인 법이지요. 그런데 어느 문파의 제자이신지 혹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비룡문의 제자들입니다.”
풍연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 질문에는 정해진 답이 있는지라 생각보다 입놀림이 더 빨랐다.
“아! 비룡문이셨군요. 어느 지역에 있는지…….”
“하남?”
미처 준비 못 한 질문 앞에 풍연초의 자신감이 사라졌다.
의문형의 답이건만 이미 눈에 콩깍지가 씐 장한영은 그걸 간파하지 못했다.
“하남의 비룡문이셨군요. 혹시 가는 방향이 같으면 저희와 동행하실 수 있으신지요? 저희는 회남을 거쳐 합비로 가야 합니다만. 아, 물론 사례는 충분히 해 드리겠습니다.”
당황한 풍연초는 눈만 끔뻑거렸다.
거절하고 싶은데 공교롭게도 가는 방향이 똑같았다.
풍연초가 거절의 말을 준비하고 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이철산이 중얼거렸다.
“어? 우리도 합비를 지나가야 하는데…….”
‘헉! 이 눈치 없는 자식.’
풍연초가 이철산을 쏘아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수월상방의 대행수 장한영이 딱 걸렸다는 표정으로 풍연초를 바라보았다.
***
늦은 밤 부양 외곽의 관제묘.
청석이 깔린 안마당에 십여 명이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았다. 아홉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 오봉십걸들이다. 새벽의 한기와 이슬의 눅눅함 때문에 여름임에도 불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필요에 의해 불을 피우지만 부수적인 효과도 많다. 그중 하나가 시간이 잘 간다는 거다. 해가 떨어지면 딱히 할 일이 없다. 그럴 때 불을 지피면 한 시진(2시간)도 금방이다.
오봉십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멍한 눈으로 불을 보고 있었다. 그 흔한 음담패설도 없다. 오히려 회한에 잠긴 눈빛들이다.
지금이야 녹림의 산적이지만, 이전에 그들은 가난한 화전민. 하얗게 재를 남기고 사라지는 불꽃이 자신의 삶과도 같다는 생각에 씁쓸한 것이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조금씩 변한다. 오봉산에서 산적질을 할 때는 흥청망청 놀 생각만 했는데, 오랜 여행을 하니 잊고 있던 과거가 하나 둘 되살아난다.
기다란 장대로 불속을 헤집던 하소백이 풍연초를 힐끔 바라보았다.
“풍 오라버니, 낮에 그 대행수의 제안을 왜 거절하셨어요? 어차피 가는 방향도 같았는데. 같이 가면 돈도 벌고 좋은 거 아닌가요?”
“험. 우리가 누군지 잊었느냐? 만에 하나 그들과 함께 가다가 녹림과 얽히기라도 해 봐라. 으으.”
풍연초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큰형님 말이 맞다. 다른 건 몰라도 상방과 동행하는 건 피해야 한다.”
탁고명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 그렇구나.”
하소백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가득했다.
사실 그녀는 잠시나마 평범한 무인들의 강호행 같은 걸 꿈꿨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알려진 무인들의 낭만 넘치는 일상 말이다.
그런 하소백의 속마음을 아는 한채연이 피식 웃었다.
“강호의 여협 흉내를 내고 싶었나 보구나?”
“뭐, 조금? 언니는 안 그랬어요?”
“훗! 전혀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자신들이 꿈꾸던 강호의 생활에 대해 말했다.
풍연초가 다소 착잡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여협이라…….’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자신도 그런 꿈을 꾸었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말이다. 가난한 부모는 입 하나 줄여 보겠다고 자신을 떠돌이 약장수에게 맡겼다. 그 뒤로는 보다시피 산적.
그러나 연적하에게 백자구결을 배운 뒤로 매일매일이 새롭다. 깊은 호흡에 빠졌다가 나오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하아!”
풍연초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웬 한숨이슈?”
심드렁하게 말한 탁고명이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불속으로 집어 던졌다.
“내가 마누라와 애들이 있다는 소리 했었냐?”
“처음 듣는데요?”
“개봉에 있을 텐데,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다. 십 년 동안 찾아가 보질 않아서.”
포교를 피해 산으로 숨어든 뒤 잊고 살았다.
“어이쿠! 무정한 분이시네.”
“요즘 좀 생각이 나네.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내가 갈 때가 된 건가?”
“푸헐! 형님. 갈 때가 된 게 아니라 사람이 된 거요. 가족이 보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뇨?”
절에서 자란 탁고명은 오히려 조금 부러운 눈치다.
가정을 꾸려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사십 대니 그럴 법도 하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오봉십걸들이 하나 둘 잠이 들었다.
모닥불 빛도 조금씩 희미해졌다.
찌르르르.
고요한 밤, 매미 우는 소리만 요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