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61
361회. 거울과 물
모든 일에 끝은 있는가 보다.
한 시진(2시간)쯤 지나니 꼬리를 물던 잡념도 조금씩 간격이 멀어졌다.
더 시간이 지나자 어쩌다 하나씩 머릿속을 맴돌다 사라졌다.
그러다 마침내 허무(虛無)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것은 구천여일진경이 가르치는 허심(虛心)과도 결이 같았다.
단전에 침잠해 있던 구천기가 저절로 일어나 기경팔맥을 거침없이 쓸고 다녔다.
구천기는 쉬지 않고 열두 번이나 몸을 돌고 나서야 단전에 안착했다.
구천기를 관조하던 연적하가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와룡장의 창고 안에 있던 ‘구천현녀경’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도 ‘구천현녀경’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동경(銅鏡)에 비친 자신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저건 자신이 겨우내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았던 구천현녀경이 분명했다.
‘진짜일까?’
머뭇거리던 연적하는 거울로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거울 표면에 닿는 순간, ‘첨벙’ 소리와 함께 몸이 뒤집혔다.
물속에라도 빠진 듯 숨까지 턱 막혔다.
대경실색한 연적하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팔다리를 휘적거렸다.
“으아아아!”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게 사라졌다.
연적하는 멍한 표정으로 정면의 한 지점을 응시했다.
구천현녀경이 서서히 어둠 속으로 녹아들더니 종내는 사라져 버렸다.
‘뭐지? 내가 잠깐 졸았나?’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경험한 것은 명상 중에 일어난 일이라 치부하기 어려웠다.
‘이런 젠장. 이제라도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꼬르르륵-.
배 속에서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고작 한 시진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왜 벌써 이러는지 모르겠다.
조금 정신을 집중할라치면 ‘꼬르륵’ 소리가 분위기를 깼다.
“와아! 미치겠네. 뭐 얼마나 지났다고 이 난리야.”
한번 집중이 흩어지자 극심한 허기가 밀려왔다.
“내 배가 마귀구나. 졌다. 졌어.”
연적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지의 관절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무시하고 무심코 발을 들어 올리는데 무릎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젠장! 이것도 언령의 저주인가?”
나쁜 것은 더욱 나쁘게 만든다더니 몸이 아주 걸레가 된 것 같다.
투덜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가던 연적하가 흠칫 놀란 얼굴을 했다.
검붉은 석양을 등에 지고 오룡칠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오룡칠사 속에 있던 청불노가 환하게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고생 많았다.”
“고생은요. 남들 다 하는 걸.”
연적하가 계면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비밀이라더니 왜 오룡육사들까지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다.
연적하가 청불노에게 속삭였다.
“스승님, 다른 도사님들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러자 오룡궁의 궁주인 천명 도사가 오룡육사를 대신해서 말했다.
“왜긴, 청불노의 기명제자가 흑암동에 들어가서 칠 일이나 두문불출 한다니 와 본 거지. 무당파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하네.”
“칠 일요?”
연적하가 황당한 눈으로 청불노를 보았다.
한 시진을 조금 넘긴 것 같은데 칠 일이나 지났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청불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칠 일 만에 밖으로 나왔다. 네 수도가 예상보다 길어져 오룡육사들에게 알리고 교대로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오늘쯤은 나올 것 같아서 모이라 한 것이다.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오룡칠사의 시선이 일제히 연적하를 향했다.
흑암동, 혹은 암흑동이라고도 불리는 동굴에서 연적하가 무엇을 얻었는지 궁금해서다.
머뭇거리던 연적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거울요.”
“거울?”
“거울이라!”
“거참. 묘하군.”
“수도사에게 거울이라니.”
“얼굴에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 걸 보았나?”
“허. 무슨 의미려나.”
오룡육사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청불노는 오룡육사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칠 일간이나 명상을 한 끝에 본 것이라면 보통이 아닐 것이었다.
“혹 전에 말한 ‘구천현녀경’을 보았느냐?”
“예.”
‘구천현녀경’이라는 말에 오룡육사들이 관심을 보였다.
구천현녀가 도가(道家)의 여신이니 당연하다.
“‘구천현녀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천명 도사의 물음에 청불노가 간단히 답했다.
“내 제자가 어린 시절에 집안의 창고에서 발견한 구천현녀를 새긴 거울이라오. 그 거울 덕분에 큰 위기를 넘긴 적이 있다고 하니 그에게는 ‘부신(符神)’이나 마찬가지외다.”
도가에서 ‘부신’은 ‘기원하는 대상’을 의미한다.
그러니 청불노는 연적하와 구천현녀의 관계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도사들은 저마다 특별히 믿고 의지하는 신들이 있다.
그러니 연적하의 ‘부신’이 구천현녀라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청불노의 설명은 시의적절해서 그것만으로도 오룡육사들은 더 묻지 않았다.
오룡궁의 궁주인 천명 도사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 결국 연남천은 ‘부신’을 보았다는 말이군요. ‘부신’을 대면하다니 놀라운 성취입니다. 청불노께서는 뛰어난 기명제자를 들이셨습니다.”
천명도사의 그 말로 다소 의아해하던 분위기는 반전됐다.
그냥 ‘거울’이라고 하면 요상하지만 ‘부신’이라 하면 또 의미가 달라진다.
운명이 ‘부신’과 이어졌으니 그보다 더 좋은 것도 없다.
오룡육사들은 청불노와 연적하에게 덕담을 건네고 먼저 떠나갔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청불노가 물었다.
“그래, 거울을 본 것이 전부더냐?”
“아니요. 거울을 손으로 만지는데 갑자기 몸이 확 뒤집어지면서 물속에 있더라고요. 한참 허우적거리다가 정신을 차리니 거울이 사라졌어요.”
“거울과 물이라. 흠! 기이하군.”
“제가 깜빡 졸면서 개꿈을 꾼 거 같아요.”
“허허허! 개꿈이라니. 칠 일이다. 만약 네가 잠들었다면 하루 만에 깨어났을 게다. 구천현녀경이 네 부신이라면 물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승님, 아까부터 부신이라고 하시는데, 그게 뭐예요?”
“쯧! 수련자라는 녀석이 부신도 모르다니. 오후에는 부적술을 배우러 다니거라.”
“예, 부적에 나오는 건가 보죠?”
“그렇다. 부적은 부주칠법(符籌七法)에 따라 그리게 되어 있다. 각각 부수(符首), 부자(符字), 부도(符圖), 부신(符神), 부서(符誓), 부담(符膽), 부각(符脚)이라 하는데, 그 하나하나마다 의미가 있지. 그중 부신은 ‘기원하는 대상’에 관한 것이다. 나는 오룡육사들에게 구천현녀가 너를 돌보아 주었음을 ‘부신’으로 돌려 말했다. 너도 구천현녀는 철썩같이 믿고 있지 않느냐?”
“그건 그래요.”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신들이야 만나 본 적이 없어서 영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구천현녀는 다르다.
창고에서 자그마치 십 년 동안이나 구천현녀경을 끼고 살아서 그런지 의지가 됐다.
지금의 그에게 구천현녀는 부모보다 가까운 존재라 할 수 있었다.
“남천아.”
“예.”
“물이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죽은 자들이 건넌다는 황도천이나 삼천이 그런 것이지. 네가 물에 빠졌다는 것은 그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제가 죽는다는 건가요?”
“이놈아. 내가 언제 죽는다고 했느냐? 물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라고 했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지. 찰떡같이 말했는데 왜 개떡 같은 소리를 해?”
노스승의 질책에 연적하가 계면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언제고 그 경계에 서게 될 날이 있을 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쩌긴? 경계란 본디 넘기 위해 있는 법. 네 ‘부신’을 믿고 나아가거라. 그것이 네 운명이다.”
“예. 그런데 스승님이 찰떡 개떡 그러니까 배가 고파지네요.”
뒤늦게 연적하의 상태를 깨달은 청불노가 호들갑을 떨었다.
“어이쿠! 늙은이가 주책이지. 어서 가자. 지금 가면 저녁 시간에 늦지 않을 게다.”
“예!”
청불노와 연적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숲을 헤치고 나갔다.
멀리 오룡궁이 나타나자 연적하가 물었다.
“그런데 스승님. 팔선각의 수련자들도 제가 흑암동에 갔다는 걸 알고 있나요?”
“그들은 모른다.”
“아, 그럼 제가 스승님의 제자라는 것도 모르겠네요?”
“그래. 네가 나의 기명제자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오룡육사들밖에 없다.”
“계속 비밀로 하실 거죠?”
“왜? 팔선각의 수련자들이 신경 쓰이느냐?”
“예.”
“녹림의 거친 사내들 속에서도 잘 살았으면서 수련자들이 뭐가 어렵다고?”
청불노는 연적하의 소심함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흉신악살 같은 도적들 중에서도 연적하의 이름은 단연코 상위에 있었다.
그런 연적하가 한낱 수련자들의 눈치를 보다니?
“솔직히 제가 경전과 술법에 대해 모르잖아요. 이런 제가 스승님 제자라는 게 알려져 봐요. 사람들은 제가 돈을 써서 제자가 됐다고 생각할 거예요. 괜히 스승님만 욕을 먹게 된다니까요.”
연적하의 말도 일리가 있는지라 청불노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러니까 그냥 지금처럼 오룡육사님들만 알았으면 좋겠어요.”
“네가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마.”
청불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의 유일한 바람은 등선하기 전에 제자에게 ‘언법’을 제대로 전하는 것이다.
그 뒤에 남겨진 일은 어차피 오룡육사들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었다.
“그래도 칠 일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수련자들이 궁금해 할 게다. 그들에게는 뭐라고 말할 생각이냐?”
“얼굴 치료를 위해서 잠시 하산했다가 돌아온 것으로 하면 어떨까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그렇게 해서 흑암동에서 보낸 칠 일의 변명이 완성되었다.
쓰린 배를 움켜잡고 걸어가던 연적하가 청불노를 힐끔거렸다.
“왜 그러느냐?”
“이런 걸 여쭤봐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말해 보려무나.”
“저에게 항상 말씀하시기를 ‘말이 중하니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시니 조금 헷갈려서요.”
“그야 아직 ‘언법’을 전하지 않았으니 그런 것이다. ‘언법’을 받은 뒤로는 말의 무게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느니라. ‘언법’의 수련을 위해서라도 꼭 그리해야 한다.”
“아, 그런 거군요. 그 ‘언법’이라는 법보가 생각 외로 까다롭네요?”
“그러니 그 공법이 법보 소리를 듣는 게 아니겠느냐. 수련하기는 어려워도 공능은 주문이나 부적보다 나으니 소홀히 하지 말거라.”
“예, 예.”
연적하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게 자신의 생활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 것인지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
오룡궁.
팔선각 남채고.
저녁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수련자들이 힐끔거렸다.
담당자인 유운 도사는 궁주인 천명 도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채고 수련자들의 반응은 달랐다.
마치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좋았는데 왜 다시 돌아왔지?’ 하는 불편한 얼굴이었다.
사실 그들의 눈에 연두비는 ‘남채고의 물만 흐리는 미꾸라지’였다.
팔선각에서 그의 ‘지독한 부스럼’과 ‘부정한 돈거래’를 모르는 이가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다가와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만황주와 천상동이다.
“소형제, 며칠 안 보이던데 무슨 일 있었나?”
“딱 보니 얼굴이 홀쭉한 게 남암궁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왔네. 내 말 맞지?”
막 ‘옥황경(玉皇經)’을 펼치려던 연적하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반듯한 수련자들은 자신을 소 닭 보듯 하는데 저 둘만 관심을 보인다.
노골적으로 밀어내도 이처럼 먼저 다가오니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구천현녀님, 내가 똥이라 파리만 꼬이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