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64
364회. 연남천에게 전하노라
연적하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을 꽉꽉 채워 나가더니 목까지 차올랐다.
“그런 얼굴 할 것 없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한번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지금은 내가 가지만 언젠가는 네 차례도 올 게다.”
“예…….”
안다.
알지만 슬픔을 떨칠 수는 없었다.
“사조께서 어린 나를 제자로 거두시고 ‘청불노’라는 도명(道名)을 내려 주셨다. 나는 평생토록 내 도명이 파릇파릇한 시절의 비유인 줄로만 알았는데, 오늘에야 문득 그게 아님을 알았다.”
“…….”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말라는 소리였다. 남천아, 마음이야말로 불로불사다. 너는 그 이치를 알겠느냐?”
“예.”
연적하는 공손히 답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한마디 한마디가 아깝고 소중했다.
청불노가 흐뭇한 시선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그래도 등선을 앞두고 너를 제자로 받아 다행이다. 언법(言法)을 물려주지도 않고 가면 사조께서 나를 가만두지 않으실 테니까.”
말이 힘들어지자 청불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는 정말 등선할 때가 된 모양이다.
“그동안 너에게 꼭 필요한 술법들만 가르쳤다. 나머지는 오룡궁에서 차차 배우면 될 게다. 이제 마지막으로 언법을 전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구나.”
시간이 없음을 깨달은 청불노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적하의 등 뒤에 섰다.
뒤늦게 연적하가 일어나려 하자 청불노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내리눌렀다.
“앉아서 마음을 비우거라.”
“…….”
연적하는 스승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숨을 조절했다.
청불노는 연적하의 숨소리가 ‘식(息)의 단계’로 접어들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곧이어 연적하의 숨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다.
마침내 숨을 쉬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단계[息]에 도달한 것이다.
청불노가 그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바위처럼 단단한 어조로 선언했다.
“공야자와 청불노의 이름으로 말한다. 공야자와 청불노의 언법을 연남천에게 전하노라.”
연적하는 허심지경에서 청불노의 음성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전하노라’라는 말이 끝난 순간이다.
갑자기 미증유의 힘이 정수리로, 마치 도끼로 찍듯, 떨어져 내렸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아니, 그렇게 느낄 정도로 끔찍한 충격에 연적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연적하는 은은한 독송 소리에 눈을 떴다.
창문으로 희미한 새벽빛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대전 바닥에 길게 누워 있던 그는 흠칫 놀라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묵음방진이 펼쳐져 있던 자리에 청불노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스승님?”
그러나 청불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적하는 조심조심 청불노의 앞으로 다가갔다.
평소와 다름 없는 얼굴을 보니 등선 어쩌고 했던 게 농담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앞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맥이 풀린 연적하는 청불노 앞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마지막 인사도 못 했는데 이런 식으로 스승과 작별하게 될 줄이야!
언법을 전수받고 난 뒤에 유언이라도 듣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그런 과정은 없었다.
“작별 인사도 못 드렸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등선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연적하는 자신의 아둔함을 끝없이 탓했다.
인생에서 단 한 번의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생각하니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멍청한 놈. 스승님께 미리미리 인사를 했어야지. 하고 싶은 말을 못 했잖아.”
바닥으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잠시 후 그는 좌탈입망(坐脫立亡)한 스승에게 절을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
***
청불노의 등선은 새벽에 오룡궁을 청소하러 나왔던 도사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오룡궁의 도사들은 슬픔 속에서도 차분하게 청불노의 장례를 준비했다.
보름 후.
마침내 청불노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오룡궁의 대위에 좌화(坐化)한 청불노를 앉히고 도사들이 그 앞에서 경문을 읽었다.
그 와중에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다.
오룡궁의 궁주인 천명 도사가 연두비를 상주의 자리에 세운 것이다.
도사들과 수련자들은 의아해 했지만 장례식의 엄숙한 분위기에 눌려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장례식은 평소 청불노의 바람대로 간소하게 끝났다.
청불노는 뒷산에 좌화한 상태로 안장되었고, 보름 내내 지전(紙錢)을 태우던 오룡궁도 원래대로 정리됐다.
구월에는 장례식 때문에 입문식이 열리지 않았지만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심지어 입문식을 학수고대하던 장이도조차도 침묵했다.
오룡칠사는 최고의 스승이니 예우 차원에라도 뭐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룡궁 궁주인 천명 도사는 장례식이 끝난 뒤에 연두비가 청불노의 기명제자임을 공표했다.
그리고 그의 도호가 ‘남천’임을 밝혔다.
연두비와 함께 생활한 팔선각의 수련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오룡궁 도사들은 무덤덤했다.
오룡칠사들은 기인이라 보통의 잣대로 잴 수 없다는 걸 알아서다.
여하튼 청불노의 장례식 이후 연적하는 ‘남채고’에서 ‘여동빈’으로 거처를 옮겼다.
청불노의 기명제자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입문식에서 빼 준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름도 ‘연두비’에서 ‘연남천’으로 불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잘 마무리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팔선각의 수련자들은 그가 얻은 행운을 부러워하면서도 질시했다.
‘여동빈’의 속가제자들은 연남천을 꺼려 했다.
엄격한 문답식을 통과한 자신들과 달리 연남천이 오직 청불노의 눈에 들어 제자가 된 탓이다.
어떤 이들은 ‘청불노가 말년에 노망이 들었다’고까지 했다.
모두가 연남천의 구질구질한 과거사 탓이다.
연적하도 그걸 인정해 사람들의 비난을 한 귀로 듣고 흘려보냈다.
오직 이도주만이 연남천의 합류를 반겼다.
점심 식사 후.
연적하는 천각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먼 하늘만 하염없이 응시했다.
청불노가 좌화한 뒤로 자꾸 와룡장 시절이 떠올랐다.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그런 모양이다.
때마침 지나가던 이도주가 홀로 있는 그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소형제, 아니, 이제는 사제가 되겠군. 자네가 청불노 노사의 기명제자지만 내가 먼저 입문했으니 앞으로는 사형이라 부르게.”
속가제자들은 입문한 순서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다.
기명제자라고는 해도 연남천 역시 속가의 신분인지라 이도주가 사형이었다.
“그래도 아는 분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다른 사형들은 쳐다도 안 보더라고요.”
“이해하게. 입문식이 워낙 까다로워야 말이지. 최소 반년 이상 수련해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데, 사제는 두 달 만에 속가제자가 되었으니 배가 좀 아플 걸세. 입문식을 거치지 않은 대가려니 생각하게.”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 할지 몰라도 나는 청불노 노사의 안목을 믿네. 오룡육사들이 자네를 청불노 노사의 기명제자로 인정한 것도 그래서일 걸세.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술사들은 정말 깐깐하거든.”
“그렇긴 하더라고요.”
무인들의 성격이 화통한 반면 술사들은 꼼꼼하다 못해 치밀했다.
사람 피를 말리는 입문식의 까다로운 절차만 봐도 알 수 있다.
솔직히 팔선각의 엄격한 수련만 받아도 속가제자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다.
다른 방파라면 정제자로 삼고도 남을 정도로 팔선각의 생활은 엄하다.
하지만 오룡궁에서는 턱도 없었다.
강호에서 술사들이 받는 푸대접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난도(難度)였다.
‘종리권’의 장이도가 괜히 문호를 넓혀 달라고 아우성치는 게 아니다.
문득 장이도가 떠오르자 연적하는 지나가듯 물었다.
“사형은 혹시 ‘종리권’에 있는 장이도를 아세요?”
“알다마다. 상청궁 출신의 속가제자지. 왜 그러나?”
“아니, 그 사람도 사형을 아는 것 같아서 물어본 거예요.”
연적하는 얼른 말을 돌렸다.
대장부 체면에 그가 태화궁 출신을 얕보더라고 고자질할 수는 없었다.
“팔선각에서 함께 지내다 보면 서로에 대해 전해 듣게 된다네. 속가 제자라면 사문이 어디라는 정도까지.”
“그러고 보면 오룡궁은 출신을 따지지 않는 것 같아요. 아닌가요?”
“술사들은 무림의 문파에 관심이 없거든. 완전히 길이 다르다고 여기니까. 무림의 방파들이 술사들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지.”
“서로 경원시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겠죠?”
“무인들이 술사를 무시하니까, 술사도 거리를 두게 된 거라고 보여지네.”
“그건 그렇고, 사형. 속가제자가 되면 달라지는 게 있나요?”
“달라지는 거?”
“다른 팔선각처럼 숙소에서 독송을 하고, 강론도 같이 받잖아요. 따로 하는 건 없어요?”
“아! 오후에 다른 수련자들이 동원(東園)과 오룡궁에서 검술과 부적을 배울 때, 우리는 서원(西園)에서 오룡궁의 절기를 배운다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전에 한번 들은 기억이 나네요.”
“말 나온 김에 서원으로 가세. 어차피 서원으로 갈 시간도 되었으니.”
이도주가 앞장서자 연적하는 흔쾌히 그를 따라갔다.
서쪽으로 한참 걸어가자 높은 담장으로 두른 거대한 정원이 나타났다.
말로만 듣던 서원이다.
여동빈의 속가제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하나둘씩 정원에 모여들었다.
속가제자들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연적하를 힐끔거렸다.
그 어려운 문답식을 건너뛰는 특혜를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잠시 후 고학 도사가 십여 명의 속가제자들 앞으로 나왔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 은형술(隱形術)을 배워 보도록 하겠다.”
고학 도사는 공허법(空虛法), 흑암법(黑暗法), 해무법(海霧法)의 진언 세 개를 가르쳤다.
“‘공허법’이 가장 어렵고, ‘흑암법’이 그다음이며, ‘해무법’이 가장 손쉽다. 이중 하나라도 펼칠 수 있으면 성공한 것이라 인정하겠다.”
그의 말이 끝나자 속가제자들은 서거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진언을 외웠다.
반 시진(1시간)쯤 지난 뒤에 고학 도사는 속가제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세 개 중에 하나라도 펼칠 수 있으면 성공이라고 한 것은 자신에게 맞는 술법을 찾기 위함이다. 물론 세 개를 다 터득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술사는 결국 가장 확실한 하나만 쓰게 되어 있다. 은형술이란 강적 앞에서 몸을 숨기는 술법이다. 하나를 확실하게 잘하는 술사와 세 개를 어설프게 쓰는 술사가 있다면, 그중에 누가 살아남을 것 같으냐?”
“하나요.”
속가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사실 효과가 비슷하다면 가장 확실한 하나를 쓰는 게 맞았다.
속가제자들의 대답에 고학 도사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먼저 은형술을 해 보이겠느냐?”
속가제자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먼저 나서려 하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수준이라 남들 앞에 보이기 민망했던 것이다.
결국 고학 도사가 한 사람씩 지명을 했다.
속가제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지명당한 사람은 이도주였다.
이도주는 은형술 중에서 ‘해무법’을 선택했다.
“사월침침장해무(斜月沈沈藏海霧)……. 옴 급급여율령 사바하!”
주문이 끝내자 그의 몸 주변으로 희뿌연 운무가 스물스물 일어났다.
하지만 운무는 그를 가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고학 도사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너의 법력이 일천하여 운무가 약했지만 주문을 실체화한 것은 잘한 일이다. 더욱 정진하거라.”
이도주의 술법에 용기를 얻었는지 속가제자들이 손을 번쩍 번쩍 쳐들었다.
그중 몇은 이도주보다 조금 나았지만 속가제자들의 실력은 대체로 비슷했다.
하지만 모두가 고만고만 했던 것은 아니다.
“공리흑암불각비(空裏黑暗不覺飛)……. 옴 급급여율령 사바하!”
백설연이 ‘흑암법’을 펼치자 그녀의 뒤로 짙은 어둠이 내려 앉았다.
물론 전신을 가리기에는 미흡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는 월등히 뛰어났다.
고학 도사도 그런 백설연의 은형술을 극찬했다.
스승과 사형제들의 칭찬에 배시시 웃던 백설연이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연남천이 남았지만 그가 자신보다 뛰어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