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1
31회. 조금만 도와주세요
처음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은 한채연이었다.
한채연은 가장 친한 하소백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 말을 들으니까 그런 것도 같아. 확실히 요즘 적하 오라버니가 좀 변한 것 같아.”
“그렇지? 그렇다니까. 며칠 전에 그 녹림사자라는 사람하고 싸우던 날 기억 안 나? 갑자기 손가락을 이렇게 꼬물거리면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잖아.”
한채연이 하소백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접었다가 폈다.
“음, 진짜 그러네. 한창 싸우다가 말고 장난 칠 생각이 들었을까?”
“그것도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던 하소백이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언니, 그래도 심심한 사람보다는 나은 거 아냐?”
“으으, 난 그런 장난은 좀 무서워. 손바닥에 구멍을 내고 할 말은 아니잖아.”
“그래서 언니는 적하 오라버니가 무서워?”
“누가 오라버니가 무섭대? 그런 식의 장난이 낯설다는 거지.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까.”
“하아! 적하 오라버니가 나한테도 장난 좀 쳐 줬으면 좋겠다.”
그때 뒤에서 연적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장난?”
“꺅!”
“어머! 깜짝이야!”
평상에 앉아 있던 두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연적하가 하소백의 옆에 걸터앉으며 다시 물었다.
“내가 장난을 쳐 줬으면 좋겠다면서? 무슨 장난을 좋아해?”
“아니 그냥 요즘 심심해서 해 본 소리예요.”
하소백이 얼굴을 붉히며 다소곳이 앉았다.
“산행을 나가도 싸울 일이 없으니까 심심해?”
“그런 거 아니에요.”
하소백이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솔직히 하소백은 칼부림 없는 요즘이 가장 행복했다.
상방의 무사들과 싸우고 나면 왠지 마음이 무겁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심심하면 무공 수련을 더 해. 내가 좀 해 보니까 끝이 없겠더라고. 무공이라는 거.”
한채연이 연적하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와아! 오라버니 같은 고수도 끝이 없어요? 그럼 진짜 심각한데.”
“뭐가 심각해?”
“오라버니가 그 정도면, 우리 같은 하수들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거잖아요.”
“이 아가씨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 내가 도사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 그게 뭔지 알아?”
“뭔데요?”
두 여자의 반짝이는 눈이 연적하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연적하가 조금은 거들먹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그건 바로 만류귀종.”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공의 끝에 도달하면 다 같다는 거야. 오봉산 제일봉에 오르는 길은 많지? 하지만 꼭대기는 하나야. 그렇지?”
“네.”
두 여자가 한목소리로 답했다.
“그 도사 할아버지가 무당파 무공으로 꼭대기에 오르나, 내가 열심히 해서 꼭대기에 오르나, 너희 둘이 백자구결과 일초 검식으로 꼭대기에 오르나 결과는 같은 거야.”
한채연이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에이, 아닌 것 같은데.”
“저도요.”
하소백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연적하가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내가 그런 게 아니라 그 도사 할아버지가 그랬다니까. 그 도사 할아버지 박식한 거 두 사람도 잘 알잖아. 그러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
두 여자는 연적하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사실 그는 요즘 장난이 좀 늘었지만 허튼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한채연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그거 알아요? 오라버니가 천지상인 만나고 나서 엄청 밝아진 거?”
“내가?”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는 별로 변한 게 없는데 밝아졌다니 의아할 뿐이다.
하소백이 한마디 툭 던졌다.
“장난도 많이 치시잖아요.”
“언제?”
한채연이 연적하의 눈앞에 손가락 두 개를 쑥 내밀고 까딱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한채연이라고 해요.”
“아하하.”
연적하의 입에서 억지웃음이 흘러나왔다.
한채연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인정하시죠?”
“그래, 알았어. 내가 좀 심했어. 됐지?”
“어머, 뭐라고 하는 거 아닌데. 오라버니가 밝아져서 보기 좋다고요.”
“저도요. 천지상인하고는 뭘 하신 거예요? 매일 땀에 젖어서 오시는 거 같던데.”
“내가 많이 배웠어.”
그러자 하소백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 말도 안 돼. 그 도사가 오라버니보다 약한데, 배웠다고요?”
“쯧쯧! 다들 뭘 모르시는데. 저기 나무 보이지?”
“네.”
“곧고 단단한 게 저 나무의 강점이지. 그 밑에 자라는 풀과 달리. 하지만 태풍이 분다고 생각해 봐. 강점은 약점이 될 수도 있어. 반대로 약점이 강점이 되고. 강함과 약함은 그렇게 음과 양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보완하는 관계야. 사실 그래야 오래가고.”
이건 모두 천지상인이 해 준 말들이다.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나무고 천지상인이 풀이지만, 둘 사이에 강함을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 대충 그런 뜻인가요?”
하소백은 여전히 알쏭달쏭한 얼굴이다.
소학까지 공부한 연적하와 달리 천자문도 읽다 만 그녀에게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였다.
“비슷해. 강하다고 다 강한 게 아니고, 약하다고 다 약한 게 아니야.”
“네, 조금은 알 것도 같아요.”
“저도요.”
한채영과 하소백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때 여덟째 이철산이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연 형님, 큰형님이 상화각으로 좀 와 주시랍니다.”
“무슨 일인데?”
“녹림대회로 상의할 게 있답니다. 너희 둘도 같이 가자. 형님이 오봉십걸을 다 부르셨다.”
세 사람은 이철산을 따라 상화각으로 이동했다.
***
상화각.
오봉십걸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흐뭇한 눈으로 찬찬히 아우들을 둘러보던 채주 풍연초가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녹림대회의 참가 문제로 모이라고 했다. 심 노제 말이 늦지 않으려면 적어도 사나흘 안에는 출발해야 한다는구나.”
부채주 탁고명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큰형님, 가는 건 좋은데 우리 중에 누군가 남아서 산채를 지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식구들 데리고 산행도 나가 줘야 할 테고요.”
“그렇지 않아도 그걸 정하자고 불렀다. 네 생각에는 누굴 남겼으면 좋겠느냐?”
“형님, 일단 남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더러 남으라고 하시죠.”
고개를 끄덕이던 풍연초가 아우들에게 물었다.
“모두 들었지? 오봉십걸이 다 가면 좋겠지만 산채를 지킬 사람 하나쯤은 남기는 게 좋을 것 같다. 너희 중 혹 산채에 남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
다들 가고 싶은지 딴청만 부렸다.
심지어 평소 꼼지락거리기 싫어하는 연적하마저도 지원하지 않았다.
“남고 싶은 사람이 없는 모양인데…….”
풍연초가 답답한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모두 의형제라 본인이 싫다고 하면 강요하기 어려워 더 머리가 아프다.
그때 셋째 마형도가 입을 열었다.
“큰형님, 꼭 우리 오봉십걸 중에 누군가 남아야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경험 많은 심 노제에게 길안내를 맡기고, 황가에게 잘 지키라고 하면 되지 않나요?”
“산채를 황요명에게 맡기자고?”
“예, 어차피 그놈 재주로는 딴짓도 못 할 겁니다.”
하기야 노마두 심양각이라면 혹 모를까, 황요명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연적하의 무위를 아는 다른 산적들이 알아서 몸을 사릴 테니까.
풍연초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고민할 것도 없었다.
“탁 아우, 나는 그래도 될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예,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제야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오봉십걸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렇게 하지요?”
“한 사람 남기는 건 좀 별로인 것 같습니다.”
“만약 저 혼자 남아 있으면 불안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습니다.”
“그건 그러네요.”
아우들의 말을 듣고 있던 풍연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녹림대회는 우리 오봉십걸이 모두 가는 것으로 하자. 그래서 말인데 연 아우?”
“예?”
“아니, 아니야.”
풍연초는 연적하에게 ‘녹림대회에서는 가급적 싸움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하려다가 말았다. 약속한다고 될 일도 아닐뿐더러, 괜한 말로 연적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
낙양 동편 언사.
와룡장.
와룡장이 문호를 개방하자 참월검객 연무룡의 검법을 흠모하던 낭인들이 몰려들었다. 백미주가 ‘외부 제자들에게도 참월검객의 검법을 가르치겠다’는 소문을 슬쩍 흘린 덕분이다.
칠파이문과 오대세가의 제자가 되기란 어지간한 인맥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에 비하면 와룡장의 제자가 되는 건 식은 죽 먹기. 낭인들이 몰려드는 건 당연했다.
연미주는 장자인 연무백을 대사부로 내세워 낭인들에게 구천세법을 가르쳤다. 물론 그들에게 구 식을 모두 공개한 건 아니다.
먼저 낭인들의 재능과 충성도에 따라 삼단으로 나누고, 충성도가 높은 천단은 육 식, 그다음 지단은 사 식, 마지막 인단은 이 식까지 가르쳤다.
내공심법은 연씨 선조들이 만든 와룡심법을 가르쳤다. 그것은 시중에 돌아다니는 삼재심법보다 뛰어난 것이어서 낭인들이 좋아했다.
여름이 되자 와룡장 삼단 소속 제자들 숫자는 무려 오십여 명으로 늘어났다.
제자들의 수가 늘자 와룡장은 사업 확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십여 명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데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와룡장 안채.
안주인 백미주와 총관 연무독이 마주 앉아 사업 확장에 대한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백미주가 상방과 손잡기를 원했다면, 연무독은 주루와 객점의 관리를 주장했다.
“오라버니, 우리가 주루와 객점에 손을 대면 의천문에서 보고만 있겠어요? 그들과 경쟁한다는 건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요. 아시잖아요?”
의천문은 무관에서 시작해 지금은 칠파이문으로 불리는 강력한 문파다. 군부와 관부는 물론 주루와 객점, 도박장까지 그들의 제자가 없는 곳이 없었다.
“낙양이 어려우면 언사에서 시작하면 되지 않느냐?”
“고작 두세 개를 관리해서 백 명이 넘는 식솔들을 먹여 살릴 수 있겠어요?”
“삼단의 제자라고 해 봐야 오십 명인데…….”
“네, 아직은 그렇죠. 겨울이 오기 전에 백 명으로 늘릴 생각이거든요.”
“그거야말로 무리다. 왜 그렇게 조급하게 서두르는지 모르겠구나.”
백미주가 짜증 어린 눈으로 연무독을 바라보았다.
와룡장의 힘을 키우는 일은 장자인 연무백이 잘해 나가고 있다. 지금까지는 필요에 의해 낭인을 받았지만, 이제 곧 소년들도 모을 생각이다.
문제는 문하생들의 의식주에 들어가는 돈이다.
와룡장이 안정적인 재원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연씨 일족의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연무독을 불렀는데, 자꾸 딴소리만 해 대니 속이 뒤집힐 지경이다.
“오라버니, 저에게 바라는 거라도 있으세요?”
백미주가 대놓고 묻자 연무독은 시선을 회피했다.
뒤늦게 그녀는 그가 어깃장을 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곰곰 생각해 보니 큰아들 연무백이 돌아온 뒤로 그를 멀리한 게 원인인 것 같다.
백미주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연무독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아! 오라버니, 제 마음 아시잖아요. 그간 소홀히 대한 일로 섭섭하게 생각하시는 거 알아요. 앞으로 더 잘해 드릴게요.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내가 뭘 어쨌다고.”
백미주의 부드러운 손이 연무독의 무릎 위에 얹어졌다.
“낙양의 백세상방이 지금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됐어요. 상방에 진출하는 건 칠파이문도 묵인하는 일이잖아요. 백세상방을 시작으로 신뢰를 쌓으면 금방 클 수 있어요. 와룡장이 자리 잡을 때까지 조금만 도와주세요. 네에?”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아흑.”
백미주가 어딜 만졌는지 연무독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