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0
30회. 만나서 반가워요
녹림 칠십이 채의 총채주 파천마군 석무해는 소림사 잡부였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창고에 방치된 낡은 목조 불상을 청소하면서 바뀐다. 불상 배 속에서 암천수라진경이라는 고대 무경(武經)을 발견한 것이다.
암천수라진경을 손에 넣은 그는 즉시 소림사를 떠나 천하를 떠돌아다닌다. 그리고 이십 년 후, 녹림의 총채주 자리를 무력으로 쟁취한다.
총채주가 된 그는 천하의 도적들 중에 가장 뛰어난 열두 명을 제자로 거두어들여 수족처럼 부렸다. 그들이 바로 저승사자로 알려진 녹림의 십이마군이다.
강호에서 십이마군은 칠파이문 장로급에 해당하는 대접을 받고 있다. 그들 모두가 암천수라진경이라는 희대의 무학을 익힌 고수인 까닭이다.
지금까지 십이마군에게 수모를 당한 칠파이문 장로는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청성파의 장로는 시비 끝에 팔이 잘리기까지 했다.
녹림대회를 앞두고 총채주 파천마 군은 십이마군을 사자로 보냈다. 당연하게도 십이마군들은 가는 곳마다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오봉산채를 만나기 전까지는 음풍묘군도 그랬다.
그런데 이 하룻강아지들은 자꾸만 ‘하지 말라’고 한다.
결국 음풍묘군은 오봉십걸을 족쳐 여자를 뺏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일부러 자리를 깔고 있는데, 고맙게도 누군가 걸려들었다.
“손에 뭐, 어쩌라고요? 술을 처먹었으면 곱게 주무시든가 하지, 왜 밤중에 남의 산채까지 기어 와서 잠도 못 자게 지랄이세요?”
음풍묘군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처먹었느니, 지랄이니 하는 상스러운 소리를 듣지 못한 지가 워낙 오래돼 실감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설마 아니겠지?’
칠파이문 놈들도 십이마군을 슬슬 피해 다니는데, 설마 오봉산채의 도적들이 그런 소리를 했을라고.
취기를 다 떨쳐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나이가 드니 몸의 회복력도 좀 떨어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밤일도 부실해진 느낌이다.
그가 한창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때 예의 그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거기 아저씨, 입이 있으면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지. 귓구멍이 막히셨나? 목소리는 쩌렁쩌렁하던데.”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이건 분명히 자신을 겨냥한 말이다.
음풍묘군은 소리의 진원지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도적들 틈 속에서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새파랗게 어린놈이 눈알을 부라리고 있었다.
‘미친놈인가?’
음풍묘군으로서는 그런 생각이 당연했다.
산채에 머리를 다친 모지리가 하나 정도 있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저런 놈은 주변에서 좀 끌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오봉산채의 도적들은 마치 귓구멍이 없는 듯 미친놈을 제지하지 않았다.
무림에서의 위치나 녹림의 지위를 볼 때 저런 미친놈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 게 낫다. 저런 건 죽여 봤자 손만 더러워질 뿐이다.
음풍묘군은 다시 풍연초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왜? 쫄았냐?”
콰아아아아-.
음풍묘군의 전신에서 유형화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헉!”
“으헛!”
가장 가까이에 있던 풍연초와 탁고명이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음풍묘군은 미친놈에게 손을 뻗었다.
손이 더럽혀진다 해도 더 이상 살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섯 손가락 끝에서 뽑아낸 기운으로 미친놈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뿌득.
갑작스러운 동작에 손가락 관절이 비명을 내질렀다.
원래대로라면 미친놈은 제 목을 움켜잡고 버둥거리다가 죽어야 정상.
그런데 눈을 말똥말똥 뜬 미친놈이 나불거렸다.
“뭐하세요? 미쳤어요?”
“놈!”
콱. 콱.
몇 번이나 손을 오므렸지만 미친놈은 멀쩡하게 서 있었다.
손바닥 안에서 터질 것처럼 날뛰는 진기를 보면 자신의 문제는 아니다.
그제야 음풍묘군은 손을 거두어들였다.
문득 ‘어린아이와 여자와 노인을 경계하라’는 강호의 속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는 누구냐?”
“연적하. 그러는 너는 누구세요?”
꽤나 싸가지 없는 물음에도 음풍묘군은 흔들리지 않았다.
파천마군에게 무공을 배울 때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어리지만 저놈은 자신의 공력을 흔적도 없이 파훼했다. 그러니 흥분은 금물.
“본좌는 음풍묘군이라고 한다.”
“이야! 이름 참 잘 지으셨다. 발정 난 개가 하고 다니는 짓이랑 딱 맞네. 그렇죠?”
“너도 오봉산채의 일원이냐?”
“오봉십걸인데 왜요?”
“…….”
음풍묘군은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시비가 붙었는데 오봉십걸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떻단 말인가.
“하긴 상관없지.”
동시에 음풍묘군의 몸이 그 자리에서 유령처럼 사라졌다.
다음 순간 그는 연적하 앞에 나타났다.
얼마나 빠른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다.
쉬익.
활짝 펼쳐진 음풍묘군의 손바닥이 연적하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독문절기인 음풍백골조다.
암천수라진결의 공력이 담긴 손가락은 창칼보다 더 단단하고 날카롭다.
음풍묘군은 처음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연적하는 천지상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도 그는 딱히 ‘빚을 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도 천지상인이 상승의 무리를 깨닫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둘 중에 누가 더 이익인가를 면밀하게 따지면 연적하다.
천지상인이 깨달음의 시간을 앞당겼다면, 연적하는 모르던 걸 배웠다. 천지상인이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백 년이 지나도 몰랐을 것이다.
천지상인은 무학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이를 테면 검술에 있어서 거리의 중요성이라든지, 항상 존심(存心, 본심을 잃지 않아 방심하지 않는 마음 가짐)을 유지하라는 등의 가르침 말이다.
그는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태도에 대해 몇 번이고 강조했다. ‘모자라면 내가 다치고, 넘치면 힘을 낭비하게 되니 상대에 맞는 안목을 기르라’고 했다.
그제야 연적하는 천지상인의 태극혜검에 항마도법으로 맞선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알았다. 만약 그때 천지상인의 태극혜검이 삼극 연동에 이르렀다면, 자신은 팔 하나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천지상인에게 기초를 배우는 동안 연적하는 일체의 공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거리와 존심을 체득하고, 안목을 기르는 데 매진했다.
기초가 쌓이고, 안목이 늘자, 자연스럽게 초식의 이면에 담겨진 뜻이 보였다. 천지상인은 그걸 심안(心眼)이 열린 것이라고 했다.
무식하게 몸으로 익힌 구천세법과 구천구검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구천세법의 또 다른 묘용도 알아냈다.
구천구검과 달리 그것은 검법만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구천세법은 몸을 단련하기 위한 아홉 가지 동작들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어쩌면 그래서 ‘세법(勢法)’이라는 명칭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검을 쓰면 구천검법이지만, 도를 들면 구천도법이 되는 셈이다. 그동안 박도로 구천세법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지금처럼 검결지를 사용하면 구천지법이 되는 걸까?’
찰나지간에 검결지를 뻗으며 연적하는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다.
가가가각.
연적하의 검결지와 음풍묘군의 음풍백골조가 중간에서 마주쳤다.
연적하의 검결지가 음풍묘군의 손바닥에 꽂혔다.
마치 창과 방패가 만난 형국이다.
음풍묘군은 암천수라진결의 공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 손바닥에 밀어 넣었다.
손바닥이 화끈거렸지만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암천수라진결을 익힌 뒤로 단 한 차례의 패배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여기까지 오면 그다음은 정해져 있다.
상대를 끝까지 밀어붙여 팔이나 머리통을 움켜잡으면 끝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크읏!’
화끈거림이 더 심해졌다.
음풍묘군이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몹시도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손가락 두 개가 자신의 오른 손등을 뚫고 나온 것이다.
“으헉!”
다급한 신음과 함께 음풍묘군은 펼쳤던 손가락을 오므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손가락이 계속 전진해 손바닥을 찢어 버릴 것 같았다.
그때다.
바로 눈앞에서 멈춰선 검결지가 접혔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이건 또 무슨 수법일까?
대경실색한 음풍묘군의 팔뚝에 삐죽삐죽 소름이 돋았다.
음풍백골조가 깨진 상황이라 이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음풍묘군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어 갈 때다.
“안녕하세요? 나는 연적하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우헤헤.”
손가락이 꾸물거리며 접히는 동작에 맞춰 연적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헐!’
음풍묘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 미친놈은 이 상황에서 손가락 인사를 하고 있었던 게다.
이걸 생사의 대결로 생각한 건 자신뿐이라는 말인가?
전의를 상실한 음풍묘군이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음풍묘군이오. 그만합시다.”
순간 연적하의 검결지가 쑥 빠져나갔다.
음풍묘군은 왼손으로 손바닥의 구멍을 막고 연적하의 눈치를 살폈다.
“아저씨. 아까 손이 확 다가올 때 얼굴로 냉기가 막 밀려오던데. 어떻게 한 거예요?”
‘크윽! 개자식…….’
음풍묘군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남의 손바닥에 구멍을 내고 저렇게 해맑은 얼굴이라니?
스승인 파천마군이 무공을 가르칠 때 딱 저랬다. 제자들을 잡아 죽일 듯 몰아붙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시시껄렁한 농담을 했다.
그때마다 십이마군들은 웃으며 호응해 줬다.
지금처럼.
“하하, 그건 내가 익힌 음풍백골조라는 무공 때문이네. 음풍이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은 게지.”
음풍묘군의 입에서 기름기를 쫙 뺀 탈속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과거 파천마군에게 맞고 나서 짓던 담백한 웃음이 십여 년 만에 재현된 것이다.
“아, 음풍이 발정난 개라는 의미가 아니었구나. 내가 오해한 거였네.”
“전혀 아닐세. 여기서 음풍이라 함은 우주의 음한 기운을 뜻하는 것으로…….”
“됐고요. 아까 갔다고 들었는데 산채에는 왜 다시 온 거예요? 내 눈을 보고 똑바로 말해 봐요.”
“그게, 그러니까, 가려다가 생각해 보니 오봉십걸에게 인사를 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일세. 사람이 정도 있고, 또 예의도 있고 그런 거라서.”
“그럼 빨리 인사하고 가요. 자러 가야 하니까.”
연적하의 재촉에 음풍묘군은 머뭇거렸다.
무림에는 서열, 즉 배분이라는 게 있다. 자신의 위치가 오봉십걸보다 한참 높은데 어떻게 먼저 인사를 한단 말인가. 이건 싸움에서 진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아! 진짜. 피곤하게 하시네. 확 묻어 버릴까.”
음풍묘군이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연적하의 짜증 어린 말에 마지막 자존심이 날아갔다.
이런 곳에서 죽는 거야말로 진정한 개죽음이 아닌가 말이다.
“아하하! 가네, 가. 오봉십걸 형제들, 나는 이만 가 보겠네. 만사평에서 다시 만나세나.”
기가 꺾인 음풍묘군은 오봉십걸에게 평대를 했다. 파격적으로 형제라는 호칭까지 붙였다. 연적하 때문에 오봉십걸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다.
풍연초와 탁고명을 비롯한 아홉 명의 오봉십걸이 황송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홀로 삐딱하게 서서 손을 까딱이는 연적하의 모습이 비수처럼 음풍묘군의 눈에 박혔다.
음풍묘군은 어색하게 웃으며 구멍 난 손을 흔들었다.
오봉십걸이라는 풋풋한 이름 속에 저런 괴물이 숨어 있었다니!
저놈이 참석할 만사평의 녹림대회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답답하다.
‘총채주님이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슬그머니 돌아선 음풍묘군은 독문의 경공술로 바람처럼 장내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